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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42 조회 : 1,647




마을 동구 밖에는 숱한 세월동안 온갖 풍상을 견딘 탓인지 가운데가 움푹 파인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처럼 우뚝 서 있었다. 둥구나무는 들메 마을의 온갖 사연들을 저 혼자만 아는 듯 굳게 입 다물어 초여름 밤의 적막을 더했다.

우리 세 사람은 느티나무 밑에서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그리고 선생님이 어머니에게 말을 건네셨다.

“너무 크게 걱정 말구 기다려 봐. 내일 아침에 종구란 놈 담임을 만날 테닌께. 번거롭지만 종구네 담임만 나서주면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릴 것 같기두 헌디 .”

선생님은 못내 말끝을 흐린 채 아쉬운 듯싶은 표정을 지으시며 냇둑 길을 따라 자전거 페달을 밟으시며 어스름한 냇둑 위를 달려가셨다.
산릉선 너머로 줄지어 서 있는 높은 철제 송전탑(送電塔)들의 모습이 거무스레하게 보였다. 산 밑 아래엔 외롭게만 보이는 움막집이 달빛에 희미하게 자태를 드리우고 있었다.

“상민아, 너 정말! 엄마 죽으라구 그러냐? 너무 힘들어서 이제 나두 더 이상은 못허겄다.”

그토록 숱한 아픔의 너울들이 어머니의 온몸을 휩쓰는 듯싶었다. 그리고 반쯤 섞인 울음 속에 말끝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려, 남편 복 없는 년이 자식 복 있을려구. 내 속 터져 새까맣게 타는 거 누가 알 거여.”

한스러운 소리를 내시며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뒤를 어미 소 뒤를 졸랑졸랑 따라가는 송아지처럼 걷고 있었다. 커다란 아픔이 가슴을 치밀고 올라도 종구를 때린 죄책감으로 맘 놓고 소리 한번 못 내고 멍청하게 집을 향해 가고만 있었다.

“그 좋은 곳에서 날 데려가겠다구 중매가 수없이 들어왔어두 난 니놈 하나 반듯하게 키워서, 병신처럼 그렇게 죽은 니 애비 묘 앞에 떳떳하게 세워 볼려구 혔는디.”

어머니는 감정이 복받치시는지 더는 말끝을 흐리시고 말았다.
멀리 면소재지의 흐린 전등불빛들이 산짐승의 눈처럼 두 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뒷산에선 한 마리의 밤 부엉이가 저도 슬픈 듯이 섧게 울었다.

“정말 난 꾹 참구 살라고 했어. 근디 종구가 저희 반 애덜헌티 아버지가 지난 번 난리 때 인민군 헌티 달려 들다가 따발 총 맞구서 죽었다구 허면서 학교에 소문을 죄다 퍼뜨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그랬어, 내가 정말 잘못했으닌게 한번만 용서해 줘.”

하나에서 열까지 소외된 가난의 멍에로 소리 낮추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내가 저질러놓은 일에 대해 체면치레라도 하려는 듯 그제야 겨우 입을 열었다.

“엄니 우리 요기서 다른 디루 이사 가면 안 돼? 정말 나 여기가 싫어 모두 보기 싫단 말이여.”

어쩌면 들메의 그 모두가 어린 동심을 크고 작은 아픔의 넝쿨로 얽어매고 있었다. 키 작은 옥수수들이 뻘쭘하게 줄지어 서 있는 다랑이 밭을 굽이돌았다. 앞서가시는 어머니는 깊은 상념(想念)에 잠기신 듯 내 말을 그저 묵묵히 들으시며 걷고만 계셨다.

“엄니 내가 오늘 속 썩여서 정말 미안혀. 그 대신 이번 학기말 고사에서 열심히 헐께 그리고 난 불쌍한 엄니를 위해서 내년에 강경중학교에 꼭 합격하고 말 거야.”

으스름한 달빛에 비친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며 억지로나마 웃음을 보이자 그제서야 어머니도 겨우 노여움을 푸시려는 듯했다.

영산인 계룡산은 동북쪽으로 한밭으로 불리는 대전을 감싸 안고 남서쪽으로 황산벌인 논산과 금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불어 백제의 고도인 부여를 제 발치에 두고 기름진 들녘을 형성했다.
그리고 서해바다로 빠져나가는 금강 하구 쪽에 자리한 강경은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나라 삼대 상권의 하나를 이루는 상업도시로 발돋움했다. 지금은 가을 김장철에 젓갈을 사러 전국에서 모여드는 상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행정의 중심의 신도시로 변모를 거듭하는 곳이 논산이었다. 더불어 육로와 해로의 교통수단을 고루 갖춘 강경은 수산물의 유통 중심지로 성장 했다. 그리고 연무대는 천혜(天惠)의 요새지(要塞地)인 황산벌을 끼고 강병육성의 요람지(搖籃地)로 자리매김을 했다.

그 무렵 군내에 중학교의 숫자는 불과 네 개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극빈(極貧)한 가정의 사정으로 진학을 못하는 불우한 학생들을 위하여 운영되는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가 한 곳 있었다.
중학교과정이지만 졸업 후에 국가공인기관으로부터 검정(檢定)을 받는 시험을 치러야 하는 교육시설이 열약한 학교였다.

군내의 우수한 성적의 학생들이 진학하는 선망(羨望)의 대상이 바로 강경중학교였다. 그 수준이 충남의 심장부인 도청소재지에 위치한 대전중학교에 버금갔다.

“사람을 무지막지허게 두들겨 패는 망나니 같은 니놈이 무슨 중학교를 가냐? 아예 집어치우구 차라리 낼부터랑은 지게 걸머지구 뒷산에 가설람에 땔낭구나 허구 솔갈비라두 한 망태기 글어와 그게 니넘 헌티는 딱 맞는 일인께!”

고운 듯싶으면서도 싫지 않게 미운 어린 자식에게 어머니는 그렇게라도 마음에 없는 말씀을 하실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돌담 가장자리 작은 텃밭이 하나 있었다. 초여름 햇볕에 지친 듯 꽃봉오리를 오므렸던 희고 파란색을 띤 도라지꽃들이 밤이슬에 젖은 채 조용히 여명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마치 척박한 삶 속에서도 소원하는 우리 두 모자의 희망처럼 보였다.

밤하늘 구름 사이를 비집고 나온 달빛이 더없이 처연하게 보였다. 내 주위의 모든 만물들이 아주 천천히 다시 밝아올 새로운 아침을 나름대로 준비하는 듯싶었다.
그런 자연 속에서 미약할지라도 나는 늘 나만의 꿈을 이루려 애를 썼다. 동녘의 대둔산 위로 떠오르는 장엄하고 찬란한 아침 해의 기상을 꼭 빼닮고 싶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결코 굴하지 않게 살고 싶었던 어린 나의 소망을 냉엄한 현실은 그리도 외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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