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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57 조회 : 2,015




앞마당 두엄 가엔 맨드라미가 붉은 볼 살을 도톰하게 양껏 돋우고 있었다. 싸리울 밑에는 키 작은 채송화가 납작납작 곱게 피어났다. 뒤따라 시샘하듯 봉숭아가 빨간 꽃망울을 맘껏 터트렸다.
싸리나무로 엮어 놓은 울타리엔 담홍색 능소화가 참한 모습으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중반으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임시소집일이라 학교에 가는데 철길 건널목에서 옥순이를 만났다. 줄기와 잎사귀에 온통 흰 눈이 내린 것처럼 보이는 설악초(雪嶽草)가 드문드문 피어 있는 냇둑 길을 옥순이와 사이좋게 걸어가고 있었다.

“야, 상민아! 너두 알지?”
“뭘?”
“어젯밤 동네가 시끄럽게 온통 난리가 났었는디. 증말루 모르는가 보네?”
“왜? 뭔 일 있었냐? 나는 세상 모르구 자느라 아무것두 몰랐는디.”
“어제 밤중에 종구네 엄니가 아퍼서 소달구지 타구 읍내 의원으로 실려 갔어.”
“왜?”
“나두 자상허게는 모르것는디, 우리 엄니가 그러더라, 종구네 엄니가 갑자기 아랫배가 아프다구 때굴때굴 뒹굴어서 의원으로 실려갔다구.”
“그래서?”
“음, 그 뒤는 나도 몰라. 읍내 병원에 갔다는 것만 알구.”

그다음 일은 옥순이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상대가 종구 엄마라는 말에 옥순이에게 한 번 더 물었다. 그런 내 모습이 조금은 의아스러운지 옥순이가 말을 이었다.

“상민아, 니가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디? 니네 집하고 사이가 별로 안 좋으면서 그러냐?”
“음, 그냥!”

그 뒷일들이 그리도 궁금하였는데 더는 모른다는 옥순이 말이 마냥 아쉽기만 했다.
그 당시 읍내로 가는 교통수단은 열차와 버스가 전부였다. 작은 간이역이라 열차가 아침저녁으로 겨우 서너 번 짧게 서고 그 외에는 열차가 멈추질 않았다. 버스도 저녁 해질 무렵까지만 막차를 운행했다.
그래서 막차가 끊긴 후에는 자전거나 우마차, 그것도 형편이 안 되면 십여 리 길을 걸어서 다녀야 했다. 그리고 유일하게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면소재지에 있는 약국도 아닌 약방이 전부였다.
어쩌다 배가 아프면 활명수나 사러 가고 논밭일 하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상처 부위에 바르는 소독약이나 빨간 머큐로크롬을 사러 갔었다. 그리고 몸에 종기라도 나면 누런 기름종이에 까맣게 들러붙은 고약을 사러 갈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한밤중에 급한 환자가 발생이라도 하면 읍내 의원으로 우마차나 손수레로 환자를 옮길 수밖에 없을 정도로 어둡던 시절이었다.

임시 소집 일에는 여자들은 방학 동안 먼지에 쌓인 교실과 복도를 청소했다. 그리고 우리 남학생들은 운동장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제거했다. 잡초를 뽑으면서도 머릿속에는 늘 종구 어머니에 대한 일만 생각났다.
혹시나 종구와 가까운 사이인 석란이가 알 것 같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며칠 전 동네 입구에서 있었던 일로 인하여 쉽사리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뜨거운 뙤약볕 아래 풀을 뽑으려니 땅을 차고 오르는 열기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목은 한없이 타들어만 가서 물을 먹으려 교실에 들어서는데 석란이와 몇몇 여자 아이들이 모여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 멈췄다. 나는 종구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인가 싶어 더욱 궁금했다.

물을 마시고 교실을 나오려는데 석란이가 말을 건넸다.

“야, 상민아? 너 종구 엄마 병원에 간 것 알어?”

옥순이에게 들어서 조금은 알고 있으면서도 또 다른 새로운 말이 나올까 하는 생각에 전혀 모르는 듯 시침을 딱 떼고 말을 했다.

“몰라! 내가 알긴 뭘 아니? 그 집 일인디.”

조금은 퉁명스럽게 대답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석란이가 다시 말을 했다.

“한동네 살면서 어째 너만 모르냐? 하긴 뚝 떨어진 외딴집이라 그렇겠지. 야! 종구 엄마 읍내 의원에서 어렵다고 해서 기차 타고 대전 큰 병원으로 갔데. 나두 오늘 아침에 우리 아빠가 알려줘서 알았어.”

병원비를 준비하려고 이른 아침 읍내에서 첫차를 타고 마을로 오시던 종구 아버지가 잠시 지서에 들른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서 주임인 석란이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를 석란이가 전해 들었던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우리 집과 아무리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 해도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리 멀쩡하던 사람이 읍내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하여 대전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갔다는 말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아침부터 시작한 잡초 뽑는 작업은 점심 무렵이 되어서야 끝마쳤다. 그때까지도 매미는 지칠 줄 모르고 목청을 높여 울어 대고 있었다.
학교에서 일과를 끝마치고 모두들 서둘러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동네로 향하는 개울가 둑길에 조금 앞서가는 옥순이와 석란이가 눈에 띄어 얼른 달려가 셋이서 함께 걸었다.

“석란아? 너 우리 동네는 왜 오는디?”
“내사 니네 동네루 가던 말던 뭔 상관이냐 왜? 종구 만나러 간다. 넌 종구가 불쌍하지두 않냐?”

되묻는 석란이 말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걷는데 석란이가 혼자서 계속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나두 첨에는 종구 아버지가 니네 엄니헌티 좀 심하게 한다구 생각했는디 여러 사람들 말 들어 보니께 옛날에 니네 외할아버지두 종구네한티 잘한 건 없더라.”

석란이가 누구한테 무슨 말을 어떻게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를 핀잔하는 투로 말을 하여 듣기에 조금은 거북했다.

“뭐, 솔직히 나는 니 편두 아니구 종구 편두 아니여 그냥 중간 입장에서 말하는 거여. 그러닌게 상민이 너두 종구랑 풀구 서루 잘 지냈으면 좋겠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내가 대답을 했다.

“나도 무슨 원수 척진 것도 아니구 한동네 살면서 미워하긴 싫어 그렇지만 …….”

더는 말끝을 흐리자 옆에 있던 옥순이가 나서서 말을 거들었다.

“첨에는 동네 사람들이 종구 아버지 욕 많이 했어. 그렇지만 이번에두 너 용서도 해줬구 누가 그러는데 그때는 화가 나서 그랬지만 설마 니네 아빠 묘 파가라구 하것냐고 허드라. 그렁께 제발 너도 화풀구 종구랑 서로 좋게 지내라. 응?”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동네를 향해 걸었다. 개울가에는 물을 거슬러 올라오는 물고기를 노리는 물총새 한 마리가 보였다. 제 몸에 비해 커 보이는 물고기를 입에 물고 몇 번을 바윗돌에 두드려 입안으로 꿀꺽 삼키고 있었다.

한여름 열기로 레일이 달아올라 이글거리는 철로 건널목을 건너자 기현이네 외딴집이 보였다. 단작스럽게 작은 앞마당엔 색종이를 곱게 접어놓은 것처럼 보이는 백일홍이 형형색색으로 피어 있었다.
철로 건널목을 건너 나는 집으로 향했고 석란이와 옥순이는 곧바로 마을로 들어섰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추녀 끝이 유난스레 낮은 초가집 마당에 땅거미가 찾아들 무렵이었다. 읍내 장에서 돌아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활처럼 휘어진 밭둑길을 걸었다. 얼마를 걸은 후에 능소화 넝쿨이 뒤덮고 있는 벼랑바위 앞에 검둥이와 같이 앉아 있었다.
옅은 구름이 나직하게 깔린 틈사이로 불그레한 노을빛이 눈치를 보는 듯 얼비치고 있었다. 주위가 어슴푸레하게 어둠살이 짙어 갈 무렵 읍내에서 오는 막차에서 내리신 어머니가 면소재지 철길 건널목을 건너오셨다.
어머니께서 벼랑바위 앞으로 오시자 내가 맨 먼저 종구 어머니 이야기부터 꺼냈다.

“엄니! 어젯밤에 종구네 엄니 병원으루 실려간 거 알어?”
“응!”
“엄니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종구네 엄니 그냥 좀 안됐다. 사람덜 말 들어 보닌께 참말루 많이 아푸다구 허든디.”
“나두 안다. 뭐시냐, 아침나절에 읍내루 나갈라구 들주막에서 버스 기다리구 있을랑께 들 주막 가게 정씨 아저씨가 말을 전해 줘서 알았다 그래서 서둘러 읍내 의원으로 가봤더니 그기서는 가망이 읍다구 혀서 대전 큰 병원으루 옮겼다구 허드라 에휴.”

지난날에 있었던 그 격한 감정은 어디로 갔는지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씀을 이으셨다.

“암튼 일이 잘돼야 할 틴디, 지나 나나 이 모진 세상 잘못 태어나 그 고생 다하구 이제 겨우 살만 허닌게 그리 몸에 탈이 나니 그 여편네두 복이라구는 지질이두 읍지 에이구.”

‘사락사락’ 옷깃에 스치는 콩 잎사귀 소리를 들으며 어머니의 뒤를 따라 어둠 자락이 내리는 밭길을 지나 집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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