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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62 조회 : 1,903




반쯤 열린 사립짝 옆 울타리에 소담스럽게 피어난 짙은 자주색 붓꽃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청록색 칼집 모양의 기다란 이파리 위엔 깃동잠자리가 살포시 날개를 접고 있었다.
앞마당에 내려서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논산평야는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드넓기만 했다. 그 속에 우리 두 식구의 삶에 원천인 손바닥만큼 달라붙은 논 서마지기를 그리도 허무하게 남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다.
이제 흙냄새 편하게 맡을 땅 한 조각도 없으니 말이 시골 살이지 그 시골 속에 완전 소외된 이방인처럼 느껴졌다. 내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라고는 작은 방 한 칸에 추녀가 기운 초라한 오두막이 전부였다.
그나마 그것조차도 소유권이 종구네 집에 속해 있는지라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우리 집 앞으로 남겨진 것은 그 어느 것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모든 여건이 녹녹치 않아 삶은 형언키 어려울 정도의 역경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로 인한 정신적인 공허감의 비중은 실로 막대하여 순수하게 자라나야 할 어린 나에게 크나 큰 열등감마저 불러일으켰다. 한편으로 그런 열등감은 이 험한 세상에 어떻게라도 살아남아야하겠다는 강인한 저항심을 갖게 했다.

그런 열약한 환경 속에 어머니께서는 푸성귀라도 심어 먹을 작은 욕심에 도회지로 떠난 남순이 어머니에게 예닐곱 평 남짓 되는 쪼가리 텃밭을 빌렸다. 비록 남에 밭이지만 그라도 있어 일그러진 어린 마음을 조금은 달래주었다.
그런 막막한 환경 속에서 버텨 살아온 것은 허기진 배에 허리를 졸라매시고 눈비가 내려도 끊임없이 젓갈 장사 나서는 어머니의 강인한 덕이었다. 더불어 그것이 나에게는 하늘이 주신 큰 은혜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렇듯 가난을 숙명(宿命)처럼 받아들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삶 속에 순응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내 가슴속엔 크고 작은 한들이 하나둘씩 소리 없이 옹이져가고 있었다. 작은 몸뚱이의 좁은 가슴속에 울분이 치밀어 오를 때마다 기필코 이 가난에서 벗어나리라고 버릇처럼 앞산을 바라보며 무언에 다짐을 수도 없이 거듭해 보았다.
장례식 있었던 날 종구를 만나려 했지만 주어진 여건이 넉넉지 않았다. 지난 삼우제 때에도 산소에 가는 종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종구 집으로 찾아가려니 험상궂은 종구 아버지가 그리도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상을 치르느라 경황(景況)이 없는 집에 불쑥 찾아가는 것도 그렇고 하여 주춤거렸다

초상을 치룬지 보름 정도가 지난 일요일 날이었다. 교회에 가면 종구를 자연스레 만날 것 같아 반닫이에서 새 옷을 꺼내 입고 면소제지에 있는 교회로 갔었다.
조금 가파른 언덕길에 올라 철길 건널목을 내려서니 목조건물에 검은 콜타르칠을 한 지서 건물이 썩 달갑지 않게 눈 안에 들어왔다. 지서 건물 옆 골목길 안쪽에 교회 십자가가 보였고 지서의 사이렌 탑과 높이가 거의 비슷한 나무 종탑(鐘塔)이 높다랗게 보였다.
좁다란 골목길을 걸어 교회 문 앞에 닿았다. 교회 울타리에 서 있는 탱자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어른 키만큼 높다랗게 보였다. 한두 번은 들어본 듯싶은 찬송가 소리가 높다란 탱자나무 울타리 밖으로 들려왔다.
종구를 만나고 싶은 생각에 교회 앞까지는 부지런히 갔는데 막상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갈 용기가 나질 않아 울타리 밖에서 얼마 동안 뻘쭘하게 기다렸다.

한참 후에 예배가 끝났는지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회 문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뒤를 따라 종구가 나오고 있었다.
교회 대문 앞에서 종구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야 종구야! 그때 일은 정말루 미안하다. 그리구 니네 엄마 그렇게 돌아가신 것 정말 마음 아프다. 그때 일은 내가 다 잘못했으니 우리 서로 풀구 사이좋게 지내자.”

진실 담긴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종구 앞에 다가서 말을 하였는데 종구는 아직도 비석골에서 일어났던 그 일에 분이 덜 풀린 것 같았다. 아니면 자기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가 덜 아물어 그러는지 입을 꾹 다문 채 쳐다보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냉정하게 자전거를 끌며 골목길로 걸어가고 있었다.
물론 그때의 그 상처가 아랫입술 가장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 분이 덜 풀렸겠지만 너무 냉정하게 돌아서는 종구를 더는 부를 수 없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고 말았다.

“야, 강상민! 너 교회에 나왔네? 무슨 일이냐? 교회를 다 나오구.”

교회 문밖을 나서던 석란이가 나를 보고 반가우면서도 다소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언제 왔는디? 왔으면 교회 안에 들어오지. 여기서 뭐하고 있었냐?”
“응, 그냥 종구 좀 볼려구 왔어.”
“종구 조금 전에 나왔는디 못 만났냐?”
“아니, 조금 전에 보았어. 그런디 내가 사과를 해두 안 받아주구 저 혼자 그냥 가번졌어.”
“그랬구나! 그래도 지금은 그렇지만 화가 좀 풀리구 나면 니가 한번 더 미안하다구 혀봐. 나두 종구헌티 한번 얘기해 볼 틴께 응?”
“알었어. 그렇게 해 볼게.”
“참! 그리구 오늘 나왔으니께 안에 들어가서 전도사님께 인사라도 하고 가. 전도사님이 네 말 많이 해, 참 아까운 학생이라구.”
“고마워! 그런디 오늘은 그냥 갈게. 집에 할 일두 좀 있고.”
“그럼 담에 교회 꼭 나와. 약속해, 알았지?”

석란이와 말을 끝내고 발걸음을 서둘러 골목길을 벗어나 동네로 가는 길을 바라보았다. 자전거 은빛 핸들을 손에 꼭 쥔 채 종구는 좀 멀리 달려가고 있어 하는 수 없이 무겁게 발길을 돌려야만했다.
높다랗게 돌들을 쌓은 지서 담을 끼고 돌았다. 약방 앞에 잠시 멈춰 집으로 가려고 하다가 개학도 며칠 남지 않아 머리를 깎으려고 이발소에 갔다.

“안녕하셨어유?”

이발소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아저씨에게 인사를 했다.

“응, 상민이 왔구나! 얼른 와라. 머리 깎을라구?”
“네, 그리구 돈은 우리 엄니가 난중에 주실 꺼래유.”
“응, 알았다. 어서 의자에 앉거라! 엄니는 잘 계시지?”

어른들이 앉는 의자라 우리들에게는 높이가 맞질 않았다. 이발소 아저씨가 나무 널판자를 의자 손잡이 양쪽에 걸쳐놓으시며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참, 형님 이애 잘 모르지유? 들메 사는 기태 성님 아들인디.”

이발소 안에는 마루 한쪽에 낯이 설은 아저씨 두 분이 장기를 두고 계셨고 그중 한 분이 말씀을 하셨다.

“뭐라구? 기태라면 등메골에 살다 지난해 여름에 물에 빠져 죽은 그 기태 말인감? 그럼 야가 그 기태 아들이란 말이여?”
“네 맞구만유. 기태 형님 아들인디 이놈이 공부는 엄청 잘해유. 아마 모르면 몰러두 지네 학교에서 몇 등 안에 들 걸유?”
“아, 말이사 바른말이지 기태는 좀 똑똑했는감? 그 난리 통에 잘못되서 아까운 사람 하나 잃었지만 ……. 그놈 참, 지 애비 닮아서 공부를 잘하는 감네.”
“그 형님 그해 그렇게 돌아가시구 형수가 참 고생이 심하지유. 읍내서 장사하느라구.”
“음, 그렇구먼. 참 그건 그렇구 며칠 전에 그 동네 초상(初喪)났었다며? 참 뭔 사람이 그리 허망하게 죽었디야, 나는 말로만 들었지만 그러니 살아 있는 게 산 게 아니여. 안 그런감?”
“그러게유. 참, 사람 목숨 허무하지유!”

이발기(理髮器)로 머릴 깎으시면서 아저씨가 가늘게 한숨을 내쉬며 말씀하셨다.

두 분 어른들의 주고받으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하얀 광목(廣木)천을 목에 두르고 두 분이 나누시는 이야기를 귀 기우려 듣고 있었다.
짧게 깎여지는 머리를 앞에 걸려 있는 큰 거울로 보고 있으려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마치 소가 쟁기로 밭갈이를 하여 한쪽부터 골이 파이는 듯 보였다.
그것은 처해진 척박한 환경 속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스스럼없이 나오는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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