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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54 조회 : 1,726




어제처럼 아침 해는 동쪽 산마루에 떠올라 내 작은 초가 집 지붕 위에 다정스럽게 다가섰다. 어제 어머니께서 사주신 물안경을 동네 아이들에게 맘껏 자랑하고 싶었다.
한여름 뙤약볕에 얼굴과 가느다란 두 팔은 물론 두 종아리까지 온통 검게 그을렸다. 두 어깨와 등짝엔 드문드문 허여스름하게 허물이 벗겨졌다. 그 때엔 사내 아이들의 빡빡 깎은 머리 군데군데에 허옇게 기계총(두부백선)의 부스럼이 그리도 많이 났었다. 그리고 아랫도리엔 검정 염색물이 살에 거무스름하게 묻어나는 운동 팬티를 입었다. 윗도리는 닳아 구멍들이 자잘하게 난 색 바랜 메리야스를 축 늘여 입었다.

동네 아이들이 동구 밖 개울가에 모여 홀딱 벗은 알몸에 한 손으로 코를 꼭 쥐고 ‘풍덩 풍덩 풍덩’ 소리를 연달아 내며 성급하게 냇물에 뛰어들었다. 뒤늦게 도착한 나도 귓구멍을 클로버 꽃망울로 틀어막고 물로 뛰어들어 맑게 흐르는 개울 밑바닥을 짯짯이 들여다보았다.
개울 밑바닥에서 하늘대는 물마름들이 엎드려 헤엄치는 뱃살에 닿아 간지러웠다.
개구리처럼 두 다리 뻗어 가쁘게 흔들며 물속 깊은 곳에 웅크린 바윗돌 밑으로 다가섰다. 밀폐된 물안경 속의 작은 공간 밖으로 바라보이는 개울물속은 조금은 어두워 흐리게 보였다.
비좁은 돌 틈사이로 팔을 넣으려 어깨에 힘을 주어 들이민다. 껄끄러운 촉감을 손으로 느껴 이내 힘을 주어 끌어 잡아당겼다.

손바닥 크기의 집게발에 털이 무성하게 난 참게 한 마리를 잔뜩 움켜쥐었다. 그리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물위로 떠올랐다. 마치 승전보(勝戰譜)를 알리듯 동네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야들아, 오늘은 내가 팔뚝만한 메기 잡을 틴께 봐라.”

햇볕에 뜨겁게 달구어진 함석 물동이 안에 참게를 넣었다. 그리고 가슴을 펴 호흡을 가누려 하늘을 바라보았다. 거센 햇빛에 눈이 시려 코끝이 간지러웠다.
재치기를 시원하게 한번 하고 나서 큰 돌들이 많이 놓인 곳으로 헤엄쳐 다가섰다.

구름 한 점 없이 드높은 맑은 여름 하늘 아래 푸른 들녘의 벼들은 싱그럽게 자라났다. 면소재지 지서의 사이렌이 정오를 알리는 듯 우렁차게 온 들녘에 울려 퍼졌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엔 황소가 졸리는 듯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모습이 그도 여유롭게 보였다. 키 큰 포플러나무에선 매미들이 합창이나 하듯이 앞 다투어 소리를 내어질렀다.

빈손으로 물 밖으로 나온 내 두 눈에 검정색 지프차 한 대가 철길 건널목을 건너고 있었다.
그리고 벼랑바위 앞을 지나 마을을 향해 좁다란 길 위에 흙먼지를 자욱하게 일으키며 달려온다. 지프차를 발견한 동네 아이들은 무척이나 신기한 듯 고무신 신발짝을 양손에 거머쥐고 마을로 달려오는 차를 향해 뛰어갔다.
무엇이 그리도 좋은지 아이들은 저마다 손에 든 고무신을 흔들며 차 앞으로 달려갔고 나도 놓칠 새라 그 뒤를 따라 같이 뛰어갔다.

네모난 검정 지프차는 동네 아이들의 티 없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클랙슨(klaxon) 소리를 한번 울려주었다. 아마도 꾸밈없이 사는 동심의 순박한 모습에 대한 답이었으리라.
자욱한 흙먼지 속을 달려온 차가 동구 밖 느티나무 앞에 멈춰 선다. 차에서 내린 아저씨가 둥구나무 밑에서 동네 어른들과 무슨 말인가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차를 타고 온 사람들은 경찰서 정보과에서 나온 형사들이었다.
시국이 하도 혼란스럽던 때라 대전 교도소에 있는 종구네 삼촌 일로 혹여 또 다른 불온 세력들과 연계를 하는가 싶어 조사를 하러 마을에 온 것이었다.
휴전으로 전란(戰亂)이 멈추기는 하였으나 어수선한 시국의 흐름을 틈타 암약하려는 불순세력을 적발하여 검거하려는 목적이었다. 마을에 사상적으로 그런 사람이 있으면 심심찮게 조사를 나오는 그런 격동(激動)의 시기였다.

“동근아, 그 사람들이 뭐시라구 허든디?”
“응, 종구 아버지 집에 있냐구 묻더라구.”
“왜?”
“아이구, 상민이 성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어. 그걸 알면 귀신이게?”

종구네 집으로 검정 지프차가 가는 이유를 알 길 없는 나는 무척이나 궁금했다. 더욱 궁금했던 이유는 상대가 바로 종구네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들보다 앞서 고샅길로 들어간 차를 뒤따르려고 걸음을 재촉했다. 고무신 안에 물기가 마르지 않아 걸음을 걸을 때마다 신발바닥과 발바닥이 서로 맞닿아 미끄러지는 소리가 ‘삑삑’ 하며 들려왔다.
신발에서 나는 그 소리가 마치! 보리밥을 잔뜩 먹고 소화가 덜되어 걷잡을 수 없이 방정맞게 터져 나오는 방귀소리처럼 들렸다.
낯선 손님들의 방문에 잔뜩 호기심이 생겨 검정 지프차의 뒤를 따라가 종구네 집 담 너머로 마당 안을 바라보았다. 귀한 손님들을 맞아들이는 양 그리도 거만스럽던 종구 아버지가 마당 안으로 내려와 땅에 닿도록 허리 굽혀 인사를 했다.
지금껏 종구네 아버지가 그토록 허릴 굽혀 인사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더불어 우직하고 미련스럽게 생긴 힘 좋은 머슴 용만이도 머리를 굽실거렸다.
그분들 중에는 지서주임이신 석란이 아버지 모습도 보였다.

낯선 손님들이 반갑지 않은지 멋모르는 거위는 ‘꺼억꺼억’ 볼품사납게 울어댔다. 모양새 좋게 기와를 올려놓은 담장 위에 큼직한 호박 한 덩이가 잘 익어가고 그런 모습이 가진 자의 오만처럼 내 두 눈엔 그토록 얄밉게만 보였다.
그리도 복잡하기만한 우리네 삶을 티끌 하나 없이 훤히 들여다보려는 듯 청청한 하늘은 더없이 맑기만 했다.
그 하늘에 작은 꿈을 펼치려 하는 우리들의 마음처럼 뭉게구름이 높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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