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듯 세월이 지났어도 지난 일들이 바로 엊그제에 있었던 것처럼 너무도 생생하게 떠오르니 굳이 회고(回顧)라는 단어로 표현치 않아도 될 성싶다. 그중에서 몇 가지 일들은 다시금 되뇌이기에 참으로 버겁기만 하다.
그렇듯 지나간 내 삶을 되뇌이다 보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바로 그 사람이 내 친구 종구 아버지였다. 어쩜! 티끌 하나 없이 자라났어야할 내 유년기에 운명처럼 슬픈 한 획을 그어 놓은 장본인이었다. 종구 아버지는 그토록 냉혈(冷血)적인 삶을 사셨던 분이었다. 허긴 그 분에게도 나름대로 그럴만한 이유가 나름대로는 있었던 것 같았다. 지난날 자신이 일본 사람 밑에서 하인의 신분으로 굽신거리며 밑바닥 삶을 살았기에 느껴지는 열등의식 내지는 그로부터 얻어지는 괴리감 때문에 심성이 더욱 비뚤어지신 것 같았다.
언젠가 밤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밤이었다. 어머니께서 밤이 깊어가도록 종구네 집과 외갓집 사이에 얽힌 내력에 대하여 상세하게 말씀해주셨다. 아주 오래전 종구네 아버지가 본래 사셨던 고향 전라도 김제 어딘가에서 우리 마을로 처음 이사를 오셨을 때 기거할 집을 구하지 못해 어려웠을 때 내 외조부께서 사정을 딱하게 여기셔 문간방 하나를 내주셔 그 많은 식구들이 문간방에서 기거를 하면서 외조부님이 경작을 하셨던 논 일과 밬 일을 조금씩 거들어 주면서 옳바른 삶의 안정적인 터전을 잡기까지 실로 어렵게 살았었다.
동네에 다른 집들의 논밭 일을 거들고 끼니를 이을 양식을 얻어 겨우 연명을 할 정도로 어렵게 지내셨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마을내에서 엄청스레 많은 토지를 거머쥐고 대단위 경작을 하는 일본 사람 밑에 들어가 아랫사람의 신분을 자청하며 살았다. 그리 어렵던 그 시절에 자신 앞으로 된 땅 한 평 없이 많은 식솔들과 도저히 살아나갈 길이없어 일본 사람에게 그저 머리를 조아리며 뼈 빠지게 농사일을 거들면서 사셨다.
그리 어렵게 살아왔던 그 시절에 얻어진 상처들로 쌓인 분노에 찬 앙금이 그분 가슴속에는 늘 가득 차 있었다.그런데 그분에 대한 모든 것을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와 한마을에서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것 같았다. 좀 더 자세히 말을 하자면 일종의 잘못된 자격지심이 그분으로 하여금 더욱 모질고 거친 언행을 하게 한 주된 요인인 것 같았다.
그러다 8.15 해방이 되자, 일제치하에서 강제로 땅을 빼앗겼던 사람들은 그제야 자기들 땅을 되찾을 수 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기대감에 마음이 마냥 부풀어 올라 그리 되리라 철썩 같이 믿었다. 허나 국가가 환수한 그 땅들은 원래의 주인들에게 되돌려 지지 않고 일반인들에게 불하되고 말았다.
일제치하에서 오랜 세월 동안 땅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어렵게 살았던 그들에게는 땅을 되찾을만한 경제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토록 철썩 같이 믿고 있던 그 땅이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땅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가득 부풀어 있던 민초들의 꿈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일본인들이 경작을 하다 패망으로 도망을 치면서 남겨놓고 간 땅을 국가로부터 불하를 받았던 그 시절이었다.
종구 아버지가 그 방대한 농토를 적법절차를 밟아 취득한 것을 동네 사람들이 다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개운치 않게 생각한 점은 과연 그 많은 농토를 사들이는데 쓰인 돈이 과연 어디서 났느냐는 것이었다.
그 점에 대하여 종구 아버지는 친분이 있는 사람이 끈질기도록 물으면 오랜 세월동안 일본 사람 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모았던 돈이라고만 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그 말을 곧이들으려 하질 않았다. 그 막대한 돈에 대한 출처는 종구 아버지가 끝내 진실하게 입을 열지 않아 하늘이 알고 땅이 알 일이지 그 어느 누구도 알 수가 없었다.
한때 동네에 떠도는 소문은 이러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토록 서슬 퍼랬던 일본인이 우리 한국인들의 보복이 두려워 벌벌 떨고 있을 때였다. 종구네 아버지와 종구네 삼촌 두 형제가 일본인 가옥에서 함께 숙식을 하면서 신변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야밤을 틈타 도망을 쳐 본국인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부산항으로 갈 때에도 두 형제가 부산까지 함께 동행을 해주었다. 그로 인해 고마움을 느낀 일본인으로부터 막대한 돈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돈을 주고받은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 그 어느 누구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그런 말마저도 그저 떠도는 소문에서 소문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더러더러 그럴 법한 이야기들이 나돌았지만 이유야 어찌되었던 간에 종구 아버지가 정당하게 불하를 받은 땅인지라 그 누구도 종구 아버지 면전에서 말을 꺼낼 수도 없었다.
해방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온 강산을 피로 물들였던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자기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지키려 몰두하다 보니 그런 쪽으로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삼년이 지나 그 지긋지긋했던 전쟁이 멈춰 휴전이 되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가뭄과 기근 속에 당장 끼니를 이를 양식거리 걱정이 앞서다 보니 동네 사람들의 뇌리에서 종구네 논에 대한 관심은 아예 뒷전으로 멀리 밀려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간고하게 사는 동네 사람들이 소작농이라도 붙여먹으려고 하니 땅주인인 종구 아버지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을의 힘에 균형이 자연스럽게 종구 아버지에게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그런 말들을 예전처럼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그렇게 얻어진 비옥한 그 넓은 땅은 그분으로 하여금 분수에 넘쳐나는 부를 이루게 했다. 비록 삶의 질을 높이고 풍요를 얻기는 하였지만 이미 모순되게 변질되어 고갈된 인성으로부터 얻어지는 정신적 빈곤은 쉽게 떨치질 못했다.
외조부께서는 광란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독한 병환의 후유증으로 몇 년을 지속하여 병석(病席)에 계셨다. 그 여파로 작고(作故)하실 때까지 병 치료를 위하여 약값을 대느라 앞 들녘 기름진 논 열 마지기를 강경 읍내에 어물전을 하는 최씨 영감에게 팔고 말았다. 수년 동안을 한약 냄새에 찌들어 살아오신 어머니께서는 어쩌다 동네 고샅길을 걸으실 때 멀리 다른 집에서풍겨오는 한약냄새에도 너무 지겨워하시며 머리를 흔드셨다.
어머니의 혈육은 밴 위로 언니되시는 분과 그 다음으로 외삼촌이 계셨다.외삼촌께서는 전쟁이 끝난 후 흉흉하기 그지없는 마을로 그제서야 돌아왔다. 마을의 참상(慘狀)들이 그리도 싫으셨던지 이미 기울대로 기운 가산(家産)에 남은 논 열두어 마지기 중에서 어머니에게 논 서마지기를 남겨주셨다. 그리고 남은 논 아홉 마지기 중에서 다시 세마지기를 운주 지역 싸리재 골에서 산판 발매업을 하고 계시는 이모님에개 나누워 주고 남은 가산을 정리하여 외숙모의 고향인 전라북도 진안지역에 있는 운장산 밑 어느 산간마을로 이사를 하셨다. 그 무렵 고향 땅에 있던 외조부와 외조모의 분묘(墳墓)도 그 곳 산골로 이장을 하여 아주 양지 바른 곳에 두 분을 합장하여 모셨다. 그런 관계로 그곳과는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진 탓인지 수해동안 서로 연락이 전혀 없어 외삼촌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없었던 상태였다.
그렇듯 전쟁은 무수히 많은 모순들을 땅위에 잔재(殘在)시켰다. 그 잔재로부터 인위적인 작태(作態)로 생긴 여러 갈래의 상처들이 한가정의 몰락을 자초했다. 그 마지막 수순이 힘겹게 살아가는 두 자모를 향해 멈춤을 모르고 진행되었다. 가진 재산 전부가 겨우 논 서마지기였다. 그것마저도 면소재지에서 점방(店房)을 하시는 턱밑으로 길게 자란 검은 수염이 강한 인상을 주는 털보 강씨 아저씨에게 팔려가고 말았다. 비록! 서마지기의 작은 논이었지만 어린 나에게 주는 정신적 비중은 넓은 하늘에 버금갔다. 그런 정신적 버팀목인 그것을 자의였던 타의였던 잃을 수밖에 없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여름 대지의 열기만큼이나 마딘 삶의 한 맺힌 숨소리마저도 그런 형태로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토록 어둡기만 한 역사의 격동기에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어린 우리들을 아울러 주는 듯이 한 덩이의 새하얀 뭉게구름이 하늘에 곱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통 검정 칠을 한 학교 양철지붕 위에 저녁노을이 찾아들려하는 늦은 오후였다. 교실 안에서 선생님은 한 학기 성적표를 우리들 모두에게 나눠주셨다. 생활 성적표를 손에 받아 쥐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펼쳐 기록된 성적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붓두껍으로 빨간색의 동그란 모양이 찍힌 성적표에는 나름대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은 탓인지 자연과목과 미술에 (우) 두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수)였다. 그리고 가정통신란에는 ‘과묵한 성격에 매사(每事) 성실히 노력하며 창의력이 강한 학생입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열악한 환경적 요인으로 주위로부터 소외된 채 살 수밖에 없었던 나에게 학교는 어머니의 품과 같은 안식의 터였다. 그리고 담임선생님은 아버지와 같이 의지하고 싶은 안도감을 주시는 분으로 내 가슴속에 늘 존재했다. 학업성적통지표를 받아든 우리들이 시끄럽게 웅성거리자 선생님이 지시봉으로 칠판을 두어 차례 치셨다.
“자, 다들 선생님한테 주목! 오늘 나누어준 생활성적표는 여러분이 지난 한 학기 동안 공부한 결과이니까 성적이 좋은 사람은 더 열심히 하고, 부진한 사람은 더욱 노력해서 다음 학기에는 더 좋은 성적을 거두길 바란다.”
널따란 운동장이 네모난 유리창 밖으로 내보이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바쁜 걸음들이 그지없이 정겨워 보이는 학교의 오후 정경(情景)이었다.
“야, 강상민 너 쌈도 잘하지만 공부도 잘했네. 내가 (수) 하나 더 많아서 이겼지만 암튼 좋은 성적 낸 거 축하한다.”
단발머리 부반장 아니 그보다는 작은 시골에 권위의 상징인물인 지서주임의 딸인 석란이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건넸다.
“응 고마워! 그리구 전번의 일로 날 용서해준 니네 아부지두 고맙구.” “알었어! 우리 아부지가 너 보고 용서해준 게 아니구, 새오젓 팔러 댕기면서 고생허는 니네 엄니가 불쌍혀서 용서해주신 거래.”
석란이의 말이 끝나자 옆에 서 있던 같은 반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모아졌다. 석란이의 말에 무척이나 부끄러워 머리를 조금 숙인 채 교실문 밖으로 나오려 하는데 석란이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야, 강상민! 내 말에 기분 나쁘냐? 그럼 내가 사과를 할게.” “아니, 뭐 사과헐 필요 없어. 가난허게 사닌께 그런 소리 듣는 게 당연하지 뭐!”
대답은 아무렇지 않은 듯싶게 하였지만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좁은 뇌리 속에 교차되고 있었다. 부(富)와 빈(貧)의 격차에서 오는 열등감 그리고 석란이가 알고 있을 것만 같은 팔려나간 서마지기 논의 행방에 대한 자격지심(自激之心)으로 더욱 복잡해지기만 했다.
“나는 그런 생각으루 한 말이 아닌디.”
석란이가 언뜻 ‘새오젓 장시’라는 말을 해놓고 미안했던지 의기소침해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됐어! 그만 얘기하자. 나 너랑 더 이상 말하기 싫으닌께.”
자신의 부족함을 궁색하게라도 회피(回避)하고 싶은 나는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가난의 꼬리를 떼어내지 못하는 아픔을 하필이면 석란이에게 들은 것이 너무나 싫었다. 지난번 종구와 싸운 일로 끌러가 지서에서 나와 선생님 자전거 뒤에 매달려 언덕 위에 올라 바라보았을 때 그 예쁘기만 했던 석란이의 얼굴이 삼식간에 그리도 밉게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