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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46 조회 : 1,669




내 딴에는 애써 가꾼 개구리참외에 마음을 담아 주었건만 그로 인해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석란이 눈에는 내가 준 개구리참외가 그리도 보잘것없어 보인 것 같아 못내 서운하기만 했다.
그래도 봄부터 여름까지 온갖 정성들여 가꾼 첫 수확물이었다. 내 작은 성의를 보이려고 개구리참외를 건넸다가 겉껍질이 정말 볼품없는 참외처럼 무안을 당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학교에서 석란이와 얼굴이 마주치게 되면 서로 쳐다보기가 왠지 어색해졌다. 덤으로 같은 반 친구들로부터 ‘쌩참외’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니 밭에서 그냥 잘 익어가는 참외를 공연히 따왔나 하는 후회도 해봤다.

후끈거리는 한여름 더위에 저마다 싸온 도시락 반찬냄새가 교실 안에 진동했다. 시큼한 냄새가 그리 났어도 점심시간은 슬슬 배가 고파 우리들 모두가 무척이나 기다렸던 만큼 즐거운 시간이었다.
같은 반이면서도 점심을 먹을 때는 자연스럽게 편(便)이 갈라졌다. 그런 편 가름은 기본적으로 먼저 남자와 여자로 분리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은 각자의 취향(趣向)과 이해관계에 따라 자리를 이루어 책상 한가운데에 반찬통들을 모아놓고 서로 머리를 마주대고 그리 정답게 밥을 먹었다.
언제나 석란이의 자리 주변에는 많은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그것은 석란이의 가정환경이 풍요롭고 학업성적이 월등한 만큼 자기 주관성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암튼 우리 반에서 석란이의 그 인기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에 반해 나는 학급석차는 늘 상위권을 차지하였지만 쌀알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퍼석한 감자에 보리가 잔뜩 섞인 밥으로 도시락을 채웠다. 그리고 폭 삭아 콜콜한 냄새가 지독스럽게 나는 젓갈이 그렇게 부끄럽기만 했다.
그런 탓에 늘 도시락을 들고 학교 뒤뜰 무궁화나무 그늘 밑에서 홀로 밥을 먹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도시락 뚜껑을 열고 젓가락으로 밥을 조금 떠서 ‘고수레’라고 말을 하며 땅 위에 던졌다.

새하얀 목화송이처럼 마냥 부풀어 오르는 뭉게구름을 벗 삼아 밥을 먹었다. 풀잎 위엔 연초록색 여치가 언제 왔느냐며 눈인사를 하는 듯 양쪽 더듬이를 곧게 세운 채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그리 밥을 먹고 있으면 ‘샤론의 장미’라는 말에 걸맞게 활짝 피어난 무궁화 꽃이 그리도 담결하게 보였다.
단 하루 밖에 피지 못하는 꽃이라 그런지 다음 날에는 꼭 오므린 꽃봉오리를 축 늘어트리고 있는 무궁화가 그리도 볼품없어 보였다. 그래도 또 다른 줄기에 꽃들이 순차적으로 피어나니 어찌 보면 나름대로 위계질서를 잘 지키는 나무같이 보였다.

무궁화에는 꿀을 따려고 부지런히 들락거리는 별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내 주변을 맴돌아 혹시나 벌에 쐴까 싶어 신경이 무척 쓰였다. 고수레로 던진 밥덩이에는 허리가 잘록한 검정 개미가 밥덩이를 옮기려고 있는 힘을 다해 바동거렸다.
그리고 어쩌다 젓가락을 안 가지고 온 날엔 사방을 두리번거려 선생님들과 학교 소사 아저씨의 눈을 피해 무궁화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겨 젓가락으로 만들어 밥을 먹었다. 그렇게 홀로 먹는 밥도 어렵게 사는 나에게는 그저 고맙기만 했다. 그리고 가뜩이나 배고픈 나에게는 참으로 든든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상민아, 너는 맨날 도시락 들구 어디루 가니? 교실에서 안 먹구.”
“응, 그냥 혼자 먹을라구.”

점심시간에 자주 밖으로 나가는 내 모습이 이상스러웠던지 석란이는 가끔씩 그렇게 질문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사실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답답함을 대신 말하여 주는 것처럼 교실 밖 플라타너스 나무숲에서는 따가운 햇볕 아래 매미들이 요란스럽게 울고 있었다.

“반장하고 부반장은 교무실에 와서 방학 책을 수령해 가라!”

오후수업이 끝난 후 연박하신 선생님의 말씀에 교실 안은 기쁜 함성이 울려 퍼졌다.

“모두들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 오응태, 저놈이 제일 떠드네. 이제 나한테 혼날 일도 없고 원 없이 실컷 놀겄구나!”

그래도 응태가 그리 밉지 않으신 듯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러자 또다시 교실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아이들은 방학이 그리도 즐거운지 저마다 떠들어댔다.
반 친구들은 인쇄한 기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여름방학 책을 한 권씩 손에 들고 껑충대며 하나둘씩 교문 밖으로 나섰다. 그중에 빨간색 책가방을 들고 흰 꽃무늬 레이스가 달린 블라우스에 짧은 검정 치마를 입고 걸어가는 단발머리 석란이의 예쁜 모습도 아이들과 어우러져 교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학교의 뒷문을 빠져나와 바라본 하늘엔 양떼 같은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구름들은 내 움막집 위를 지나 마을로 향하고 마을 골목길 어디쯤에서 엿장수 아저씨가 두드리는 가위소리가 멀리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빨갛고 파란 색소를 고루 섞어 만든 박하 엿을 파는 엿장수 아저씨가 마을에 오는 날은 온 동네 꼬마들은 신바람이 났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헌 고무신과 빈 병들을 저마다 손에 들고 엿장수 아저씨의 지게를 에워싸 달달한 엿에 군침을 삼키며 차례를 기다렸다.

그 당시 간식이래야 보릿겨에 설탕 대신 식품첨가물(食品添加物)인 사카린이나 감미(甘味)를 물에 녹여 부은 후 솥에 넣고 찐 보리개떡이 전부였다. 그러니 박하 엿은 눈깔사탕과 더불어 우리들 모두에게 귀한 간식거리였다.
어쩌다 운 좋으면 읍내 오일장에 어머니 뒤를 따라가 중국집에서 자장면 한 그릇을 얻어먹는 것이 큰 낙이었다. 자장면을 그리도 빨리 먹어 그릇을 비우고 적은 듯 아쉬워하면 어머니는 그런 모습이 안쓰럽고 귀여우신지 주먹을 가볍게 쥐시고 한차례 쥐어박을 듯 하며 그릇 안에 남아 있는 자장면을 슬며시 내 그릇에 덜어주셨다.
입가에 시커멓게 그 흔적들을 잔뜩 묻히고 그도 좋아 웃고 돌아오는 것을 큰 행복으로 알고 살았던 것이 그 시절의 정경(情景)이었다.

방학 책을 손에 들고 푸릇하게 알이 영글어가는 콩밭 둑길을 옥순이와 함께 재잘거리며 마을로 향해 걸어갔다. ‘따다다닥’ 소리를 내며 힘찬 날갯짓으로 풀무치 한 마리가 단 한 번에 그리 멀리 날쌔게 날아가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메뚜기가 벼 잎을 갉아먹지만 풀무치는 더욱 심하게 갉아먹는다고 하셨다. 그렇게 묘기를 부리듯 멀리 날아가는 풀무치를 바라보며 이번 여름 방학숙제 중에서 곤충채집을 잘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방학이 끝난 후에 실시하는 전시회(展示會)에서 빨간색 종이의 꼬리표가 붙여지는 우등(優等)을 꼭 하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 해봤다.

비석골 공동묘지 앞에서 저 멀리 읍내를 바라보았다. 오늘도 무거운 젓갈동이를 머리에 이시고 이 마을 저 마을 이집 저집으로 다니시며 ‘새오젓 사시유. 새오젓 사, 어리굴젓이유.’ 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해 마음이 아려왔다.

그해 여름방학과 더불어 우리 마을에 작은 변화의 물결이 흐르고 있었다. 바로 4-H 구락부 운동의 바람이 우리 마을에도 불어왔다. 마을 어귀에 커다란 바윗돌을 마치 장승처럼 세워 돌 앞면에 초록색 페인트로 클로버 잎을 그려놓았다.
그리고 클로버 잎 네 귀퉁이에 지덕노체 라고 하얀 글씨가 보기 좋게 쓰여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잔뜩 신기한 눈빛으로 새로 세워놓은 바윗돌을 바라보며 그 뜻을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또한 마을의 젊은이들은 회장으로 뽑은 기성이형을 중심으로 농촌운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좁다란 마을길을 정비(整備)하고 공동 우물터를 보수(補修)하여 깨끗하게 청소했다. 또 농사의 밑거름이 되는 퇴비를 공동으로 증산(增産)하기 위해서 들에 나가 풀들을 베어 지게로 지어 나르기도 했다.
그 운동의 주체인 구성원들은 마을의 젊은 남녀들로 자체적인 모임을 갖기 위하여 밤으로 마을 밖 느티나무 아래 모여 회의를 했다.

그렇게 머리가 다 큰 총각처녀들이 한데 어울리는 것을 오랜 세월 동안 윤리적이며 봉건주의(封建主義)적 사고에 젖어 살아온 동네 어른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유난히 극성스러운 종구 아버지도 자기의 큰딸인 정희누나가 그 모임에 가입하는 것을 두고 극성스럽게 질책(叱責)을 하시며 말리셨다.

“이놈의 세상이 어찌될라구 저 지랄 병들이랴! 밤마다 비 맞은 달구새끼들모냥 우르르 죄 몰려 댕기면서 무신 넘에 짓들을 하고 댕기는지. 나사 알다가두 모르것네 그려. 무신 연애 짓거리라두 허는 건지. 암튼 그놈의 신식 바람이 자식덜 다 망쳐버리는구먼 그려.”

가뜩이나 심술궂게 생긴 얼굴을 찌푸리시며 영 못마땅하신 표정을 지으셨다. 종구네 아버지가 그런 운동을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깊은 이유는 딴 곳에 있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깥세상 물정에 어느 정도는 어두운 소작농들이 개화의 바람으로 깨우쳐 자기에게 반목을 할까하는 노파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지난 난리에 끌려가셔 억울하게 목숨을 잃으신 기성이형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다.
대전 형무소에서 반공법 위반으로 징역을 살고 있는 자기 친동생이 저질러 놓은 일이라 늘 부담 속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피해 당사자의 아들인 기성이형이 청년회장이 되어 여러모로 자신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안겨주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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