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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43 조회 : 1,687




마을 어른들로 부터 늘상 들어 온 말씀 중에 참을 인(忍)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말이 피부에 절실하게 와닿았다. 격하게 끓어 오르는 순간적인 감정을 추스리지 못한 탓에 벌어진 불상사로 마음은 온통 무겁기만 했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봐도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을 해결할 실마리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종구가 다친 그 일로 인하여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마을 이장님과 입바른 소리 잘하시는 동근이 아버지가 나섰다. 그리고 동네에서 신망이 두터운 병수네 아버지와 마을에 크고 작은 타툼이 생기면 경우에 빠지지 않게 바른 소리를 거침없이 잘 하시는 삼식이 아버지께서 실마리를 찾아주시려 그리도 힘을 쓰셨다.
또한 담임선생님도 그 후 몇 차례 원만하게 조정을 해보려 온갖 애를 쓰셨다. 허나 대를 물려 내려온 해소불능의 얽히고 얽힌 격한 감정들이 때 되어 분출하고 있는지 해결의 답을 얻지 못한 채 지루하리만큼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으차피 쌀 빚 낼 때부터 각오는 했지만서루, 별도리가 읍슨께 으쩔 수 읍시 앞들 논 스마지기 모두 팔어야 쓰긋다. 그래야 그 집에 빚진 거 다 갚구 이번 참에 니놈이 저질러놓은 종구란 놈 치료비까장 물어 주구 나면 자기두 사람인디 슬마헌들 니 애비 묘를 파가라구야 허긋냐?”

온종일 장사에 지친 몸으로 돌아오신 어머니가 부엌 아궁이에 보릿짚으로 불을 지펴 저녁밥을 지으시며 체념을 하시는 듯 말씀하셨다.
마을 우물가로 물 길러 가려고 부엌 나뭇간에서 물지게를 꺼내던 나도 이번 일에 대하여 어렴풋이 예측을 하였기에 아무 말 못하고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앞 들녘 서마지기 논은 우리 두 식구에게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으며 작은 꿈의 터였다. 어머니가 이제 그 논을 팔려하시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뱃속에서 뜨거움이 귀밑까지 차올라 격하게 소리를 내어 물었다.

“왜? 엄니헌티 종구네 아부지가 우리 논을 내놓으라구 허든감?”

“아니! 차마 자기 입으루 논을 팔라는 말은 안 허지만 팔라구 하는 긋보다 더 심한 그지 뭐, 한 달 말미를 준다구 허면서 니 애비 묘를 어디루 옮기라고 저리두 들볶아대니 별수 있냐? 논 팔아서 그 빚 갚구 나서 끝까장 니 애비 묘 옮기라구 허면 남는 돈으로 어디 양지바른 디다 땅 몇 평 사서 이장을 하구 나면 명년 봄에 니놈 중학교 보낼 등록금은 될 꺼구먼.”

“엄니 그럼 나 땜시 멀쩡한 우리 논을 파는 거네? 그럼 우리는 앞으루 뭐 먹구살아? 자기네는 논두 음청 많으면서 암튼 놀부보다 더 나쁜 인간들이라구, 내가 담에 커서 어른 되면 절대루 가만두지 않을 거야.”

벅차오르는 서러움에 감정을 정리하지 못한 나는 어머니에게 울먹이며 말을 했다. 그 설움에 목이 멨다는 표현보다는 가슴이 터질 듯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었다.
내 나이 열하고 두 살에 조상님들의 숨결과 손때가 묻어났던 삶의 근원인 서마지기 들녘 논을 잃어야 하는 통한(痛恨)을 느껴야 했다.
부엌에서 밥을 지으려 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이 흐르는 눈물에 가리어 잘 보이질 않았다. 북받치는 감정을 참기 힘겨워 흐느끼면서 부엌을 뛰쳐나와 등뫼산으로 뛰어올라갔다.

“상민아 너 어디 가니, 물 길러 안 가구? 에미 좀 보고 가!”

가난을 숙명으로 늘 생각하며 살아왔던 모자에게 하늘은 그렇게 커다란 시련을 부여시키며 시간의 흐름을 재촉하고 있었다.
영롱한 노을빛이 찾아드는 언덕마루에서 내려 바라본 읍내의 그 모든 자태는 오늘 따라 왠지 서럽게만 보였다.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설움에 터져 나오는 눈물이 야윈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설움에 겨운 한풀이를 하는 양 작은 손으로 힘껏 한 줌의 잔디 풀을 움켜쥐고 뜯었다. 이내 곧 떨어질 것 같이 아롱진 눈물방울 속에 내려다보이는 서마지기의 논을 바라보는 순간 멈추려 애를 썼던 울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아픔으로 돌돌 뭉친 내 어린 한숨도 울음 속에 함께 묻어났다.

온 만물이 태동(胎動)하는 이른 봄엔 아버지를 졸라 물기 잘 오른 버들가지 비틀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앞산엔 새 삶에 둥지를 만들려는 딱따구리가 ‘똑똑똑똑’ 부지런히 소릴 내어 마치 사찰에서 스님들이 두들기는 목어소리처럼 들려왔다.
눈 앞에 펼쳐진 푸른 들녘이 늘 생기롭게만 보였는데 그날 만큼은 왠지모르게 쓸쓸하게만 보였다.

나름대로는 내 여린 유년시절의 추억들이 아기자기하게 서려있는 땅이었다.
그 언젠가 논배미 안에 꾸무럭거리는 미꾸라지와 슬금슬금 기어가는 물방개를 잡으려다 좁다란 논둑길이 미끄러워 그만 논배미 흙탕물에 빠지고 말았다. 진흙탕 물에 옷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그날은 어김없이 어머니에게 큰 꾸지람을 들었다.

모내기철에는 동네 사람들이 논배미 옆에 있는 반석에 모여 앉아 머리를 마주대고 모처럼 만에 먹어보는 쌀과 보리를 반쯤 섞은 밥에 허기를 달랬다.
읍내 어물전에서 사온 간 고등어에 감자를 넣어 끓인 찌게는 입맛을 한층 돋우었다. 그런 들메 마을의 평온을 기원하는 듯 제비들이 하늘 높이 치솟아 날고 있었다.
온몸에 허물이 벗겨질 듯 내리쪼이는 뙤약볕 아래 밀짚모자를 눌러쓰신 아버지는 두 팔이 벼 잎에 스쳐 베어도 단 한 번 아프다 하지 않으셨다. 온종일 허리 굽히셔 호미로 벼 포기 사이사이에 김을 매어 잡초를 뽑으시며 피사리를 하셨다.
가뭄이 온 대지를 메마르게 하여 논에 물이 말라 거북이등처럼 금이 그어져 갈라질 때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겨우 고여진 물웅덩이에서 물동이로 물을 퍼 날랐다. 그런 정성 탓으로 벼는 파릇한 제 머리를 하늘 향해 곧추세우고 메뚜기들은 들녘 논배미가 제세상인 양 이저리 날뛰었다. 또한 검푸른 하늘엔 꼬리 끝이 빨간 고추잠자리들이 떼를 지어 한가로이 맴돌고 있었다.

풍요의 계절인 만추(晩秋)에는 너른 들녘이 황금빛 물결로 바다를 이뤘다. 알차게 영근 벼를 먼저 추수한 어느 집의 방아 찧는 정미소의 발동기(發動機) 소리가 온 마을로 든든하게 울려 퍼졌다.
이른 봄부터 어머니가 공부를 잘하면 꼭 해주신다고 하셨던 누런 호박꼬지에 해콩을 듬뿍 넣어 시루에 찐 떡을 때 묻은 손에 들고 그도 좋아 마냥 웃으며 먹었다. 그리고 겨울을 지낼 양식으로 방 아랫목에 쌓여지는 쌀가마를 바라보며 ‘야! 이제 우리 집두 부자 됐다.’ 라고 껑충껑충 뛰면서 좋아했다.
이제 그런 고운 추억마저도 잊어야만 했다. 들녘 논 서마지기를 남에 손에 넘겨주고 살아야만 하는 냉혹한 현실의 매정함에 텅 빈 허공에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없었다. 그리고 내 아버지를 잃어버린 그 아품 다음으로 내 어린 가슴속에 또 다른 상처로 뚜렷하게 각인되었다.
그 아픔이 어린 내 가슴속에 흉상(凶相)으로 옹골지게 남겨지는 그해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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