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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47 조회 : 1,620




하루의 시작은 언제나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저 매일 매일이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다.
허나 이제 그토록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잠시나마 그 모든 긴장감으로부터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상민아, 싸게 일어나라! 어여 밥 먹구 나서 밭에 풀 좀 뽑아 줘라. 뭔 놈의 풀이 징그럽게 많은지 모르것다. 그리고 니 학용품 값 여기 놓고 간다.”

늘 그랬듯이 어머니는 아침밥을 뜨시는 둥 마는 둥 하시고 옹기동이를 머리에 이고 읍내로 장사를 나가셨다.
그나마 믿고 의지했던 서마지기 논이 남의 손에 팔려 간 뒤 어머니와 내가 느끼는 삶에 대한 강박감(强迫感)은 무척이나 심했다. 더욱이 다가오는 춥고 긴 겨울을 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그리도 무겁기만 했다.

남쪽으로 난 봉창 밖에 참새들의 재잘거림이 귀에 거슬리게 들려왔다.
한동안 이저리 뒤척이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무심코 방벽을 바라보았다. 네모난 액자 속에 넣어진 아버지의 흑백사진이 방벽에 걸려 있었다. 그저 답답하리만큼 입을 꾹 다무신 채 나를 향해 내려다보고 계시는 갓 같았다. 그리고 덜 닫힌 방문턱 앞에는 학용품을 살 돈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진저리쳐지는 가난과 온갖 고생만을 유산인 양 남겨둔 채 허무하게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또다시 일기 시작했다.
어머니께서는 온종일 장사를 하시느라 이 동네 저 동네를 수없이 걸으셨기에 발이 부르트시고 발뒤꿈치에 금이 갈라지셨다. 그렇게 어머니가 힘들어 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면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더욱 커졌다.

그런 감정들이 유발(誘發)되면 마음은 다시 어둡게만 하여 색바래져가는 아버지의 사진을 애꿎게 바라보며 울먹이고 말았다. 또한 그런 슬픈 감정이 치밀어 오는 것이 힘에 겨워 나는 방문을 열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분에게 그런 생각을 하여서는 안 된다고 수없이 다짐을 했다.

한여름 해는 학교 운동장 한가운데를 여유롭게 지나 마을로 내려서고 있었다. 울타리 가장자리엔 제철을 맞은 봉숭아가 빨간 꽃을 활짝 피웠다. 키가 큰 해바라기는 저도 나처럼 그 무엇을 그토록 애를 태워 갈구하는 듯 무거운 목을 하늘 향해 잔뜩 치켜들고 뻘줌하게 서 있었다.
사립짝 앞에서 바라보이는 마을 모습은 그리도 정겹게만 보였다. 초가지붕 들이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있는 그 한가운데 종구네 기와집에 시선이 멈췄다. 그리고 나 자신도 모르게 이내 길고 의미 깊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전라도 땅 끄트머리 목포로 향하고 있는지 검은 화물열차가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왔다. 기차의 검고 육중한 몸체가 잠시 마을 모습을 가리는 듯싶더니 이내 잽싸게 스쳐 지났다.

잠시 후 동네 고샅길에는 자전거를 타고 오는 종구의 모습이 보였다. 약 보름 전 읍내 자전거포에서 사온 삼천리호 자전거를 온 동네에 자랑하려는지 이 골목 저 골목을 한동안 내달리던 종구가 둥구나무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를 신기하고 부러운지 꼬마 녀석들이 소리를 치면서 뒤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면소재지로 가려는가? 언덕 아래 달구지 길로 달려오는 종구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자전거의 두 바퀴의 수많은 자전거 살들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탐스럽게 빛났다. 자전거 위에 올라탄 종구가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며 보라는 듯이 힘주어 내달렸다.

‘나도 저런 자전거 한 대만 있었으면 …….’ 하며 나 혼자만의 생각을 해보았다. 허나 냉엄한 현실은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었다. 아쉬움만 가득한 채 갖고 싶은 욕망을 그쯤에서 접어야만 했다.
언젠가 한번 어머니에게 자전거를 사달라고 얘기를 꺼낸 적이 있었다.

“야, 이 철딱서니 없는 놈아! 뱁새가 황새걸음 따라가려고 하면 가랭이가 찢어지는 법이여.”

듣기 싫게 느껴지는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개울가에 가려고 참외밭으로 향하는데 내 옷자락에 스치는 길섶 강아지풀 소리도 허전하게 들려왔다.
‘나도 학용품 사러 면소재지 점방에 가야 하는데 종구란 놈 으스대는 꼴 보기 싫으니까 면소재지로 간 종구가 마을로 돌아온 후에 가야지!’ 하고 속마음으로 생각하며 텃밭으로 내려섰다. 텃밭엔 달디 단 냄새를 은은하게 풍기는 개구리참외들이 푸른 잎들을 헤치고 몸뚱이를 앞 다투어 드러내고 있었다.

면소재지에 갈 때 무엇을 입고 갈까하며 한참을 망설였다. 평상시에는 때 묻고 구멍이 뚫린 러닝셔츠에 엉덩이 부분을 기운 바지도 잘 입고 다녔다. 그런데 석란이에 대한 그런 감정이 생긴 후부터는 별스레 옷에 신경이 써지기 시작했다.
방으로 들어와 반닫이 속에서 밀가루 풀을 잘 먹여 다림질 곱게 한 반소매 남방(南方)셔츠와 회색 나일론천의 반바지를 꺼내 놓았다. 어머니가 단골로 거래를 하신 읍내 젓갈 도매상을 하시는 조씨댁에서 여름방학에 내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고 하시어 그때 입고 가려고 준비했던 옷이었다.

어머니와 조씨댁 아주머니는 국민학교를 같이 다니신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렵게 사시는 우리 집 처지를 깊이 생각하시어 어머니에게 젓갈 장사하는 법을 가르쳐주신 분이셨다.
그리고 홀로 고생하시는 어머니 모습이 측은(惻隱)하셨던지 여러모로 돌봐주셨다.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우리 아들이 공부를 잘한다고 턱없는 자랑을 하신 탓에 조씨네 두 내외(內外)분이 나를 한번쯤 보고 싶어 했었다.
그런 연유로 며칠 후 읍내 조씨네 점포에 가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 만남의 시작은 어렵게 자라나는 내 처지에 대한 순수한 동정(同情)이었다. 그분들은 그렇게 스스럼없이 나를 만나려 했고 나 또한 단 한 번 본 일이 없는 그 집 사람들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면소재지 화산리에는 네모난 유리창에 붉은색 페인트의 서툰 글씨로 ‘이발’이라고 쓰여 있는 초가지붕의 작은 이발소가 있었다. 키가 작은 우리들은 투박한 나무의자에 올라앉자 이발기계가 가금씩 머리를 집어 뜯어 따끔한 아픔 속에 얼굴을 찡그리며 머리를 깎았다.
이발소에서 면사무소를 지나 조금만 내려오면 모든 아이들의 선망(羨望)에 대상인 검정 턱수염의 강씨 아저씨네 점방이 있었다. 점방에는 예쁘게 색을 칠한 방패연과 무궁화표 연필, 그리고 꽃무늬의 플라스틱 책받침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둥그런 유리병 안에 여러 가지 색깔의 눈깔사탕이 군침을 돌게 했다. 한참을 빨아 먹다 보면 입언저리가 새빨갛게 묻어나는 나무막대에 꽂혀 있는 고추과자도 눈에 쏙 들어왔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재미로 양쪽 볼에 힘을 주어 힘껏 불다 보면 펑하고 터지는 고무풍선도 두툼한 마분지 위에 납작납작 끼워 있었다. 가위로 둥그렇게 잘 오려 땅바닥에 치고 노는 딱지와 알록달록한 색깔의 유리구슬이 납작한 목반(木盤) 안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장마철에는 꿉꿉한 냄새가 나는 말린 오징어도 철사 줄에 끼워 점방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볼거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에 어린 우리들에게는 나름대로 큰 눈요깃거리가 되었고 그 점방집이 엄청난 부잣집처럼 보였다.

하늘 향해 높다랗게 치솟아 있는 당산나무엔 재 너머 수랑골에 사시는 무당 아주머니가 빈틈없이 빙 둘러놓은 새끼줄에 울긋불긋 천 조각을 매달아 놓았다. 서낭당 고갯마루를 넘어 오솔길을 따라 면소재지(所在地)로 발을 옮겼다.
가급적이면 값비싼 자전거에 올라타 뽐내는 종구와 마주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콧날이 오뚝한 석란이를 멀리서라도 한번 볼 수 있을까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저런 생각에 젖어 따가운 땡볕 아래 푸른빛으로 잘 채색(彩色)된 산자락을 바라보며 오솔길을 내려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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