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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52 조회 : 1,565




“ 뎅뎅뎅뎅뎅뎅뎅뎅뎅뎅뎅뎅!”

한동안 거침새 없이 들려오는 금속성(金屬聲)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을 모아 바라보았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거의 닿을 듯이 겹쳐 오전 열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 읍내로 나오느라 아침밥을 적게 먹은 탓인지 조금은 배가 고팠다.

부엌에선 두 분이 점심 준비를 하고 계셨다. 비릿하며 감칠맛 도는 간 고등어를 굽는 냄새와 오이무침의 참기름 냄새가 허기(虛飢)를 더욱 재촉했다.

“들메야! 기나저나 으짠다냐? 논을 팔었으니 앞으루가 큰 문제구나. 에구 그냥 서로 돕구 살면 될 건데 동섭이 양반은 무신 웬수 척졌다구 그 안달을 부리는지.”
“차라리 잘됐지. 뭐 언제 갚어두 갚을 건디 속 시원허게 됐지, 뭐! 정말 빚지구는 못살것더라.”
“그래두 그나마 논배미라두 있어서 겨울양식 걱정은 덜고 살었을 텐디. 그나마 없어졌으니 저 이린 거 허구 으짠다냐?”
“그러니 어쩌겄니?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것냐? 뭐. 정 안되면 우리 두 식구 니가 좀 먹여 살려라.”

어머니께서는 찌든 가난의 번민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고 싶어 웃는 웃음인지 아니면 재숙이 어머니의 다정하신 말에 조금이나마 안위(安慰)를 찾으시려는지 허탈하게 웃으셨다. 그러자 재숙이 어머니도 덩달아 크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그랴! 정 안되면 읍내로 나와 채운산 밑 분둑골에 삯월셋방 한 칸 얻구 차라리 맘 편히 살어. 그넘에 동네 뭐 볼 것 있다구 그 오진 꼴 다 당하구 붙어 살라구 허냐?”
“암튼 고맙다. 함 생각해 볼게.”
“그래도 옛날에는 니네 집 눈치나 보면서 살던 것들이 조상들이 돌봤는지? 일본 놈 순사가 짓던 논밭뙈기 거저줍다시피 혀서 배부르게 먹구 살만 허닌께 지랄병을 떠는 꼴이라니 에휴.”
“그 사람네들 탓하지마! 다 이넘에 세상 탓해야지, 안 그랴?”
“맞어, 왜 아니랴! 그래두 니네 아들내미 하나 보구서 꾹 참고 살어봐. 난중에 잘살게 되는 날엔 언제 그랬냐 하구 보라는 듯이 기 피고 살면 되는 거지 뭐.”
“글쎄 그리만 된다면 을매나 좋겠냐? 언제 다 키우니 저 어린 걸.”
“뭘 다 컸구먼. 너 닮았는지 곱살한 것이 크면 기집애 꽤나 딸것더라.”
“너 무슨 악담을 그리하니?”
“악담은 무신 악담이니? 잘생겼다구 하는데, 야! 우리 사위 삼을까?”
“야 너 미쳤니?”
“미치긴 내가 왜 미쳐. 야 우리 딸두 생긴건 그래두 사방간디서 서로 달라구 난리들이다.”

두 분의 진솔(眞率)함이 배어나는 웃음소리가 온 집안에 가득 찼다. 재숙이 어머니께서 나를 ‘사위 삼는다.’ 는 말에 얼굴이 달아올라 한없이 부끄럽기만 했다.

“모처럼 만에 왔는디 건건이두 마땅치 않구 어쩐다냐? 어여 천천히 많이 먹어라.”
“네, 잘 먹을께유.”

검정옻칠이 잘된 밥상 위에 수없이 많은 반찬이 담긴 그릇들을 보고 초라한 내 자신의 모습을 실감하며 다짐했다.

‘언젠가는 나도 내 사랑하는 어머니와 함께 꼭 이렇게 살리라!’

더 쉬어 가라는 재숙이 어머니의 말씀을 뒤로 하고 어머니와 나는 재숙이네 집을 나섰다. 찌는 햇볕은 두 모자의 머리 위를 그리도 모질게 내려쪼여 여름 더위를 재촉했다.

“상민아, 아줌니 좋냐?”
“응 근디 왜? 그런 말은 한뎌 사람 챙피허게시리 ”
“무슨 말을?”
“뭐, 자기네 사위를 삼는다구! 증말루 말은 못허구 챙피해서 죽을 뻔했어.”
“음, 그건 니가 공부를 잘해서 이뿌다구 한 말이여!”
“그래!”
“응, 그러니까 더 열심히 공부해서 내년에 중학교에 꼭 합격혀야 헌다. 에미는 너 하나만 믿고 사닌께.”
“알었어 약속할게.”

그리 말하는 내가 그도 사랑스러웠던지 골목길에서 어머니는 주위를 개의치 않으시고 나를 부둥켜안고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상민아, 에미가 뭐 사 줄까? 말혀! 오늘은 내가 다 사 줄 틴께.”
“정말? 와 신난다. 음 물안경하구 아이스깨끼랑 …….”
“너, 물안경 사 주면 공부는 안하구 하루 종일 물가에 가서 살려구?”
“아녀! 방학숙제 절대루 안 밀리구 할 거야 내가 언제 방학 숙제 밀리는 거 봤는감?”
“그럼 약속했다!”
“응 약속해!”

항상 어머니와 중요한 약속을 할 때마다 늘 버릇처럼 새끼손가락을 걸려고 했다. 그런 내 모습이 그리 귀여우신지 어머니가 다시 내 손을 꼭 쥐시고 잠시 동안 놓으려 않으셨다.
그리고 티끌 하나 없는 어머니의 정에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따뜻하고 가슴 벅차오르는 희열(喜悅)을 느꼈다.

한낮 더위에 지친 듯 혀를 잔뜩 내밀어 가쁘게 숨을 내쉬며 누렁이 한 마리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섰다.
면소재지에 있는 강씨네 점방은 비교가 안될 만큼 더 큰 가게에서 물안경을 사주셨다. 그리고 얼마쯤 걸어 조금은 시끄러운 시장 골목길을 지났다.
대나무로 높이 세워놓은 깃발의 붉은 천에 하얀색의 한자로 빙(氷)자가 보이는 기계소리에 귀가 따가운 얼음과자 집으로 들어갔다.
“덜커덩 덜커덩”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의 소음이 귀에 거슬릴 정도로 커다랗게 들려왔다
“보세유! 여기 우유로 맨들은 캔디 두 개허구 아이스깨끼 다섯 개 주세유.”

하얗고 차가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빙과가 네모진 대나무 그릇에 담겨 나왔다. 그중에서 우윳빛의 캔디가 더욱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어여 천천히 많이 먹어라. 옷에 안 묻게 질질 흘리지 말구 조심혀서 먹어.”

모두를 잃어버린 채 쉽사리 떠날 수도 없는 고향이기에 엉거주춤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머니와 나였다. 그동안 가슴 한구석에 모질게 자리를 한 아픔들을 잠시라도 잊고자 함께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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