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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51 조회 : 1,679




검정옻칠에 자게를 화려하게 수놓은 장롱(欌籠)이 부의 상징처럼 안방 아랫목에 자릴 잡고 있었다. 장롱 옆에는 발받침이 달린 재봉틀 한 대가 가지런하게 놓여 있었다.
그 조씨네 집도 맨손으로 그 숱한 고난을 거쳐 나름대로 자수성가를 했다고 언젠가 어머니께서 말씀해 주셨다.
이제는 읍내에서 신망을 얻어 유지 소리를 듣는 조씨 아저씨는 주변 사람들과 유대관계가 돈독하셨다.

그리고 지역 발전에 솔선수범하셔 기여하신 공이 컸던 탓으로 한쪽 벽 액자 안에는 표창장과 감사장이 보기 좋게 걸려 있었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새하얀 레이스가 소매 끝과 옷 가장자리에 달린 원피스를 입으신 아주머니가 한 쌍의 원앙(鴛鴦)을 곱게 수놓은 방석을 내밀며 자리를 권하셨다. 나는 부유한 그 집 분위기에 기죽어 부자연스럽게 자리를 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차 끓여 올게. 들메야 코오피 괜찮지?”
“응, 뭘 차는 무신 차냐? 그냥 쪼매 쉬었다 가면 되는디.”
“야, 그래두 모처럼 니 아들내미하구 같이 왔는디, 그럴 수 있냐 안 그러냐?”
“뭘! 우리가 무슨 대단한 손님이라구, 맨날 질리도록 얼굴 쳐다보구 살면서.”

수입이 개방되지 않은 그 무렵엔 커피가 그리도 귀했다. 미군 주둔지(駐屯地)나 대도시에 있는 속칭 ‘양키사장’에서 암암리에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런 탓에 그 가격도 꽤나 비싸 일반 가정에서는 엄두도 못 내는 기호식품이었다.

“들메야! 이거 ‘에무 제이 비’라는 미제 커피인디, 우리 동상이 지 매형 준다구 큰 맴 먹구 군산까장 가서 사온기여 함 맛이나 보랑께”
“뭘 이런 귀한 걸 타오냐! 그냥 찬물 한 그릇이면 되는디.”

어머니는 미안스러운지 아님 나처럼 조금은 기에 눌리신 듯 멋쩍은 모습으로 쟁반을 받아 방바닥에 내려놓으셨다.
둥그런 쟁반 위에 놓인 앙증스럽게 작은 꽃무늬의 찻잔이 그리도 예쁘게 보였다. 그날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그 쓰디쓴 커피를 맛보며 혼자 생각을 해 보았다.

‘뭣 땜시 이렇게 쓰디쓴 걸 마시나 참 이상두 하지, 날도 이리 더운디 이 뜨거운 걸 마셔야 부자행세를 하는감?’

지난봄 담임선생님 심부름으로 교장선생님 사택에 갔을 때 사모님이 손님들과 마시는 것을 한번 정도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석란이가 자기 집 자랑을 할 때 ‘커피 이야기’ 하는 것을 귀담아들은 기억이 났다.

바로 그때였다.

“엄마! 나 방학숙제 하러 희영이네 집에 갈게.”

같은 나이 또래의 단발머리 재숙이가 방을 슬그머니 들여다보며 말을 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보자 머리를 숙여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우메! 들메 아줌마 오셨구먼유, 안녕하시유?”
“응 재숙이구나? 참 많이 컸구나! 어쩜 저리두 이쁠꼬?”
“야, 이쁘기는 뭘 이쁘니? 얼마나 말을 안 듣는 줄 아냐? 그넘에 공부한답시고 한번 나가면 해 다 떨어져 어두워야 거우 집으로 들어오는디, 뭐!”
“아이, 엄마는 왜 그러는데? 내가 그리 보기 싫어? 손님들 앞에서 챙피하게끔.”
“그래, 이년아. 꼴에 챙피한 건 아냐? 그러니께 늦게까장 쏴 돌아댕기지 말구. 해 떨어지기 전에 언능 집으루 들어와서 방청소라두 허면 어디가 덧나냐구.저리 돌아댕기면서 놀라구만 허는디 참말루 내년에 시험에나 붙을련가 모르건네. 암튼 니 신세 니가 잘 알아서 혀.”
“엄마 나 간다.”
“그래 제발 일찍 들어와서 청소도 좀 하구 그래라.”

재숙이 어머니는 자기 자식이 그리 밉지 않으신지 가벼운 웃음을 띠우시며 말씀하셨다.

“애가 공부는 할려구는 하는디 기초가 모자란지 영 못 따라가는 것 같아서 큰일이네. 지 애비는 중학교 마치고 몇 해 지나 시집이나 보내면 그만이라구 허지만 …….”
“아니야, 여자두 이제는 배워야것더라. 우리 때 하고는 영 달라. 세상이 엄청스럽게 변해가는디 안 그러냐?”
“그러닌께 걱정이지. 누굴 닮아서 머리가 저런가? 지는 깜냥에 선생 노릇이라두 허구 싶은가? 사범학교에 간다구 허지만 내가 볼 때는 지 실력으로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어.”
“야, 그렇지두 않아. 우리 아들두 국민학교 2학년 때까장은 영 안 할라구 혀서 내가 을매나 애먹은 줄 아니? 그래두 때가 되닌께 다 허드라.”
“너야 뭐 걱정 없지. 니 아들은 우등생이라며? 넌 좋겠다. 아들 잘 두어서.”
“좋으면 뭐하니? 이 꼴로 사니 끝까장 잘 가르칠련지 걱정이 태산이다.”
“야, 그래두 넌 억척배기라서 잘할 꺼구먼 들메야! 정말 잘살어야 헌다 그 고생하구서.”

무엇인지 안쓰러운 듯이 재숙이 어머니가 어머니 얼굴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셨고 어머니의 눈언저리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야, 들메야 너 우냐? 참 멍청이 같이 울지 말어. 내가 공연한 소리를 했나보네.”
“아니야, 날 위하느라구 한 말인디 뭘.”

어머니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시고 애써 얼굴의 표정을 바꾸시며 말씀을 하셨다.

“들메야 우리 서루 피는 달라두 늘 친구처럼 같이 돕구 우애 있게 살자.”
“응 그래, 정말루 고맙다.”

두 분의 두터워지는 우정을 축복이라도 하듯 햇빛은 마루 위로 고개를 들이밀어 반질거리는 마룻바닥이 열기로 서서히 달아올랐다.

“참, 내 정신 좀 봐라 날이 이리 더운데 선풍기라도 틀어 줄 걸.”

재숙이 엄마가 옆방에서 투박스럽게 생긴 쇠붙이로 된 선풍기를 들고 왔다.

“들메야, 천천히 놀다가 점심 먹고 가. 내가 간 고등어하고 오이무침 맛있게 해줄게 먹고 가.”
“점심은 뭐. 모처럼 나왔는디 내 새끼랑 중국집에 가서 한 그릇씩 사 먹을라고 했는디.”
“그냥, 우리 집에서 허는 따슨 밥 먹구 가. 밀가루음식이 요기가 되니? 애두 한참 먹을 나인디, 좀 있다 바로 밥할 테니까 먹고 가.”

왠지 다정스러운 말씀에 서먹함이 점차 사라지고 작은 친근감이 다가오는 듯했다. 세상사 모든 만남의 시작이 그러하듯이 재숙이 어머니는 나에게 순순한 정이 그리 묻어나도록 정겹게 말씀하셨다.
그런 만남이 삶의 여정 속에 그분과 나 사이에 앞으로 얽혀질 가슴 아린 운명을 예고하는 서곡(序曲)임을 우리들 모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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