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이 땅에 일일이 다 열거(列擧)하지 못할 만큼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수많은 참상(慘狀)을 남겼다. 더불어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한 터라 혼란스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하기만 했다. 통한의 아픔을 당한 자는 그 상처를 안겨 준 상대를 끝없이 적대시 하여 기회만 주어지면 보복을 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비극적인 시대였다. 그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흉물스럽게 일그러진 삶 그 자체였으니 암울한 격동기(激動期)를 우리들 모두는 그리 살아야만 했다.
잠시 말문을 닫고 계시던 종구 아버지가 다시 험상궂은 얼굴에 분노에 가득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나도 할 말은 많소, 지금와서 누구라고 딱 집어서 말은 못혀두, 그때 내 동생이 우리 집 뒤뜰 대나무밭 토굴 속에 숨어살 때, 지서에 신고를 해서 붙들려가게 만들지 않았남? 그래서 결국에는 대전형무소에서 징역을 살게 만들어 속들이 시원할 것이구먼, 그려 그런 디다가 읍내만 나가면 다덜 내 등 뒤에서 수군덕거리는 거, 내가 어디 모를 줄 아는 모양이지 . 내원 참 뭐 보나마나 뻔하지 빨갱이 집구석이라고들 하겠지!”
그런 격양된 종구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계시던 어머니가 말을 이으셨다.
“하늘땅을 두고 맹세 하지만, 저는 종구 삼촌에 대해서 참말루 뭐라구 말 한마디 한 일도 없구유. 지금도 종구 아버님이 말을 먼저 꺼냈지 생각하기도 싫은 징그런 그런 일 있고 난 후에, 온 동네 사람들이 동네 사랑방에 모여 회의를 혀서 더 이상 자식들에게는 대를 물리지 말구 입을 봉하고 살자구 했는디 …….”
아무리 감정이 치솟아 올라도 동네 사람들끼리 약속한 일을 깨트리시는 종구네 아버지가 경망스럽게 보였는지 가볍게 책망하시듯 말씀하셨다.
전쟁이 남긴 천추(千秋)의 한(恨)이 모두들 가슴 속 깊이 그리도 크기만 했다. 그런 연유로 뜻이 깊은 동네 어른들이 모여 자라나는 어린 자식들에게는 그 아픔을 대물림 하지 않으려고 지난 일들을 함구(緘口)하며 살기로 약속 했었다. 허나 현실은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질 않았다. 동네에서 상반(相反)된 크고 작은 분쟁(紛爭)이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극한 다툼질을 했다. 거친 어휘(語彙)들로 서로의 허물을 과격하게 탓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그런 어른들의 볼썽사나운 행동거지가 어린 나의 미약한 지혜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상민엄니, 내 말 섭허게 생각하지 말구유. 나헌티 갚을 쌀 빚 원금하고 이자를 수일 내로 갚아주시유. 그리고 뒷산에 상민이 아버지 묘도 하루 빨리 다른 디루 이장해 주시유. 내 더 이상은 말을 하고 싶지도 않으닌께유. 암튼 그리 알구 돌아덜 가시유. 난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닌께 그리고 선생님한테는 미안스럽구먼유.”
격양(激揚)이 극치(極致)에 다다른 어투로 말을 마치신 종구 아버지가 모두 보기도 싫은 것처럼 안방으로 들어가셨다. 정말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아버지 묘를 갑자기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하니 우리 모두는 한동안 말을 잃은 채 멍하니 그 집 마루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밤이 이슥해져 가는데 종구네 집 일꾼 용만이가 동네로 마실을 나가려는지 문밖으로 어슬렁거리며 나서고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을 두고 지루하도록 말을 주고받았지만 해결은커녕 생각치도 못한 아버지 묘를 옮기라는 말을 들어 오히려 혹을 하나 더 붙이고 말았다. 참으로 허망한 인간사 속된 일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당가 우리에 매어 놓은 종구네 황소는 ‘땡그렁, 땡그렁’ 워낭소리만 처연하게 울리고 있었다. 널따란 마루에 앉아 담 너머로 바라보이는 앞집 초가지붕 위로 눈썹 같은 초승달이 구름 사이로 새치름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더는 타협의 실마리가 묘연(杳然)해지자, 서둘러 선생님이 자리를 뜨시면서 종구의 어머니에게 말씀을 건네셨다.
“아마도 지금 종구 아버님이 격노하신 상태라 더 이상의 대화가 안 될 듯해서 오늘은 지가 이만 물러가고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그리니 종구 아버님 잘 위로해주시고 종구 치료에 신경을 써 주세유.”
“네, 선생님 잘 알겠어유.”
선생님의 말씀에 종구 엄마가 야박스럽게 딱 잘라 말을 못하시고 겨우 대답을 하셨다. 부잣집답게 두 짝이 높다랗게 달린 대문을 께끄름한 기분으로 나서 세 사람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어쩌지? 우리 땜시 밥도 못 먹구 시장헐 틴디 참 얼굴을 못 들것네.” “무신 소리랴. 내사 밥은 집에 가면 마누라가 줄 건디 뭐, 그게 문제가 아니구 단순무식한 사람이니 성품 또한 그러니 아무래두 힘이 들 것 같구먼.” “음 나도 알아. 아까 종구네 아부지가 모지락스럽게 야 애비 묘 파 가라구 할 때, 말문이 막혀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어.”
그렇게 두 분이 말씀을 나누시며 어둑어둑해진 동네 골목길을 걷고 계셨다.
고샅길 토담 너머로 들려오는 뉘 집 개 짖는 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들려 공허함만 더해주었다. 모깃불을 피워놓았는지 매캐하게 풍겨오는 생쑥을 태우는 냄새 속에 여름밤은 그렇게 깊어만 가고 있었다.
“이 망할 놈에 세상 내 아부지 뼈 묻은 고향땅 하늘 아래 못 살 팔자면, 차라리 자식새끼 데리구 내가 어디루 훌쩍 떠나버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