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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4 조회 : 2,312




당시 시대적 상황은 대내외적으로 지극히 혼란스럽기 그지없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바로 전세계 인류를 극한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제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 전쟁 발발의 원흉인 일본과 독일이 드디어 패망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은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치욕적인 통치로부터 벗어나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이 되었다.
삼십육년이란 결코 짧지않은 세월이였다.
일제의 식민지하에서 주권을 강탈 당하고 온갖 압박과 설음을 받으며 눈물겹게 살아 온 참으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민족이었다.
그러했기에 해방의 기쁨을 눈물겨운 감격으로 맞이하였다.
또한 그토록 목메이게 염원했던 자유와 주권을 되찾게 되어 저마다 해방된 기쁨에 마냥 들떠 있었다.
이제 새로이 펼쳐지는 앞날에 저마다 부푼 기대감을 잔뜩 지녔다.

허나 냉혹한 국제적 현실은 우리의 바람과는 전혀 달리 전개 되었다.
얄강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약소 민족으로써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엔 참으로 국력이 미약했다.
일제의 치하에서 겨우 벗어나는 알았는데 형실은 달랐다.국토의 허리 부분인 38선을 경계로 남쪽은 미군이 점령 하였다. 그리고 북쪽은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의 점령군이 진주하여 통치를 했다.
그 후 미국은 남한에 대하여 3년간 군정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에 공산국가를 건설하려 안간힘을 썼다.

그쯤 숱한 사람들이 각자의 사상과 이념에 따라 우익과 좌익으로 갈라져 국론이 격렬하게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국내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미군정의 미숙한 통치로 사회는 극도로 불안했다.
그 틈을 타 물가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다.
더불어 좁아터진 땅덩어리에 양분된 이념 논쟁으로 사회 분위기는 극도로 뒤숭숭하기만 했다.

그런 가운데 남한은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처음으로 실시된 선거에서 초대 국회의원들이 선출되었다.
그 후 1948년 8월 15일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간접선거로 선출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북한도 같은 해인 1948년 9월 9일 노동당이 주축이 되어 김일성을 앞세워 북한정권을 세웠다.

그런 우여곡절 속에 겨우 미군정에서 벗어나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하지만 극도로 불안했던 사회실정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혼미한 시대적 환경 속에 행정력 장악과 치안유지는 물론 국방력이 극도로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남한은 북한이 보유한 정예화된 전투 병력이나 무기와 물자 면에서도 많이 뒤쳐져 있었다.

반면 북한은 남침야욕에 불타오르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과 중국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소련제 T-34 신형탱크 242대와 수많은 야크기까지 지원을 받았다.
그로 인해 군사적인 면에서 우리 남한에 비해 월등한 화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 격동 속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고야 말았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북한공산군이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민족사에 큰 죄를 짖고 말았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38선 전 지역에 막강한 화력을 총동원하여 무자비한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 당시에 마의 무기로 불렸던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워 동시다발적인 불법남침을 감행한 이른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일컬어 그 시대에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6.25 사변’또는‘인공난리’라고도 했다.

전쟁 초반에 승기를 잡으려고 인민군들은 소련제 T-34 탱크를 앞세웠다.
그로 인해 열세를 면치 못한 우리 국군은 방어다운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뒤로 밀리고 말았다.

월등하게 뛰어난 화력으로 동두천을 점령한 놈들은 서울을 함락시키려고 의정부를 향해 총공격을 시도했다.

다음날 서울 상공에 소련제 야크 전투기가 처음으로 나타났다.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을 포격하고 용산역과 중앙청운 물론 경복궁까지 폭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어의없게도 우리 공군은 겨우 훈련기 정도를 보유하고 있어 그에 대항할 능력과 수단이 거의 없었다.

정부는 전쟁 발발 이틀 후인 6월 27일 새벽 1시에 중앙청에서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결과 정부의 모든 기능을 대전으로 이전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새벽 3시경에 주위 참모들의 건의로 이승만 대통령은 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한편 유엔은 6월 27일 긴급하게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북한을 불법 침략자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우리 한국을 돕기 위해 자유우방 국가 중 16개국이 참전하기로 결의했다.

이렇듯 긴박한 혼란 속에 6월 28일 새벽 1시경 북한군이 미아리 고개를 넘으려 하자 국방부는 한강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날 새벽 2시 30분을 기해 한강 다리를 폭파시켰다.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 속에 피란길을 나섰던 서울 시민 수백 명이 다리를 건너다 무고한 희생을 당하고 말았다.

이토록 참혹한 일이 적군도 아닌 아군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니 그 참담함이란 말로써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비통할 뿐이었다.

그리고 서울이 천인공노할 놈들에 의해 불과 3일 만에 여지없이 점령되고 말았다.

서울을 강점한 놈들은 서울의 서대문과 마포 그리고 영등포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천 명의 좌익수를 탈출시켰다.

그와 더불어 정부 고위 인사와 군 간부 또는 경찰공무원과 우익단체에 적극 가담한 인사들을 전원 색출하여 검거 구금하려 했다,
그렇게 숱한 사람들을 서슴없이 사살하였다.
그런데도 일부 지각없는 시민들은 인공기를 마구 흔들어 그들을 극렬하게 환영하며 맞이했다.
그보다 더 통탄할 일은 순진한 학생들이 그들의 선동에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 영향으로 인민군에 의용군으로 기꺼이 나서기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 북한군은 한강 철교를 보수하여 강을 건너 시흥을 점령하고 거침없이 남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그러자 1950년 7월5일 아침부터 내리는 비 속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부 정부 각료들과 함께 극비 속에 대전을 떠나 부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부산을 임시 수도로 발표하였다.

대전과 인접해 있는 충청권역 내의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전쟁의 위험이 코 앞에 닥쳐 극도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그런 소식들을 전해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정부에서 발표하는 대국민 방송을 라디오로 청취하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들메 마을은 지극히 빈약한 환경에 단 한 대의 라디오도 없었다.

시쳇말로 면소재지를 비롯한 여타 마을엔 전기라도 들어왔었다.
그런데 유독 우리 마을과 사는 형편이 비슷한 삼거리 부락만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면소재지 염씨네 점방에서 석유 기름을 구입해서 등잔불을 켜고 살았다.
그렇게 문명에 뒤쳐질 수밖에 없어 마을에는 단 한 대의 라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집이 없었다.

면내를 통틀어 라디오가 겨우 3대 밖에 없어 면사무소와 지서, 그리고 국민학교뿐이었다.
그나마 그 라디오도 일본이 패망한 뒤 남겨놓고 간 일제의 부산물이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면소재지에 볼일을 보러 나가는 경우, 면서기들과 지서에 근무하는 순경들의 입을 통해 당시의 정세를 귀동냥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어렴풋이 소문들을 듣고 온 마을 사람들은 동구 밖 느티나무 밑에나 연자방앗간 추녀 밑에 모여 앉았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헤쳐 나갈 궁색한 궁리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지루하리만큼 장맛비가 만만치 않게 내리는 오후 였다.
빗물이 거침새 없이 떨어지는 연자방앗간 추녀 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면소재지에 볼일이 많아 출타가 잦았던 동근이 아버지가 맨 먼저 말문을 열었다.

“기나저나 엊그제 쪼매 볼일이 있어서 면사무소에 들렀더니, 아 글씨 송서기가 허는 말이 음... 그기가 천안 밑이 워디라드라. 갑자기 말을 헐라니께 까먹어분졌는가 생각이 잘 안 나는구먼 그려. 그건 그렇타치구 아 글씨, 그 베락맞을 공산당 놈들이 그기까장 쳐내려왔다는구먼 그려. 그러니 이 일을 워쩠으면 쓰것는감?”

그러자 동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을 듣고 있던 방앗간 일 보는 경태 아저씨가 얼른 말을 이어받았다.

“성님, 혹시 거그가 조치원이라고 허지 않든감유? 천안 밑에 있는 디면 아마 내 생각이 맞을 건디. 암튼 좌우당간에 큰일이구먼유. 그기가 떨어져 번졌으믄 요기서 가참한 대전두 아슬아슬헌디 으짜면 좋을랑가 당췌 모르것네유.”

경태 아저씨가 조치원이라고 말을 하자 동근이 아버지가 반갑다는 듯이 순태 아저씨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말을 이어 받았다.

“아, 동상 말이 맞네 그려. 맞어, 그기가 조치원이라고 허던구먼. 동상 말마따나 그 냥반들 허는 말을 자상허니 들어 보니께 대전허구 아주 가차븐 모양이던구먼. 기나저나 내가 살다 살다 별넘에 희한헌 꼴을 다 보구 사는구먼 그려. 아 글씨, 비바람에 감꽃이 자고 나면 허망허게 떨어져번지는 꼴은 봤어두 일이 워찌 될랑가는 모르긋지만, 자구 나믄 워디가 떨어졌네. 또 하룻밤 자고 나믄 또 워디가 떨어졌네 혔싸니 워디 통 불안혀서 살긋는가? 다들 안 그려?”

그러자 두 사람의 주고받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으면서 궐연을 한 대 입에 물어 모지락스럽게 끝까지 빨아대던 기성이 형네 아버지가 땅바닥에다 담배꽁초를 비벼 끄면서 말문을 열었다.

“기나저나 그 공산당 빨갱이 놈덜은 같은 민족끼리 뭔 놈의 원수 척 졌다구 그리 무지막허게 총으루다가 쏴서 죽이고 비양기루 다 때려 부시구, 대포를 쾅쾅 쏴대가지구 잠잘 곳마저두 모지락스럽게 읍세버리구 말었으니,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네 그려. 기나저나 대통령인가 허는 양반은 대전 으딘가에 있긴 헌 모양인디 인자 일이 이러콤시로 되뿐졌으니 또 워디로 피난을 가야 쓰것구먼 그려. 그러니 나라 꼴이 으떻게 될라고 그러는지 참말로 한심허구먼.”

그러자 평소 동네일이라면 젊은 혈기만큼 누구보다 앞서는 정수 아저씨가 말을 이어 갔다.

“아, 그러게나 말입니다. 왜 아니래유. 지체 높으신 나랏님들이 으디루 가든지 으디루 숨어번지든지 그건 이녁들이 알아서 헐 문제구, 심없는 우리 같은 백성들은 으쩌야 될랑가 참말루 모르것네유. 그러니 인자는 살 길이라고 천 번 맨 번 생각을 혀봐도 놈들이 찾지 못헐 깊은 산속 으디라두 숨어번져 이놈의 전쟁이 끝나기만 바라면서 하늘만 맹칼읍시 쳐다봄서 기다리는 수밖이는 더 있긋어유 근디 으디루 막상 나서 볼라구 혀두 먼 넘에 날씨 헌질라 이로 콤시루 급살맞게 구는지 구질구질허게 비 한질라 내리는구먼유.”

그러자 늘 동네에서 약방의 감초처럼 나서길 좋아하는 방앗간 경태 아저씨가 무슨 할 말이 또 있는지 서둘러 말 사이에 끼어들었다.

“워차피 계룡산 산신령님헌티 물어봐두 답은 안 나올 꺼 뻔허구. 아까 경수 동상 말마따나 으디 짚은 산속짝에라두 들어가는 수밖이는 별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구먼. 그러니께 다 모든 긋이 천 만 번을 쳐죽어두 직성이 안 풀릴 인민군놈들 때문이 아니긋는감. 다덜 으짤란가는 모르것지만 나사 오늘밤이라두 으디 피난을 떠나분질라고 아침부텀 진작 맴에 담구 있었네 그려.”

그때였다. 방앗간 경태 아저씨의 말이 귀에 거슬렸는지 경태 아저씨보다 두 살 아래인 상수네 아버지가 경태 아저씨를 향해 일부러 들으라고 핀잔을 주는 듯하게 한마디 했다.

“참, 승님두 인정머리라구는 가물치 콧구녕 맨큼두 읍는 소릴 혔쌌고 그런다요. 아, 글씨. 성님만 살긋다구 먼저 내빼겠다는 거 아닌감유? 다들 이럴수록이 심을 합쳐서 으디를 가드라두 하냥 가야 되는 법이구 죽어두 같이 죽구 살어두 같이 살어야 허는 것이 인지상정인디 참말루 인제 보닌께 성님 속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구먼유. 암, 그렇게 허시유. 허기야 성님이사 한뉘 팔자에 뭐시가 걸구적그리것소. 내 말이 맞는 소리 아닌감유? 우덜이사 늙으신 부모를 모시고 그기다가 두 눈깔 맬뚱맬뚱 뜨고 쳐다보는 어린 새끼들까정 딸린지라 내 맴대루 허지두 못허구 이럴까 저럴까 갈팡질팡하는 우덜 입장보다야 훨 편헐 틴께 성님 생각대루 정 가려거들랑 뭐 구지 저녁 때까정 기달릴 일이 있긋소. 시방이라도 훌훌 털고 가쁜지믄 그만 아닌감유?”

그러자 방금 전에 한 말이 마음에 좀 걸렸는지 경태 아저씨가 겸연쩍은 모습으로 상두 아버지의 말이 끝내기 무섭게 바로 되받아치셨다.

“아따, 동상.내 말이 그러콤시롬 서운했당가? 내가 은제 혼자 살아보긋다고 혓는가? 나사 참말로 열 손가락에 장을 지지더라도, 난 절대 눈곱맨치라두 나 혼자 살긋다는 그런 맴은 읍네 그려. 물론 내가 허는 말을 믿을랑가 안 믿을랑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 일이지만서두, 내 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해를 해줬으면 쓰갔구먼 그려.”

마을 고샅길로 접어 드는 첫들머리 집에 사시는 진식이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동네 사람들 몇몇이 아무런 소득도 없이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조용히 듣고 계셨다.
진식이네 할아버지께서는 긴 장죽에 풍년초 가루 답배를 꾹꾹 눌러 담고 성냥불을 켜 대꼬바리에 불을 부치셨다.
그리고 양 볼이 쏙 들어가도록 깊숙하게 한 모금 빨고 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힘주어 말씀하셨다.

“내사 시방까장 자네덜 허는 소리 가만히 듣다 보니께 너나 따질 긋 읍시 죄다 답답허기는 매한가지구먼 그려. 그렇다구 우리가 은제까짱 이렇게 앉아서 그놈덜 이야기만 허고 있을 수는 읍지 않은가? 여하튼 별시럽게 생각을 혀봐두 그 처죽일놈들이 여기라구 안 쳐들어올 보장이 읍으니께 다들 으짜긋는가? 일단은 피허고 보는 것이 상책일 듯싶은디. 자네덜 생각이 으짤란가는 내사 모르긋네 그려.”

그러자 지금껏 내내 한 마디 말이 없던 동네 구장 일을 보시는 인식이 아버지가 진식이네 할아버지께서 방금 하신 말씀을 듣고 무척이나 걱정이 되시는지 그제야 입을 여셨다.

“아, 그기사 어르신님 말씀이 천부당만부당 다 맞는 말씀이지유. 그 처죽일 놈들이 우리 동네까정 안 쳐내려온다는 보장도 없으니께 어르신님 말씀따나 일단은 으디론가 떠나긴 혀야 될성싶은디 막상 으디루 피난을 갈려구혀두 그게 으디 읍내 장터에 가서 빨래비누 사오느거 매냥 그리 쉰 일이 아니더구만유, 다덜 잘 알구 있지만 서루 지 같은 경우에는 엄니헌질라 저러니 으디루 피난이라두 가자니 그러쿠 안 가자니 그렇네유. 그러니 으짰으면 좋으란가 참말루 모르긋구만유,”

처해진 당시의 상황이 그렇게 다급하였다.
그러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아무리 궁리를 해본 들 놈들의 침략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길은 요원키만 했다.
사정이 그쯤에 이르렀으니 그저 듣기에 허망할망정 속수무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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