돌이켜 생각해 보면 우리들 세대가 역사의 흐름 속에 참으로 힘든 시기에 태어난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였다. 출생시기가 일제의 강압으로 해방된 그이듬의 해 그러니까 서기 1946년 이였다.온 민족이 겨우 해방의 기쁨에서 벗어나기도 전 동족상잔의 처절한 비극을 맛보야만 했다. 어린 나는 한국전쟁으로 어처구니 없이 사랑하는 내 아버지를 잃어야 했다. 그 아픔은 오래 세월을 두고 뼛속 깊이 파고들어 지울 수 없는 멍에를 남기고 말았다. 천체의 수많은 별들처럼 이 땅 위에 숱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더불어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목적을 갖고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어쩌면 나만은 이리 불우한 삶을 영위하여야만 하는가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해보았다. 허나! 그에 대한 답은 끝내 찾을 길이 없었다. 생각하기조차 진저리쳐지는 전란만 없었더라면 내 아버지를 그리 허무하게 잃지 않을 것이고 그로 인한 고통을 감내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가혹한 운명의 현실은 그 모두가 어린 나에게 감당키 실로 힘겨운 일들이 크고 작은 형태로 찾아들었다. 속이 터질 정도로 갑갑한 마음에 온 사방을 휘둘러 찾아보았다. 그러나 어디인들 그 누구 하나 뼈저린 내 사연의 통한을 속속들이 깊이 알아주고 따뜻하게 받아줄 사람이 이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불운으로 얼룩진 갑갑한 현실 속에 그저 남은 혈육이라고는 어머니뿐이었다. 그저 애타게 바랄 것이 있다면 이토록 모진 세파의 거센 바람이 곧 꺼질듯이 가물거리는 우리 가족이 염원하는 소망의 작은 등불을 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극도로 궁색한 우리 집과는 정반대로 종구네 집은 그 모두가 부유로 넘쳐났다. 조상님의 은덕이었는지 동네 어른들이 흔히 말씀하시는 팔자를 잘 타고 태어난 탓인지 어린 나로서는 진위 여부를 간파할 수는 없었다. 허나 면내에서 부호로 불리는 대지주의 신분을 갖춘 종구네 아버지는 성격이 남다르게 유별나셨다. 걸핏하면 힘없는 소작농들에게 위세를 부리며 평상시에도 작은 일에 곧잘 화를 내어 마을 사람들과 잘 융화되질 못했다. 그런 연유로 마을 사람들은 늘 불만을 갖고 살았지만 그나마 소작이라도 부쳐 먹을 것을 생각하여 곁으로는 드러내질 못하고 필요 이상으로 기가 죽어 살았다. 그렇듯 천성적으로 거친 심성을 소유한 분이 이번 일로 화가 치밀어 오를 대로 올라 부글거리는 감정은 조금도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자책(自責) 속에 용서를 갈구(渴求)하는 우리 모자(母子)의 애원도 끝내 외면시하여 타협의 실마리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지루한 분위기 속에 종구 아버지의 성난 감정의 문턱에서 그저 눈치나 보며 처분만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양쪽 눈언저리 위에 검은 눈썹이 유난스레 짙어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잔뜩 주는 종구 아버지가 작심을 하신 듯 말을 꺼내셨다.
“우리가 상민이 외할아버지네 집 문간방을 빌려서 살 때 우리 아부지헌티 한 짖을 생각하면 난 시방두 치가 떨리는구먼 그려. 양반 상놈 가르고 살던 시절이라 그러려니 하구 참구 살았지만 참봉벼슬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구 을매나 사람을 그리 업신여기구 면박을 줬는지, 내 원 참!”
그렇듯 그날 밤 종구네 집의 분위기는 중형(重刑)의 선고를 앞둔 죄인을 엄하게 추궁 내지는 논죄하는 법정의 모습보다 더 숙연하다 못해 삭막하기만 했다. 나름대로 어렵게 살아온 지난날들에 대한 아픔들이 응어리져 있었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종구 아버지의 우직하게 생긴 얼굴이 흐린 달빛 속에 너무 무섭게만 보였다. 더불어 키가 작아 더욱 매몰차게 보이는 종구 어머니도 때를 놓칠 새라 종구 아버지 옆에서 촐싹대며 한두 마디씩 거들었다. 지은 죄가 그리도 많아 어머니와 나는 그분들 말끝마다 머리를 숙여 빌고 있었다. 종구 아버지는 화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물부리에 끼워 있던 담배를 그사이 벌써 다 태우셨는지 종구 아버지는 마루에 놓인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부리에 다시 끼워 무셨다.
“내사 이제야 터놓구 말하지만 상민이 엄니가 우리 집에 찾아와서 쌀 빚을 달라고 사정할 때 절대루 안 줄려 했는디, 저 여편네가 하두 졸라서 그만 편의를 봐준 것이구, 그때 상민이 애비 죽었을 때두 어디다 묻을 디가 없어서 발을 동동 구르기에 인지상정으로 등메산에 내 땅 몇 평두 그냥 빌려 줬는디, 그 은공을 이렇게 갚는구먼유, 임자 속 타서 죽겄구먼. 어여 찬물이나 한 그릇 주구려.”
자기의 감정정리가 어려워 갈증이 나시는지 종구 아버지가 잠시 말을 끊으시자 그 틈새에 담임선생님이 말씀을 이으셨다.
“종구 아버님 제가 거듭 말씀드리지만 잘못은 상민이가 저질렀고 저는 아이를 잘못 가르친 죄루 그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러니 제발 어른님께서 화를 푸시구 어린 상민이를 용서해주세유. 그리구 종구가 다친 부분은 다 나을 때까장 치료비를 모두 부담헐 테니 지 얼굴을 봐서라두 한번만 용서를 해주셔유. 지가 이렇게 부탁을 드립니다.”
선생님이 간곡하게 사정을 하셔도 종구네 아버지는 물부리를 무시고 고개를 자꾸만 소외양간 쪽으로 돌리시며 딴전만 피우시며 애써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구 아버지가 격노(激怒)하는 이유 중에 가장 큰 점은 종구가 그 집안의 맏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다음으로는 지난날 있었던 나름대로 신분상의 격차에서 받았던 아픔들이 오늘 벌어진 일과 더불어 감정이 격하게 끓어오르고 있는 듯했다.
“내사 몇 번을 거듭해서 입 아프게 말을 했지만, 내사 바라는 거 아무것두 필요 없구 그냥 내 새끼 온전한 몸으로 되돌려 놓라구유.”
그렇듯 마루 한쪽에 두 발 모다 앉으신 채 아무런 말도 못하시고 기죽어 계시던 어머니가 오랜 침묵을 깨시고 입을 여셨다.
“이유야 어찌됐던 지 자식이 못된 짖을 해서 낯짝 들 일은 없지만서두, 종구 아버님은 툭허면 종구네 할아부지가 우리 아부지헌티 그리 모질게 당했다구만 허시는디 종구네가 동네로 이사왔을 때 어찌됐던 간에 문간방 한 칸이라두 내 드렸는디 종구 할아부지가 우리 집을 상전 모시듯 허면서 머슴살이라두 했남유? 그리구 이 말은 꼭 빼놓지 말구 허야 쓰것는디 지난 난리 때 우리 아부지가 누구 땜시 억울허게 돌아가셨는디유. 울 아부지 그렇게 돌아가신 건 종구네 삼촌 때문 아닌감유? ”
울분에 가득 차신 목소리로 말씀을 하시자 그토록 거드름을 피우시던 종구 아버지가 조금은 누그러지신 듯해 보였다. 못내 홀로 남겨져 어린 자식과 온갖 설움 속에 살아왔던 아픔 말고도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던 또 다른 하나의 큰 아픔이 그렇게 어머니의 가슴속 깊이 도사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에는 종구나 내가 나이 어려 서로가 얽히고 얽힌 뼈아픈 사연들이 남긴 깊은 의미를 간파(看破)할 수도 없었다. 그런 환경 속에 어린 우리들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들 윗세대 어른들 스스로가 잔인스럽게 남긴 무책임한 행적들 때문이었다.
처절키만 하였던 한국전쟁이 종국에는 민족분단의 아픔을 잉태했다. 그 아픔들 속에 이곳 채화리 들녘 마을도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지났다. 사상과 이념의 근본적 의미도 모르는 순박하기 그지없던 일부 아둔한 마을 사람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충동질하여 마을 전체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 속에 빠트렸다. 인륜을 저버린 그 무지막지한 놈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동조를 하여 온갖 만행을 주변 사람들에게 자행했다.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픔을 당하여 억울함을 당한 유가족들이 평생을 두고 그들을 저주하며 살게 했다.
좌익(左翼)과 우익(右翼)으로 갈라진 작은 마을은 전쟁의 승패에 따라 살기에 가득 차 서로 죽이고 죽는 그런 악순환을 거듭했다. 그렇다보니 그 작은 동네에 제사(祭祀)를 같은 날 밤에 모시는 집이 마을에 두 집이나 있었다. 유순하게 자라야 할 나는 그 시대를 살았던 마을 어른들로부터 그때의 일들에 대하여 귀동냥을 하여 공산주의자들은 물론이려니와 그에 동조하여 마을 사람들을 괴롭힌 그들에 대하여 조금씩 증오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 평온했던 작은 마을에 불행스럽게 증오와 불신의 앙금들이 하나둘씩 남겨져 눈에 보이게 또는 보이지 않게 서로가 반목을 거듭하며 살았다. 그러한 모순의 후천적인 답습(踏襲)은 세월이 지난 먼 훗날까지도 대를 물려 우리들에게까지 내려오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