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5 조회 : 2,328




온 주위가 평온의 침잠에 깊히 빠져든 꼭두새벽이었다.
근자 들어 더욱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일이 한가지 생겼다.
아무리 새벽녘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조용했었던 적은 없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지난 날에는 밤새 동안 늘상 너댓 차례 마을 앞을 지나는 기차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의 어둠을 뚫고 패기있게 오르내리는 기차의 차축이 레일과 맞닿아 힘차게 부딛치는 소리에 삶에 생동력을 얻었다.
더불어 고즈넉함을 덜어주는 세찬 기적소리가 있었기 때문에 활기찬 마음으로 새로운 하루를 준비할 수 있었다.

허나 이젠 전쟁으로 인해 그마저 운행을 중단하여 기차의 소음마져도 들을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요즈음 맞이하는 새벽엔 마치 무엇인가 잃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좁은 가슴에 꽉 들어차 있었다.

밤새 방광이 차올라 소피가 급해 마려워 얼떨결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방안을 휘둘러 보니 어둑발이 채 가시지도 않은 주위의 모든 것들이 희끄름하게 보였다.

단지 방 문짝에 들러붙어 있는 문종이가 어설피 달빛을 보듬고 있어 허옅게 바라보일 뿐이었다.
그런 탓에 그다지 밝지 않은 두 쪽의 방문짝이 희멀건하게만 보였다.
그래도 부족할지언정 나름대로는 휑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혀 주는 것 같았다.

뒷마당 한구석에 있는 칫간 옆 두엄 자리에 오줌을 누려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저 갑갑해지는 마음에 버릇처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아무래도 오늘 하루 중 한번쯤은 한줄금 비가 쏟아질 것처럼 보였다.
물론 어설풀지라도 살아 오면서 배운 경험으로는 그런 쪽으로 생각이 모아졌다.

심성궂은 먹구름은 몸이 가벼운 흰구름을 등 떠 밀쳐내고 밉쌀스럽게 두터운 벽을 이루고 있었다.
달은 그 틈새를 비집고 얼굴울 인색하게나마 보여주어 주위가 조금은 환해졌다.
그러다 금새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춰버려 다시금 주변이 어두룩해졌다.
그런 달의 모습이 바라보는 나로 하여금 참으로 감질나게 했다.
달은 그런 내 모습을 술레로 삼아 놀이를 자꾸만 반복 하려는 것 같았다

뒷마당 구석에 있는 치간 옆 두엄자리로 갔다.
고의춤을 내리고 오랫동안 참았던 오줌을 시원스레 내려쌌다.
그리고 끝머리에 힘을 주어 그런가 아랫도리가 약간 떨리면서도 시원하기만 했다.

여명이 밝아오기까지는 조금 이른 듯하였다.
그런데 날이 밝어오길 차분하게 기다리질 못하는 조급함에 꼴사납게 성깔이라도 부리는 것 같았다.
바로 옆집 귀분이네 수닭이 마을에서는 제일 먼저 목청 껏 울어대었다.
그러자 그에 화답을 하듯 우리집 닭장 안 횃대에 앉아 있던 수닭도 그 뒤를 따르려는 것 같았다.
목을 길게 빼내밀며 울어대어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그러자 서편에 거의 다 기우러 가는 만월이 뒤늦게서야 구름사이로 완연하게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라도 새벽녘의 적요함을 조금은 달래 주는 듯 하였다.

싸리 울타리 너머로 늘상 시원스럽게 보였던 딋 판데기와 원목다리가 부유스름하게 보여 답답할 정도였다.
마치 지금 처해 있는 우중충한 마을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답답해지는 마음에 싸리문 밖으로 한번쯤 나서 볼 요량에 닭장 앞을 스쳐 지나려하였다.

그런데 그 이른 새벽녘에도 닭들은 혹여 내가 모이를 주려나 싶었는지 횟대에서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루루 몰려 닭장 앞에 얽어 놓은 철망 가까히 다가서 더러는 머리를 갸웃거리며 다들 내 얼굴만 처다보고 있었다.
닭장 안 구석엔 해를 넘겨 탐실하게 큰 검정 암닭 한마리가 둥그스름한 흙구덩이 안에 들어 앉아 좀처럼 움직이려 하질 않했다.
이 또한 미루어 짐작컨데 몇개 정도의 알을 품고 있는 듯 싶었다.
아마도 제딴에는 철에 맞지도 않게 병아리를 부화시킬 목적으로 지난친 모성애를 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달빛이 있어 주위가 비록 어두룩해도 견딜만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온 주위가 더욱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뭔일인가 싶어 하늘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기우러 가던 달이 어느사이 끝 부분의 한점도 남기지 않고 아주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그런 탓인지 그런데로 허옇게 보였던 구름이 이내 거무추레하게 보였다.
그래서 다시금 자세히 바라보니 불그스름한 빛이 옅트막하게 구름 위로 서서히 번져나고 있었다.

그래서 얼른 동쪽 하늘을 바라보니 넌지시 생각했던대로 적중하여 마음이 흐믓했다.
여명이 탐스런 빛으로 생동감 있게 모습을 드러내 새로운 감동을 아주 짙게 자아내었다.
그로 인해 가슴이 벅차 올라 한동안 울렁거렷다.

이렇듯 돌고도는 자연의 순리가 틈림없을진데 좀처럼 순리에 응하질 않고 거역하려만 드는 악질적인 부류가 있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스멀대는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전쟁의 광인이 된 놈들이 더없이 미워질 따름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기분이 경직되려고 하여 얼른 대문 밖으로 트여진 동네 고샅길을 바라보았다.

마을 우물터로 이어진 좁다란 고샅길 가운데쯤에 허리가 굽으신 옥순이네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이것 역시 미루어 짐작컨데 지금 군인에 몸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어느 전선에서 몸바쳐 싸우고 있는 자기 아들 때문인 것 같았다.

바로 그분이 내 친구 옥순이 아버지였기에 그 분을 위해 치성을 드릴려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그 이른 새벽녘에 동네 우물터로 정안수를 뜨러 오신 것 같았다.

옥순이 할머니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자기네 집 뒷뜰 장독대 옆에 돌을 쌓아 새끼 줄에 얼룩달룩하게 헝겁조각들을 붙들어 매어 칠성당 자리를 만드셨다.

그리고 옥순이네 할머니는 옥순이 아버지께서 무사히 귀향하시길 학수고대 하시며 이른 새벽마다 칠성님께 빌고 또 비셨다.
참으로 동네 사람들 그 누구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지성의 극치이자 모성애의 표본이었다.

거듭거듭하여 혼미하게 돌아가는 시대적 상황이 우리에게 주는 심리적으로 옥죄어오는 고통은 실로 크기만 하였다.
이모든 부조리한 현상을 자아 낸 시대적 모순의 주된 요인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비인간적인 온갖 만행을 일삼은 놈들의 침략적 야욕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는 놈들의 불법침략에 분연히 맞서 대항할 능력이 그다지 없었다.
그 당시 공산주의자들과 대적하기엔 우리의 국방력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였다.

그랬기 때문에 전쟁이 안겨주는 비참한 결과에 울분이가득 차올라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도 그 당시에는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에 대한 정신적이나 물질적인 엄청난 피해는 아무런 죄가 없는 민초들이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제반 사정이 그렇듯이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없는 시절이었다.

우리들 모두는 전쟁이 그리 쉽게 일어날 것이라고는 전혀 예측하질 못했었다.
그런 아주 취약한 시대적 상항을 호시탐탐 노려오던 놈들이 이 때다 싶어 불법침략을 감행하고 말았다.
그것도 세계의 역사 유래상 찾아볼 수 없는 바로 같은 민족에게 아무런 죄의식 하나 없이 공공연하게 자행하고 말았다.

그 결과가 빚어낸 엄청난 피해는 차마 말로써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렇게 커다란 아픔의 상처를 같은 민족인 바로 우리들 모두에게 떠안겨 주고 말았다.
그로 인해 힘이 없었던 우리들 모두가 제가끔 고스란히 떠안을 수밖에 별다른 방법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정말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전쟁이었다.
더불어 그런 통한에 비극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다.
당시의 국가적 제반사황이 극히 취약하다 못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태에 봉착해 있었다.

그래서 그 무렵 사회적인 혼란을 틈타 전혀 여과되지 않은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괴기스러운 헛소문이 이 땅 구석구석에서 심심찮게 퍼져나고 있었다.

그 실례로 이번 인공난리가 터지려는 것을 미리 알고 그랬는지 내동 멀쩡하던 동구 밖에 있는 느티나무가 새벽에 곡을 했다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금강 물이 그렇게 슬프게 울었다는 등의 전혀 근거 없는 소문들이었다.

그렇게 실제로 확인되지도 않은 소문을 일부 사람들은 실제 있었던 것처럼 각자의 입을 통해 무분별하게 또는 무책임하게 공공연히 퍼트렸다.
그런대도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는 그 누구 하나도 그것을 애써 부인하려고 하질 않았다.

어찌 보면 신세대의 물질문명이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그로 인한 직간접의 혜택이 우리들 모두에게 골고루 베풀어지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일제의 강제점령으로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기본적 권리를 강탈당한 채 삼십육 년간의 결코 짧지도 않은 세월 동안 온갖 핍박과 찬탈을 당해 온 우리가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겨우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민족의 비극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러니 시대적 여건과 사회적 분위가 그런 물질문명의 이기를 받아드릴 여건이 성숙되지도 못한 것은 당연했다.

사람들 중에 더러는 불교를 신봉하여 초파일 같은 날에는 근처에 잇는 절을 찾아 불공을 드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생각보다는 세속 깊이 파고 들지는 못했다.
개신교인 기독교는 논산군내에서 최초로 강경 읍내 옥녀봉 밑에 침례교회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그 뒤 일제강점기 때 정방형의 한옥 구조인 성결교회가 세워져 겨우 두 곳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 대다수가 오로지 토속적인 신앙에 의존하려고 했다.
우리들 주변에 점쟁이와 무당들이 효험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 치고 그리도 많았다.

각 가정에 대소사를 결정 할 때나 혼인을 할 때도 그랬다.
어쩌다 가족들 중에 심한 병환이 있는 중환자가 생기면 그들의 말이 매사를 결정함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음양으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듯 사회의 근대화가 그렇게 느리기만 했었다.
그런 헛소문들은 그 당시 시대적 배경이 산출해낸 깊은 의미가 없는 허구적인 일들이었는지 모른다.
너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이 흉흉하다보니 그리라도 해서 심리적인 위안을 조금이라도 받으려 했던 것 같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을 한다면 그만큼 피폐해진 세상에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곳이 없어 외로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그 모든 소문들이 상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이치에 부합되지 못하는 황당무계한 말로 들렸을 것이다.
허나 더 넓은 땅이라고 평소에 그리 거들먹거리던 도시에서는 그와 비슷한 사정이 오히려 더욱 심했다.
일일이 대꾸할 값어치조차도 없는 유언비어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난무하여 가뜩이나 뒤숭숭한 사회 혼란을 가일층 부추겼다.

마을 사람들이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으려 가장 보편적으로 생각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피에 굶주린 놈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놈들을 피하기만 하면 될 것이라는 아주 대책 없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저마다 이불보따리와 솥단지를, 그리고 옷가지 몇 개를 주섬주섬 챙겨 무리 지어 산속으로 숨어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피난처로 삼았던 곳이 있었다.
지금의 대둔산 계곡과 그곳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전라북도 운장산에 있는 싸리재골과 운주에 있는 천등산 부근이었다.

동네 사람들 대다수가 오랫동안 정들었던 마을과 기쁨과 애환이 서렸던 터를 버리고 떠나야만 했었다.
그렇게 낭인 아닌 낭인처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 총체적인 책임을 물을 곳조차도 모를 정도로 마을 사람 모두는 그저 욕심 없이 하늘의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그런 순박한 분들이었다.

그런 촉각을 다투는 분위기 속에 피난처로 생각하는 곳이나 그런 인근지역에 혈연이 있는 동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발 빠르게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전라북도 운주군 고산 어딘가에 일가가 있는 상분이네 집이었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는 ‘신고산 타령’ 노래나 부르면서 천하태평하게 사는 듯 보였던 병수네 아버지가 자기 식솔들을 데리고 상분이네 집 뒤를 이어 피난길에 올랐다.
그렇게 마을을 떠난 지가 벌써 한 이레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발 빠른 병수 아저씨의 행동을 두고 동네 사람들은 암튼 바깥세상 나들이를 많이 해서 역시 뭔가는 잘 몰라도 우리들보다 생각이 앞선다고 입을 모아 말을 했었다.

그때 당시 마을에서 앞 들녘에 논 섬지기나 짓고 뒷 들녘에 많은 땅을 가지고 살아 속칭 부자라고 불리던 집이 두 집 있었다.
그중 한집이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집이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내 친구 종구네 집이었다.
그리고 또 한 집이 조상님들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좀 많았고 자기네 큰 형이 일제 강점기 때 충남 서천에서 조선인 순사를 했던 영택이네 집이었다.

그중에서 영택이네 아버지도 이삼일 전에 순아네 소달구지를 타고 두 집이 함께 운장산 계곡 어디로 피난을 떠났다.

그런 와중에 그나마 동네일을 본다고 구장직(지금의 이장)을 맡아 일한지가 꽤나 오래된 동네 구장인 인식이네 아버지께서 나름대로는 혼자서 곰곰이 생각을 많이 해본 것 같았다.

동네 구장도 감투 아닌 감투라는 생각이 들어 놈들이 쳐들어오면 남들보다 더 위험할 것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연자방앗간에서 모임을 가진 그날부터 요모조모로 생각을 거듭하여 피난을 가려고 했었다.
하지만 단 한 분뿐이신 노모께서 중풍으로 거동을 아예 못하셨다.
그리고 막말로 용변을 보신 것까지도 그분께서 직접 처리를 못하실 정도로 상태가 안 좋으신지라 그리도 못하고 잔뜩 애만 태우며 엉거주춤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부락에서 유일하게 주막집을 하며 막걸리를 팔아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하던 삼식이네 집이 있었다.
그 삼식이네 아버지가 그날 오전에 비가 조금 주춤해진 틈을 타 가족들을 데리고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그리고 동네 사람 그 어느 누구한테도 어디로 간다는 행적조차 밝히지 않은 채 소릿재 고개를 넘어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다.

그렇게 동네 사람들 한 집 두 집씩 마을을 비우고 떠나는지라 마을이 어수선하다기보다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한 가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종구네 집에 대한 문제였다.

다들 모이기만 하면 인공난리 때문에 걱정을 태산같이 하면서 제가끔 피난처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남들이 생각 못하는 묘책이라도 갖고 있는 듯 전혀 피난 갈 생각을 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 모두로부터 참으로 많은 의구심을 자아내게 헸다.

동네 사람들의 보편적 생각으로는 난리를 피해서 도망가더라도 부잣집들이 먼저 움직일 줄 알았다.
그 많은 땅덩어리를 두고 가자니 그리도 아까웠는가? 아님 그 숱한 쌀가마니들을 다 옮겨가지도 못해 아쉬워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이 피난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여느 마을 사람들보다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전전긍긍하여 발걸음이 더디기만 했다.

아무리 장마철이라고 해도 그리 연 사나흘 동안 내리 억세게 퍼붓던 비가 다소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남아있는 마을 사람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네 앞들머리 인식이네 집 사랑방 앞 추녀 밑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무가 가득 서린 매화산과 그 산기슭 아래 자리한 면소재지 쪽으로 저마다 눈을 모으고 있었다.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지만 비가 그친 뒤에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산야의 자태가 그리도 선명할 수가 없었다. 앞 들녘 논배미에는 민초들의 애간장 타는 줄도 모르는지 하얀 두루미 몇 마리가 활짝 펼쳤던 나래를 접으며 비행 속도를 아주 낮춰 논배미 어딘가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마을 사람 다들 나들목 벼랑바위 위에 제철을 만나 흐드러지게 피어난 능소화가 누르스름하게 보이는 면소재지 쪽을 바라보며 그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런데 상수네 아버지가 옆자리에 작은 덩치만큼이나 촐싹맞게 쭈그리고 앉아 지푸라기로 이 사이사이를 후비고 있던 방앗간 순태 아저씨를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아니, 기나저나 성님은 은제 피난 갔다 돌아온기유? 어저끼 저녁나즐에 성님이 먼저 짐보따리 챙겨 떠난다기에 그런갑다 혔는디 우째 여지껏 떠날 생각일랑은 눈곱맨치도 없고, 뭐땀시 여그 앉어 있는 줄을 당췌 모르것네유. 아, 아닌 말루다가 우덜이사 그저 나라여서 나랏님이 시키는 대루 혔을 뿐이구, 그 쳐죽일 놈들이 쳐들어온다고 혀두 벨스럽게 꺼끄럴 것두 읍는디, 그려도 성님일랑은 동네를 대표해서 그간이라두 구장 일을 본 성순이 성님 같이 방앗간일이라두 본다구 나름대루는 어깨다가 심 좀 줬으니께 나사 생각이 틀릴랑가는 모르지만서두 성님두 쪼까 찝찝헐 꺼인디, 우찌 안 가구 그런다요. 아, 뭐시냐. 동네 사람들 떠난 것 보세유, 아 글씨 여름날 보리밥 묵고 삼베 바지여다 핏방구 껴서 소리소문읍시 사라져번지드시 다덜 떠나 번진거 성님두 알꺼 아니유 그무시냐 삼식이네두 한 두어 시간 전에 소릿재 고개 너머루다가 떠나 번진 모양인디 성님은 우짤라구 그라요. 워쩌튼 지간에 성님두 감투라면 감투 아니유? 왜, 내 말이 영 틀리남유?”

그러자 상수네 아버지 말이 영 비위에 거슬렸는지 순태 아저씨가 열심히 이를 후비면서 역정어린 목소리로 말을 되받아쳤다.

“참, 세상 살다 벨 놈의 꼬락서니 다 보구 사는구먼. 뭔 났다고 아무 죄 읍는 나까정 물고 늘어지는 줄 모르것네. 으디 나가 아무리 읍시 살았더라두 동네 방앗간일 아니면 입이다가 풀칠 못허는 줄 알었던감. 이제사 말이 나왔으니 허는 말인디 애시당초 방앗간 생겼을 적에 동네서 발동기 돌리는 재주 가진 사람이 하나라두 있었는가? 그려서 나가 군산서 통통배를 쪼까 타본 적이 있어서 발동기를 돌리는 걸 우찌 그리 용케 영근이 아부지가 알고 군산까정 나를 데릴러 안 왔었는감. 그런디 나가 그것 못혀서 환장 옘병헌거 모냥 자네가 자꾸 방앗간일 어찌구 저찌구 험서 염장을 어저끼부텀 자꾸 쑤셔쌌는디. 아,이 사람아. 말이사 바른 말이지 나가 방앗간 일을 보게돼번진 긋두 동네 사람들이 하두 나 아니믄 안 된다구 제발 혀달라구 혀서 발동기 돌린 죄밖이는 읍는디 자네는 나를 두구 계속 그렇게 씹어돌려싸니 참 말대꾸허기조차두 인자 싫으네 그려. 그라고 이 말은 혀서 쓸랑가 으쩔랑가는 모르것는디 동네 구장 성순이사 아, 면장이 임명혀서 그 자리를 맡은 것인디 우째 나허고 똑같이 취급을 헐라구 허는가. 왜 내 말이 틀리는감? 참말루 얼척이 없네 그려.”

두 사람이 그렇게 언성을 높이며 말을 나누고 있는데 동네에서 고추농사를 제일 많이 짓는 상두네 아버지가 두 사람 사이를 진정시키려는 듯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며 말을 했다.

“아, 성님들. 오늘 무신 날 잡었소? 그라고 둘이서 쌈박질을 혀댔싸니 옆에 있는 지두 듣기가 쪼까 민망허네유. 시방 사방간디서 피난간다구 저 난리를 부리는 모습이 시방 남산리로 가는 기루에 줄느래비 서서 피난가는 모습을 빤히 봄서두 으디 그 말이 맘 편허게 나오는감유. 참말루 나이 어린 지가 헐 말을 아니지만서두 이럴 시간이 있으면 싸게 짐들 싸가지구 날씨가 쪼까 봐줄라구 맴먹었을 때 기왕지사 떠날라구 맴먹었으면 한시라두 서둘러서 가뿐지는 것이 옳다구 생각허는디 두 성님 생각은 으짤란가 모르것네유. 기나저나 그건 그렇타치구 아 저놈으 맹꽁이는 속창세기두 읍나 청승맞게 소리를 내서 울어재끼는지 모르것소. 암튼 참 어처구니 읍는 세상이 돼번졌네유.”

그러자 면소재지 쪽 등메산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를 피워대던 동근이 아버지가 한마디 거들고 나섰다.

“기나저나 떠날 사람은 대충 떠난 것 같은디 도대체 종구네 애비는 무슨 똥배짱인지 모르것지만서두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혀봐두 내 짧은 대가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단 말이여. 아니믄 즈그 동상이 몇 달째 동네 떠나가지구 대전 으딘가에 있었다는디 다들 알랑가 모르것지만 읒그저끼 즈그 성네 집으루 들어와 있다는구먼. 그기 무신 관련성이 있는지는 모르것지만서두 암튼 간이 뭔 조화가 있을 것 같구먼 그려.”

나라꼴이 이 지경이 되다 보니 참으로 코딱지만 한 동네에 모이기만 하면 할 말들이 그리도 많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찌 밤새도록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고 견뎠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이제 겨우 군대 갈 나이에 가까워진 성균이 형이 아주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지는 나이가 어려 가지구 지 눈으로 직접 보구 겪어본 것은 아니지만서두 참말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으짜다가 면소재지나 읍내 나가서 행세 꽤나 헌다는 사람들 이야기허는 뒷전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지만 그 빨갱이라는 놈들이 진짜루 무식헌 놈들인가 보대유. 왜냐믄 무신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 다루드끼 눈 하나 꿈쩍 안 허구 인정사정 볼 것두 없이 뺏는 모양이던구먼유. 참, 그러니 나이 어린 지가 으르신들 앞이서 감히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자손 대대로 천벌 받어 마땅헐 놈들이던구먼유. 그나저나 내둥 잘 댕기던 빽빽이 기차는 우째 코빼기두 안 보인대유. 벌써 안 보인지가 이틀은 훨씬 지난 것 같은디.”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보였던 동근이 아버지가 기성이 형의 궁금증을 풀어주려는 듯 말을 이으셨다.

“아, 이 사람아. 그기사 두말 안 혀도 뻔헌 거 아니 긋는가. 한강다리가 댕강 끊어져 분진지가 벌써 근 보름이나 되았지 아니긋는감.내사 잘은 몰르지만 엊그제까정 기냥저냥 댕겼던 기차는 대전서 목포까정 가는 화통차였을 기구먼. 대전이 위태위태혀지니께 그나마 화통열차두 서 버린 모냥이네 그려.”

각자 나름대로 입을 열어 말을 했을 뿐이지 오늘도 어제에 이어 별다른 방법이 강구되지도 못한 채였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돌듯 제자리걸음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각자의 마음 구석구석에는 조상대대로 이어 살아 온 터전을 잠시일지라도 버리고 떠나야할 생각을 하니 그리 섭섭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고향 땅 어딘가에 태를 묻었기에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온 동네 사방을 휘둘러보아도 어느 한 곳인들 나름나름 정이 다 서려 있으니 그 또한 가누기 힘겨운 아픔이었다.

조상님들의 숨결이 고루 배인 삶의 터를 가꾸려고 이른 아침 동녘 하늘을 뚫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반가운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그리고 들녘의 터로 나가 힘껏 일을 하였고, 불그레 물들어가는 저녁노을을 벗 삼아 은혜를 베풀어 준 그 모든 것들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 했다.
그런 심성으로 집을 찾아 돌아가는 가장 진실한 삶을 영위했던 고향 마을사람들이었다.
그랬기에 가슴 가득 밀려오는 애향심에 마음 가누기 실로 힘이 들었다.

더더욱 마을 사람들 모두의 눈에 밟히는 것이 있었다.
그 첫 번째가 바깥세상으로 연결되는 나들목인 동구 밖에 듬직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였다.
언제나 마을 사람들이 마을 밖으로 볼일을 보려고 들락날락할 때 나무 그늘 밑으로 찾아들어 친근감이 더했다.
그 다음이 마을 뒤편에 과묵하게 풍진세월 서려진 온갖 사연들을 과묵하게 담고 있는 원목다리였다.
위치상으로는 마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느티나무보다는 친근감이 다소는 떨어졌다.
그러나 동구 밖에 서 있는 느티나무보다는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을 사람들과 더불어 숱한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의 뇌리와 마음속 깊은 곳에 때 묻은 애착이 가는 것은 동구 밖에 있는 느티나무보다는 원목다리가 훨씬 더할 수밖에 없었다.

흘러간 세월이 이미 아듬고 사라져 간 그 먼 옛날 일들이었다.
천 리 길 한양 땅을 가기 위해 과객들이 타고 온 당나귀와 노새를 매어 놓았다는 둥구나무는 오간 곳이 없었다.
그와 더불어 때 묻은 민초들의 애환이 가득 서렸던 검은 연기로 잔뜩 그을린 초가 주막집은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었다.
그리고 서로 정을 나누며 텁텁한 막걸리로 목을 축이려 주고받았던 막사발의 깨어진 한 조각조차도 눈에 띄지 않아 세월을 무상함을 다시금 절감하게 했다.

그러나 뒤를 이어 그 누가 심었는지 알 길이 전혀 없으나 단 한 그루 외롭게 서있는 아카시아 나무가 원목다리의 유일한 벗으로 남아 있었다.

그 아카시아 나무가 원목다리와 더불어 일제 강점기 때 드넓은 금강 들녘에서 우리 조상님들의 피와 땀으로 거둬드린 소중한 곡식을 찬탈해가는 그 모든 과정을 직접 보았었다.
그리고 뒤를 이은 동족상잔의 전쟁이 낳은 비극적인 면면들까지 역사에 증언이라도 하려는 듯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