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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55 조회 : 1,722




뒤뜰 돌배나무 잎사귀에 몸을 숨긴 매미가 귀청이 떨어져라 요란스레 울어댔다. 그리고 꼬리 끝 빨간 고추잠자리들은 텅 빈 마당을 독차지 하려는 양 여유롭게 맴돌았다.
해말끔하게 갠 하늘엔 온갖 형태의 크고 작은 구름들이 각기 다른 무늬를 이루어 놓고 있었다. 산릉선엔 하얀 뭉게구름 한 덩이가 솜털보다 더 보드랍게 피어올라 손으로 꼭 쥐어 보고 싶은 충동감을 불러일으켰다.

여름 더위 힘에 겨운 듯 담장 너머 해바라기가 목을 가볍게 숙이고 있었다. 며칠을 두고 비가 오다 멈추기를 지루하도록 반복하던 늦장마가 이제서야 겨우 끝나는 것 같았다. 사정없이 내리쪼이는 뙤약볕에 땅은 열기로 가득 달아올라 이따금 부는 바람에 흙먼지가 가득 일었다.
여느 날처럼 어머니가 장사를 나가시면 혼자서 집을 지키며 밀린 방학 숙제를 했다. 방학 숙제 중에서 주변에 곤충들이 너무 많아 구하기 쉬운 탓도 있었지만 곤충채집이 제일 쉬웠다.
그러나 미술 부분 그리기에 자신이 없었다. 그런 탓에 제일 힘든 것이 우리나라 지도를 큰 모조지(模造紙) 전지에 커다랗게 그려 색칠을 하는 것이었다.

활짝 열린 방문 밖으로 앞 들녘이 시원스럽게 훤히 내다보였다. 귀분이 어머니가 고추밭에서 길쯤길쯤하게 자란 붉은 고추를 골라 따시고 동근이 아버지는 참외밭고랑을 두루두루 살피고 계셨다.
그런 정성 탓인지 원두막 참외밭을 지날 때 잘 익은 참외의 향긋한 내음이 코끝에 와 닿았다.

아직은 때가 좀 이른 듯 마을 앞 개울가엔 물장구를 치러 나온 동네 아이들이 겨우 두어 명 밖에 보이지 않았다. 덩그렁 비어 있는 냇둑엔 종구네 황소가 홀로 풀을 뜯고 있었다.
그리고 읍내에 볼일이 있어 가시려는지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꽃무늬 양산을 받쳐 들고 면소재지로 걸어가는 모습이 조금은 먼 듯 보였다. 조금 더 먼발치엔 읍내로 이어진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차량 한두 대가 부연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뜨겁게 퍼져나는 햇살에 가로수들이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철로 건널목 너머엔 우뚝 솟아 있는 교회 십자가와 종탑이 한데 어우러져 곱살한 풍경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교회에서는 여름성경학교를 한다고 온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석란이와 옥순이 그리고 종구도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하지만 나는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 길에서 교회 선생님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일부러 발걸음을 서둘러 산모퉁이로 피했다. 그 이유는 생활형편이 부유한 그들에 대한 이질감 내지는 열등의식에서 오는 소외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종구에 대한 적개심(敵愾心)이 나로 하여금 교회로부터 발길을 돌리게 했다.

언젠가 우연히 교회에 한번 갔을 때 하얀 모시옷을 곱게 차려입은 나이가 지긋하신 여자 전도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시며 평등하게 대하신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는 잘 모르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중에서 종구네 아버지는 가장 나쁜 사람으로 각인(刻印)이 되었다.
아마도 지난번 종구네와의 일이 가장 큰 요인인 것 같았다. 우리 두 식구의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던 논 서마지기를 잃어버린 것과 척박한 산비탈 한구석에 묻힌 아버지의 묘를 파가라는 그 말에 더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런 복잡스런 속내를 모르는 듯 매미는 한낮 더위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더욱 크게 목청을 돋우어 조금은 밉살맞게 느껴졌다.
달아오르는 더위를 식히려고 누구 하나 볼 사람이 없어 마음 놓고 웃통을 훌쩍 벗었다. 그리고 갈대로 엮어 만든 갈 자리가 깔린 방바닥에 엎드려 방학 숙제를 했다. 한동안 방바닥에 엎드려 공부를 하다 보니 뱃가죽에 벌겋게 갈 자리 자국이 났다.

조금 멀리 지서에서 하루에 한번 정오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무렵에 때를 맞춰 마을 앞을 지나는 증기기관차가 기적 소리를 우렁차게 울리며 달려오고 있었다.
그 당시 들메마을에 살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그랬었다. 기차를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기적소리만 들으면 기차가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 또 그 차가 어느 곳으로 향하는지, 어디쯤 오고 있는지 시간이 얼마큼 되었는지를 어림짐작으로 알 수 있었다.

기적소리로 보아 아마도 화산리 첫들머리 건널목을 지나고 있는 듯했다. 그런 생각이 채 가시기도 전 기차는 검은 연기를 하늘 위로 힘껏 내뿜으며 동구 밖을 세차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기차가 마을 앞을 지나는 것으로 보아 벌써 점심때가 된 듯했다. 밭에서 일하시던 귀분이 엄마와 동근이 아버지가 점심식사를 하러 가셨는지 보이질 않았다. 그저 흰 구름 한 덩이가 텅 빈 밭 자락을 혼자서 지키려는지 원두막 지붕 위에 머물고 있었다.

더위 탓인지 입맛이 없어 점심도 먹지 않았다. 더위도 식히고 물고기도 잡을 겸 개울가에 가고 싶어 과제물을 방 한구석에 밀쳐놓았다. 그리고 양철통과 물안경을 챙겨 들고 사립짝을 나섰다.
동네 입구 첫들머리 기현이네 텃밭에는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열무를 솎아내고 있었다.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동네 개구쟁이들이 몰려와 장난 삼아군데군데 목을 분질러 놓은 단수숫대를 바라보시며 속상하신지 말씀하셨다.

“아무리 철딱서니 없는 것들이라구 혀두 그렇지, 어지간히 극성맞게 말썽을 부려야 살지, 참말루 못견디것네 그려. 아 글쌔 가만히 서있는 단수숫대가 뭘 달라구 허든감? 무신 원수 척젔다구 모갱이를 죄다 분지러 트리구 난리를 처 놓았으니 이걸 으째면 좋다냐?”

기현이 할아버지의 푸념 섞인 말소리에 괜스레 신경이 쓰였다. 보기 좋게 줄을 이뤄 서 있는 단수숫대는 익어갈수록 점점 머리를 숙이는 수숫대와는 달리 하늘 향해 곧게 뻗쳐올랐다.
산들바람에 알맞을 만큼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니 대여섯 해 전 아랫동네에 살았을 때 있었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등 푸른 줄기에 길쯤길쯤하게 붙어 있는 이파리에 핏물이 묻은 것처럼 불그레해지면, 동네 할머니들이 어린 우리들에게 늘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었다.
단수숫대 이파리에 붉은빛이 도는 것은 아주 옛날 옛적 깊은 산속에 사는 호랑이가 달달한 단수수가 먹고 싶어 한밤중에 들녘으로 슬금슬금 내려와 주인 몰래 꺾어 먹다 날카로운 대궁에 궁둥이를 찔려 벌겋게 된 것이라고 하셨다.
그때 나이 겨우 여덟 살.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그런 말이 턱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그리도 능청스레 거짓말로 말씀하시는 할머니들의 깊은 속셈은 따로 있었다. 먹을거리가 별로 없어 동네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리도 서리를 심하게 했다.

늦봄에는 오글오글 하면서도 씹을수록 고소한 보리 서리를 했다. 초여름엔 빨갛게 익은 앵두를 잎사귀 채 몇 움큼 훑어 정신없이 고샅길을 따라 도망을 쳤다. 동네 어귀 거북바위에 숨어 고막이 욱신거리도록 할딱할딱 차오르는 숨을 억지로 가누려 애를 썼다. 그리고 아랫주머니에 잔뜩 밀어 넣었던 앵두를 입 안에 넣고 씹어 씨를 뱉으며 먹으면 달달하면서도 뒷맛이 시크름한 앵두 맛이 그리 좋았다.
또한 뙤약볕이 등껍질을 사정없이 벗기려 달려드는 여름엔 남에 집 밭에서 몰래 캐온 감자를 보릿짚 불에 눈물이 나도록 입으로 불어 구웠다. 감자 등껍질이 쫙쫙 갈라져 거무튀튀하게 익어 가면 무엇이 그리 급했는지 자발스럽게 얼른 감자를 꺼냈다. 갓 꺼낸 감자가 그리 뜨거워 방정맞게 두 손을 바꿔가며 후후 불어 한 입 덜컹 베어 물고 깨물면 입천장이 데어 벗어질 듯 뜨거웠다. 그래도 퍼석퍼석하면서 구수한 그 맛은 그렇게라도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동네 형과 누나들 시집 장가갈 때 두툼하게 이불솜을 하려고 심어놓은 목화밭에서 목화 서리까지 했다. 가을철엔 고구마와 땡글땡글하게 영근 콩 서리를 했다.
그와 더불어 냇둑 무밭에서 밭주인 몰래 무를 뽑아 먹고 난 후 한차례 트림이라도 걸쭉하게 하면 코가 ‘싸’ 해지고 목구멍으로 차고 올라오는 구린내에 진저리가 났다.

그리고 우리들 보다 네댓 살 터울인 동네 형들은 더욱 짓궂게 놀았다. 가느스름한 초승달이 구름에 몸을 숨기고 논배미에서 개구리들이 ‘짜그락 짜그락’ 요란스레 울어대어 온 주위가 칠흑 같이 어둑해지면 의기양양하게 참외서리를 나섰다.
참외밭을 지키시던 밭주인이 사르르 졸음이 오는 듯 모기장 안으로 들어가면 밭두둑 아래 숨어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개구쟁이 동네 형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윗도리와 고무신을 풀숲에 감춰 놓고 검정 광목 팬티 하나만 걸진 채 우묵 파인 밭고랑에 납작 엎디어 참외와 수박 서리를 했다.

그렇게 할머니들이 틈만 나면 하시는 말씀의 본질은 따로 있었다. 그리 짓궂게 놀던 우리들에게 일 년 내 죽도록 땀 흘려 농사지어 놓은 남에 밭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라는 은유적인 가르치심이었다.
한마을에 얼굴 맞대고 사는지라 내 피붙이나 남에 피붙이나 귀엽기는 매한가지였다. 눈에 쏙 넣고 싶을 정도로 귀엽기만 한 어린 손자들이 행여! 단수숫대에 손이라도 베일까 싶어 조심하라는 뜻인 것도 같았다.

아무튼 단수수 이파리에 붉은 빛이 돌 무렵부터 단수수의 단맛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겁 없이 억센 대궁을 맨손으로 꺾으려다 그만 날카로운 껍질에 엄지손가락이 예리한 칼날에 베인 것처럼 상처를 입었다. 손끝이 아리고 쓰려 땅 위에 그만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아려 오는 아픔을 억눌러 참았다. 그런 고통을 당한 뒤로는 무척이나 조심을 했다.

앞마당엔 고추잠자리 예닐곱 마리의 날개가 쨍쨍 내리쪼이는 여름 햇살에 잘 반사되어 꼬리 끝이 더욱 빨갛게 보였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가볍게 흔들리는 단숫숫대 머리끝에 내려앉았다 떨어지기를 싱겁게 몇 차례씩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높기만 한 하늘 향해 기다랗게 목을 빼어 내민 단수숫대 언저리를 여기가 좋을까 아님 저기가 좋을까 자리를 골라잡으려고 뜸을 들이는 것 같았다. 한동안 주위를 그리도 부산스레 맴돌아 가뜩이나 따끔거리는 여름을 지루하게 했다.

연초록빛 푸른 밤송이들이 나뭇잎 사이로 몸 숨겨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밤나무 그늘 밑엔 알맞은 크기의 평상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앞산에서 베어 온 소나무를 정성껏 깎아 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엔 대나무를 납작납작하게 쪼개어 가지런하게 엮어 만든 평상에 걸터앉았다.
부엌칼로 토막 낸 단수숫대 가운데 토막 껍질을 벗겨 깨물면 달달한 단물이 입 안에 가득 배어나와 포만감에 젖어들었다.
나도 모르게 나른해져 스르르 낮잠이 오려고 하여 슬그머니 평상에 누워 녹아내릴 것만 같은 새파랗게 맑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잠시 동안 그리 있다 보면 방금 전에 맛보았던 단수숫대의 단맛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단수숫대 한 토막을 성큼 손에 들고 조심성 없이 입으로 껍질을 벗기다 입술이 따끔거려 손으로 훑어보니 붉은 피가 번져났다. 화가 잔뜩 나서 ‘에이씨’ 하면서 입에 물었던 단수숫대 속살을 얼른 내뱉어 낮은 싸리 울타리 너머로 힘껏 집어던졌다.

어쩜 재수가 없으려고 그랬던 것 같았다. 하필이면 동네 연자방앗간 앞마당에 놀러가려고 고샅길이 좁다고 굴렁쇠를 한참 신나게 굴리며 달려오던 덕칠이형 몸에 맞고 말았다.
주걱턱에 양쪽 눈두덩이 두꺼비 모양 두툼하게 툭 튀어나와 우락부락하게 생긴 형이었다. 돌배나무 집 덕칠이형이 얼굴을 울근불근하며 화가 잔뜩 달아올라 나를 금방이라도 한 대 세게 내려칠 듯이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야, 임마! 내가 니네 집 마룽 밑에다 키우는 강아지냐? 실컨 씹어 먹던 단수숫대 찌꺽지를 나헌티 던져버리게.”

덕칠이형이 내어지르는 큰소리에 졸리던 잠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고양이 앞에 생쥐 모양 아무 소리도 못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데 덕칠이형이 분이 덜 풀렸는지 어깨를 들먹이며 씩씩거렸다. 그리고 주먹을 화가 치솟는 만큼 잔뜩 거머쥐고 위협적으로 내보이며 험하게 말을 했다.

“너 시방 니네 집이라 가만두는디 이따가 방앗간 앞마당에서 만나기만 혀봐라. 참말루 내가 그냥 안 놔둘 틴께 그리 알어.”

땡볕에 얼마나 굴리고 다녔는지 질이 잘나 은빛으로 번쩍번쩍하는 굴렁쇠를 몰고 사립짝을 빠져나갔다. 어린 마음에 덕칠이형에게 당할 뒤탈이 두려워 그때부터 가슴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단수숫대 맛이 어디로 달아나버렸는지 금방 잊어버리고 풀이 죽어 평상 모퉁이에 앉아 있었다.

그때 동네에 마실 가셨던 어머니가 사립짝 안으로 들어오시며 말씀을 하셨다.

“야! 내가 시방 고샅길루 걸어오다 보닌께 그 뭐시냐. 돌배나뭇 집 사는 득칠이란 놈이 우리 집 삽짝 밖으루 나오던디. 무신 일루다가 왔다 간다냐? 뭔 일이 있기는 있는 기여, 행여 이놈의 자식 싸강머리 읍시 이번에 내 새끼 털끝이라두 건드리기만 혀봐라 내가 가만히 내번져 두는가?”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을 하셔도 아직은 맞설 힘이 없었기에 덕칠이형이 더 무서웠다. 겁에 잔뜩 질린 나는 입 밖으로 무엇이라 단 한 마디 말도 못했다. 그저 까만 눈망울로 파란 하늘에 나처럼 멍하니 떠 있는 구름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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