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녘 서편에 아담하게 자릴잡고 있는 강경 읍내를 마을 사람들은 늘 '갱갱이'라고 불렀다. 강경 읍내에는 군산 항구를 출발한 작은 어선들이 금강 수로를 따라 들어오는 황산 나루터가 있었다. 지난 세월 속에 한때는 사람들이 꽤나 들끓어 성시를 이뤘다고 하지만 말이 나룻터지 그다지 활기롭지는 못했다. 어쩌다 새우젓을 실은 배가 들어오는 날에나 나루터에 사람들이 모일 정도였다. 간혹 팔십 여리 떨어진 군산에서 새우젓을 실고 들어 오는 황포돛대를 단 작은 어선들도 눈에 띄었다.
그런 작은 소도시 강경이 일제강제점령기에는 이북의 개성시 그리고 경북 대구의 약령시장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상권을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묻혀가고 있었다. 일제점령기에 지어 놓은 관공서 건축물 몇 채와 퇴색된 적산 가옥들이 읍내 군데군데에 초라하게 남아 있어 한 때나마 번창했던 그 시절을 증언하는 듯했다. 일제가 패망한 후 역사의 흐름 속에 강경 읍내는 작은 소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가을 김장철엔 젓갈시장으로 겨우 소도시의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어머니는 읍내 어물전 조씨댁에 가려고 다른 날에 비해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어머니께서는 조씨네 댁에 선물을하시려는지 매일 아침 닭둥우리에서 한 알 한 알 꺼내셔 대나무소쿠리에 모아 두었던 계란들을 볏짚으로 정성스레 묶으셨다. 서둘러 아침식사를 한 후 사립문을 나서려는데 꽤나 눈치 빠른 검둥이가 자꾸만 따라 나서려 했다. 몇 차례 성난 목소리로 집안으로 쫓은 후 어머니와 함께 들 주막으로 향했다. 한 여름 더위의 열기가 발밑에서 달아올라 한낮 더위가 만만치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산자락에 그 언제부터인지 오순도순 자리를 잡고 있는 잔솔나무들이 생동감 있게 보였다. 제멋대로 구부러진 밭둑을 지나려는데 시퍼렇게 자라난 콩잎들이 아랫도리를 싫지 않게 스쳐 부딪는 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다. 산비탈을 타고 내려오는 실개천에 유입된 물은 언제나 해맑게 보여 그라도 기분을 조금은 상쾌하게 해주었다. 징검다리 위를 지나 개울을 건너자 앞 들녘 논배미에선 풍년을 기약하듯 뜸부기 소리가 낭랑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드넓기만 한 논 자락은 온통 하얀 벼꽃을 피웠다. 벼 잎에는 메뚜기가 찰싹 들붙어 무게를 버티지 못하는 벼줄기가 가느다랗게 간당거리고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논 가운데에는 목을 길게 내민 하얀 두루미가 희끗희끗하게 보여 드넓은 들녘이 그리 평온하게만 보였다. 그와 더불어 중천을 향해 서서히 더딘 걸음을 하는 해가 하늘 아래 논산들녘 그 모두를 감싸 안아 생명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듯했다. 또한 무더운 날씨답게 더없이 맑은 광활한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몇 덩이 둥실 떠올라 모처럼만에 갖는 읍내 나들이를 축하해주는 것 같았다.
어머니께서는 행여 몸에 부딪혀 깨질 새라 아주 조심스럽게 계란 꾸러미를 손에 드시고 비좁은 논둑길을 나보다 몇 걸음 앞 섰다. 그 뒤를 따르는 나는 모처럼 나서는 읍내 외출에 마음이 잔뜩 설레였다. 개울을 건너 면소재지 입구 벼락바위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상민이 엄니 읍내 나가시는 감유? 지두 읍내루 나가는디.”
마을에 사시는 순아네 할아버지가 소달구지를 끌고 오시며 말을 건네셨다.
“네 그렇구만유. 상민이가 방학을 해서 콧바람이라두 쏘여 줄려구유. 허구헛날 빈집에 지 혼자만 놔두고 장사를 다녀서 맴이 많이 아프더구만유.” “암유. 그럴끼구먼유. 근데 어여 여기루 올라타세유. 상민이두 얼른 타구.”
어머니와 나는 울퉁불퉁한 길 위를 덜컹거리며 가고 있는 소달구지 위에 살며시 자리를 잡는다. 순아네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덜컹거리는 달구지 위에서 말씀을 계속 이으셨다.
“근디 앞뜰 논 서 마지기는 월매나 받고 팔았능감유? 잘 쳐서 받았는지 몰르것네 유.” “후하게 받지도 못했구먼유. 종구 아버지가 하두 재촉을 허길래 시세가 맘에 썩 들지는 못했어두, 넘네집에 갚아야할 빚이 꼽새짐으루 한짐이라 어쩔 수 없이 그냥 팔구 말었구만유.” “참, 사람팔자 시간문제라더니, 바루 동섭이를 두고 하는 말인갑소. 일본 놈 밑에서 머슴 살이 한게 바루 엊그제 같은디. 해방으루 일본 놈이 지어 먹던 논밭뙈기를 불하 받어 등 따숩구 배부르니께 하늘 높은 줄 모르구 까부는 꼴이라니. 어디 눈꼴 사나워서 보것던감유? 안 그래유?” “내사 자기네 줄 꺼 다 줬으닌께. 이제야 뭔 말을 할까마는 그저 입 다물고 이렇게 사는 것이 맴이 더 편하구만유.” “허긴 그럴꺼유. 그넘에 난리 때도 지 동생 그리 염병 지랄을 하구 이 동네 저 동네 미친개처럼 설치고 다니면서 애매한 사람들 좀 많이 괴롭혔남유, 에구 그 벌을 어찌 다 받고 살는지 …….” “다 지나간 일 아닌감유. 이제 와서 하늘을 원망하고 땅을 친들 죽은 사람이 눈 멀겋게 뜨구 다시 살어오남유. 다 팔자려니 생각 혀야지 어짜것시유.” “상민이 지 애비 묘등을 파가라고 했다는 말 듣고 어찌 사람의 탈을 쓰구 그럴 수가 있는가 했구만유. 내 원 참!” “암튼 고맙구만유. 죽은 지 애비를 그리 생각을 혀주시닌께.” “그래두 우짜것서유. 죽은 사람은 그렇다치고 산 자식 하나라도 보고 살으야지. 그래도 저놈이 공부는 잘하니께 아마 잘 될 꺼구만유. 글구 내가 단디 이르는 말인디. 상민이 너 엄니 한티 효자 노릇혀야 된다 알었지?” “네!”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덜컹거리는 소달구지가 주막에 닿을 무렵 멀리 등화동 산머리 위로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버스가 느릿하게 달려왔다.
“아저씨 잘 타고 와서 고맙구만유. 이따가 읍내 장터에서 다시 뵐께유.” “네, 어여 내리기나 하세유. 그럼 읍내서 봐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주막집 앞에서 나와 어머니는 달구지에서 내렸다. 달구지를 끌고 가는 누런 소는 한가롭게 꼬리를 양옆으로 흔들며 자갈들로 뒤덮인 비포장 길을 따라 읍내로 향했다.
조금 멀리 눈앞에 마주바라보이는 읍내는 언제나 변함없는 자태(姿態)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읍내 옥녀봉 느티나무와 그 아래 간장공장의 높다란 굴뚝이 보이고, 세월 흘러 색 바랜 사주거리 다리와 수문의 교각들이 보였다. 그중 붉은 벽돌로 지어진 상업고등학교의 건물과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팽나무 한 그루도 정겹게 도시의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군소재지인 논산과 강경을 하루에 서너 차례 왕복(往復)하는 시골버스는 언제나 정원을 초과하는 승객들로 늘 붐볐다. 심한 경우엔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차장 아저씨가 두 손으로 버스 문짝 안으로 승객들을 무자비하게 떠밀기도 했다. 그 많은 승객들이 버스 안 비좁은 틈새에 겨우 끼어 가는, 페인트 색깔이 누렇게 변해버린 구형버스였다.
마치 옹기시루 속에 빼곡하게 들어찬 콩나물처럼 버스 안은 승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람들의 열기로 차 안은 더위를 더욱 부채질하고, 그 혼탁한 공기 속에 등에 업힌 아기들은 달리던 차가 급정거라도 하면 놀래서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운전수 아저씨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리 싫지 않은지 가볍게 웃으시며 핸들을 잡고 계셨다. 어쩌다 운이 좋아 차창 가에 앉게 되면 버스 안의 혼탁한 공기를 피하려 창문을 열었다. 차창 밖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싶으면 반대편에서 차가 달려와 뿌연 흙먼지가 버스 안으로 몰아쳐 서둘러 차 창문을 닫고 말았다.
메마른 포도(鋪道) 위에 먼지기둥을 이루며 버스가 내달려 온지 삼십여 분이 지나자 읍내로 들어서는 사주거리 다리 위를 통과했다. 윤택하게 보이는 읍내의 표정에 나는 또 하나의 이질감을 느꼈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나의 앞날은 그런 이질감 속에 적절히 융화되어야만했다. 그 모두를 받아들여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지혜롭게 얻어야만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