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해가 서쪽 하늘가에 몸을 숨긴지도 꽤나 지나 주위가 제법 어두워졌다. 아랫마을에선 서둘러 불을 밝혔는지 호롱불빛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마주 바라보이는 면소재지에도 전등에 하나둘씩 불을 밝혀 희뿌연 운무 속에 불빛이 희읍스름하게 보였다. 들녘 너머 십 여리 떨어진 읍내에도 불빛이 여느 날보다는 조금 흐린 듯하게 보였다.
싸리나무로 만든 울타리 밖에 외로이 서 있는 키 큰 해바라기 머리 위에 하얀 눈썹달이 새침하게 떠올랐다. 봉창 밖으로 달빛이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그리고 어디선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그지없이 애처롭게 들려왔다. 내동 토방에 엎드려 있던 검둥이가 갑자기 무엇을 보았는지 요란스레 짖어댔다. 얼른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조금 멀리 철길 건널목을 건너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해끄무레하게 보였다. 이내 나는 검둥이와 함께 밭둑위로 내달려 언덕배기를 내려서는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엄니, 인제 와?” “응, 쪼매 일찍 올라구 했는디 면에서 직원들이 늦게 문상을 오는 바람에 손님들 뒤치다꺼리 허다 보닌께 쪼매 늦었다. 그건 그렇구 얼른 이거나 받어라.”
어머니가 누런 비료 포대 포장지에 싸인 물렁물렁한 물건을 건네셨다.
“엄니, 이게 뭐시랴?” “응, 그거 너 줄려구 쪼매 싸 온 거여. 거기 떡이랑 고기 들어 있으니께 집에 가서 먹어라.”
어머니의 말씀에 왠지 마음이 썩 내키질 않아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밭둑길을 걷고만 있었다. 어머니께서 그런 속내를 알아채셨는지 말씀을 이으셨다.
“왜? 먹기 싫으냐?” “응!” “왜? 먹지 그려, 남들은 없어서 난린디.” “그래도 싫어! 종구 엄니 생각이 자꾸 나서 좀 그려.” “원, 사내자식이 비위가 그렇게 약해서 어디 써먹겠니? 암튼 그건 그렇구 그 집도 참 큰일이다. 그 큰살림 어떻게 꾸려 나갈려구 허는지 그리구 어린것들은 누가 거두려는지, 에휴.”
이제는 그 격하고 서운했던 지난날의 모든 감정을 비우셔 종구 어머니의 죽음을 애처로워하시는 듯했다. 그런 어머니의 한숨소리가 앞을 서 걸어가는 내 어깨 너머로 가늘게 들려왔다.
“그나저나 상민아, 너 마루에 널어놓은 고추 치우구 방에 모기장 쳐 놓았지? 그리구 너 배고프겠다. 얼른 밥 차려 줄게, 어여 가자! 검둥이는 밥 줬냐?” “응 다 치워 놓구 모기장도 쳤어. 그리고 검둥이 밥도 줬구.”
어머니와 내가 계속 말을 주고받으며 걷는 길가 풀숲에 개똥벌레가 꼬리 끝에 파란불을 함초롬히 밝히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는 급히 부엌으로 가셔 저녁밥상을 차려 방으로 들고 오셨다.
“상민아 내 누누이 너한테 이르는 말이지만 에미 속 좀 작작 썩여라. 니놈이 자꾸만 속 썩이면 내 속 문들어져 나두 종구 에미처럼 죽어 버리면 너 혼자서 어떡헐래?” “참 엄니두, 재수 없게 죽기는 왜 죽어. 엄니는 천년만년 나하구 살 건데 뭐, 안 그래? 맞지?”
어슴푸레한 방안 너불거리는 등잔불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와 나는 서로 말을 주고받았다. ‘엄니가 죽는다.’는 말에 갑자기 목이 메어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울먹거리는 내 모습을 바라보시던 어머니가 나를 와락 끌어안으시고 가볍게 등을 토닥여 주셨다.
“참 그런디 너 요즘 통 밥을 안 먹드라. 혹시 뙤약볕에 더위를 먹었냐? 안 되것다. 며칠 있다가 익모초(益母草) 즙을 내서 한번 먹여야겠다.”
후덥지근한 밤 열기와 모기를 쫓으시려 끝이 갈라 찢어진 종이부채를 부치시며 말씀하셨다.
“참, 사람 목숨 허무허지. 그리 쉽게 가다니! 엊그제 장에서 본 것 같은디, 참 그리구 너두 종구랑 다 풀고 옛날처럼 친하게 지내거라. 지 에미 부르면서 우는 모습 보니 내 속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거 같더라.” “알았어, 안 그래두 조금 있다가 종구 만나면 사과할려구 마음먹구 있어.” “암, 그려야지. 말이사 바른말이지 니들이 뭔 죄가 있냐? 이놈의 험한 세상 모질게 살아남은 우리들이 다 그렇게 만들었지.”
어머니께서는 나와 종구 사이에 어긋난 관계도 그 시대적 환경의 탓으로 돌리려 하셨다. 더불어 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어른들이 져야 하는 것처럼 말씀하셨다. 그런 암울한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초저녁부터 뒷산 소쩍새가 울기 시작했다. 밤이 짙어지자 더더욱 소리를 크게 내어 우는 횟수(回數)도 잦아졌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솔바람 소리도 함께 들려와 한여름 밤 더위를 조금이라도 식혀주려는 듯했다.
“엄니 내일두 종구네 집에 일 거들러 가?” “아니, 낼은 장사 나가야지! 얼른 부지런히 한 푼이라도 모아야 너 중학교 갈 때 등록금 마련하지.” “엄니 고마워. 엄니는 그렇게 고생하는디 나는 아무것도 못해 주구 맨날 속만 썩여서 …….” “사내자식이 마음 약허게 바보 같은 소릴 하네. 니가 나 한티 뭘 해줘야 하는디? 엄니는 그런 거 다 필요 없구 니가 꼭 중학교에 합격하기만 바란다, 알았지?”
모기장 안에 머릴 맞대고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몸을 옆으로 살짝 돌리셔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시며 다정스레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가 그토록 누누이 말하시는 읍내 중학교는 경쟁률이 좀 심하여 시골 학교에서 웬만큼 공부를 해서는 합격하기가 힘들었다. 성적순에 따라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이 추천을 해주셨다. 전교에서 1~2위를 하는 학생 중에 가정환경이 부유한 학생은 도청소재지 대전에 있는 대전중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러나 그 숫자는 몇 년 만에 전교에서 겨우 1명이 나올까 말까 했다. 학년 석차가 두 학급 약 120명 중에서 20위 안에 드는 학생은 맨 먼저 공립인 강경중학교와 강경여자중학교에 입학원서를 써 주셨다. 그 다음 중상위권 성적에 해당하는 학생들은 논산의 중학교와 논산여자중학교에 그리고 중하위권 학생들은 천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립인 대건 중학교나 같은 사립인 기민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중 학년 석차 20위에 드는 학생들 중에서도 불합격의 불운을 당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 이유는 군내에 있는 모든 국민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몰려들어 경쟁률이 심했던 탓이었다. 그 시절 강경중학교를 나와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은행원 채용 시험에 합격만 하면 모든 사람들의 선망(羨望)에 대상이 되었다. 시쳇말로 서로 사위를 삼으려 했던 그 시절의 사회풍속이었다. 그런 길이 있었기에 저마다 어려운 형편에 무리하여 대학에 진학을 하지 않으려 했다. 은행에 취직만 되면 가장 빨리 사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자립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젊은이들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꿈이었다. 상업고등학교 전체 학생 수 삼백 이십여 명 중에 한 해 은행시험 합격자가 겨우 5~6명에 불과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그 길은 정말 어렵고 힘든 하나의 큰 관문이었다.
구름 사이 겨우 얼굴 내민 초승달이 봉창문 밖에 께끄름하게 머뭇거리고 있었다. 마을로부터 어른들의 우렁찬 목소리가 이 곳 산밑까지 들려왔다. 내일 출상(出喪)을 앞두고 미리 발을 맞춰보고 있는 것 같았다. 선소리꾼의 요령(搖鈴)잡이 소리에 맞춰 후렴구를 부르는 동네 상두꾼들의 절절한 소리가 언덕배기를 넘어 애틋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토록 애절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또 하나의 마을 사람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야만 했다. 그런 생각에 깊숙이 젖다보니 왠지 허전한 마음에 애잔함이 가슴속에 잔잔하게 묻어났다. 그렇게 그 지루한 여름밤이 어둠속에 들려오는 요령잡이가 치는 방울소리와 더불어 서서히 짙어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