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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65 조회 : 1,714




잠에서 깨어나니 지난밤 잠자리에서 심하게 뒤척였는지 삼베 홑이불이 구겨진 채 뒤엉켜 있었다. 느슨하게 줄이 매어진 모기장 사이로 부엌에서 소리치시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큼직하게 들려왔다.

“야, 상민아! 얼른 일어나라, 학교에 가야지! 얼른 씻구 와 밥 먹게.”

뜨거운 보리밥 김 속에 함께 묻어오는 열무김치 냄새가 여름더위에 입맛을 썩 돋우지는 못했다. 그래도 맵싸하고 서근서근한 열무김치가 싫지도 않았으니 그것은 어머니의 정성에서 우러나는 손맛이 듬뿍 담겼기 때문이었다.

봄을 넘겨 여름이 되자 지난해 가을에 담가놓았던 김장김치가 바닥을 드러냈다. 김장김치는 동네 집집마다 겨울을 날 유일한 양식이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김장김치를 넉넉하게 담갔지만 그 김치가 밥상에 반찬으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었다.
찬밥에 섞어 밥을 볶아 먹기도 했다. 그리고 형편이 어려운 집들은 김치를 숭숭 썰어 넣고 죽을 끓여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그런 탓에 언제나 늦은 봄 무렵이면 김장김치가 다 떨어졌다. 텃밭에 상추와 쑥갓이 있다고 해도 몇 차례 된장에 쌈을 싸 먹을 정도였지 근본적인 반찬이 되질 못했다.
그래서 가을 무배추가 어느 정도 자랄 때까지 봄과 가을 사이를 이어 주는 김칫거리로 초여름 입맛을 상큼하게 돋워주는 열무를 심었다. ‘열무’라는 말은 ‘여린 무’라는 뜻을 담은 ‘어린 무’에서 유래된 말이라는 것을 그 후 세월이 한참은 흘러 고등학교 때 알게 되었다.

방문을 열고 쪽마루에 내려서려니 아침햇살에 드문드문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는 포도송이들이 얼굴이 간지러운지 잎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마당에는 싸움을 잘하는 수탉 한 마리가 흰색 그리고 붉은색의 암탉 두 마리와 한데 어울려 한가로이 놀고 있었다.
울 너머 동구 밖 개울가에는 소먹이를 하려는지 쇠꼴을 베어 바지게에 한 짐 가득지고 가시는 동네 순아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먼 듯싶은 주막집에는 이른 아침 일찍 서둘러 읍내에 볼일을 보러 가려는지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해끄무레하게 보였다.

한 달 여 동안 그리 자유분방하게 뛰놀다가 개학이라고 학교에 가려하니 조금은 서운한 듯싶었다. 책보자기를 챙기려는데 어머니가 언제 깎아 놓으셨는지 예쁘게 잘 깎여진 연필이 필통 속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여름내 그리 한산하게만 보이던 마을에서 학교로 이어지는 개울 둑길이 방학을 마쳐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들로 조금씩 채워졌다. 종구가 자전거를 타고 으스대며 학교로 향하고 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길을 비켜주려 비좁은 길 양옆으로 물러섰다. 그 뒤를 바짝 따라 옥순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책보자기 끈을 어깨에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멋모르는 검둥이도 함께 따라나서려고 텃밭 끄트머리까지 따라왔다. 얼른 집으로 가라며 소릴 치니 그제야 끙끙대며 되돌아가고 있었다.

어른 키보다 훨씬 더 큰 측백나무 울타리를 반쯤 돌아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아침조회를 기다리는 전 학년의 크고 작은 남녀 학생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국기게양대 앞 화단가에는 머리를 잔뜩 숙인 해바라기가 우리들을 반기는 듯했다. 넓은 운동장에 방학동안 못 보았던 반가운 친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책보자기를 놓아두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교실 한 곳의 석란이 책상을 둘러싸고 몇몇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석란이가 동그랗게 생긴 물건의 홈 안에 연필을 밀어 넣어 돌리며 연필을 깎고 있었다.
우리들은 저마다 처음 보는 물건이라 모두 신기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석란이는 서울 사는 삼촌이 선물로 주신 것이라며 자랑을 잔뜩 늘어놓았다. 그리고 아이들은 서로 자기 연필을 먼저 깎아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교실 문을 열고 운동장으로 나오니 자전거를 타고 오시는 담임선생님이 교문 안으로 들어오시고 있었다. 다른 반 선생님들도 교무실을 향해 걷고 있었다. 관사를 내려서는 돌계단에는 앞머리에 머리숱이 없어 조금 반질거리는 교장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얼굴이 잘생겨 모든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은 1학년 2반 담임 여선생님의 얼굴도 보였다. 그리고 우리 반 양조장집 아들 상영이의 큰형과 약혼을 했다는 소문이 온 면내에 파다하게 난 검은 뿔테안경을 낀 3학년 1반 담임을 맡은 여선생님도 눈에 띄었다.

조례시간에 선생님이 좀 키가 큰 낯선 여학생 한 명을 데리고 교실로 들어오셔서 우리들에게 소개를 했다. 학교일을 맡아하시는 양씨아저씨의 조카인 양영선이라고 했다. 멀리 서울에서 우리 학교로 전학을 왔다. 자기 아버지는 서울에서 인쇄소에 다니신다고 했다. 그리고 그 후에 알게 되었지만 무슨 이유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머니 없이 홀아버지 밑에서 외롭게 자란 아이였다.
교단 위에서 영선이가 인사를 마치자 서먹한 분위기를 돌리려는지 선생님은 영선이에게 노래를 하나 시키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영선이는 부끄러움 하나 없이 노래를 불러 우리들의 관심을 모았다.

‘팅클팅클 리들 스타’라는 노래로 우리말로 번역하면 ‘반짝반짝 작은 별’ 이라는 노래였다. 세상 태어나 처음 들어보는 뜻 모를 영어 노래를 그리 잘 불렀다. 우리들 모두는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박수를 쳐주었다.
그중에 석란이가 박수를 제일 크게 쳐주는 듯했다. 아마도 석란이의 속마음은 서울이라는 큰 도회지에서 살다온 처음 보는 학생에 대한 호기심 때문인 것 같았다. 그리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반반 정도인 것 같았다.
생소한 서울 말씨에 피부가 뽀얀 만화속의 공주 같은 그런 모습의 영선이는 전학 온 날부터 반에서 모든 아이들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는 자기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서울 이야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줬다. 어찌도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잘하는지 쉬는 시간만 되면 아이들이 영선이의 주위로 자연스럽게 몰려들었다. 우리들 모두는 처음 들어보는 서울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에는 정말 사람도 많이 살고 집들도 많고 자동차, 버스도 수없이 다니며 전깃줄에 매달려 가는 전차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옛날 임금님이 살던 궁궐도 있어 그 집의 크기가 어마어마하다고 말해 줬다.
또한 창경원(지금의 창경궁) 동물원에는 호랑이, 사자, 원숭이와 코끼리도 있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그곳엔 봄에 벚꽃이 만발하여 밤 벚꽃놀이를 한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교무실에 걸려 있는 사진 속에 이승만 대통령도 직접 보았다는 얘기를 열심히 하여 모든 아이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반 아이들은 신기한 눈빛으로 이야기를 들으며 어쩌다 한두 명은 영선이 말이 잘 믿기지 않은지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날마다 우리 동네 앞을 지나 목포로 가는 증기기관차가 맨 처음 출발하는 곳이 서울역이었다. 그리고 남산과 한강철교, 그리고 덕수궁 등의 외우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곳과 세상에 물건이란 물건은 다 있다고 하는 백화점 얘기도 해주었다.
그렇게 열심히 자랑을 늘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속으로 서울이라는 곳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상을 해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말을 하고 있는 영선이를 바라보니 마치 신비한 나라에서 온 아이처럼 느껴졌다.
언젠가는 공부 잘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면 어머니와 함께 꼭 서울에 구경을 한번 가보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선생님이 2학기부터 주산을 배운다고 주판을 가져오라고 하셨다. 더불어 사친회비 밀린 사람들은 꼭 납부하라고 말씀하셨다. 개학 첫날이라 방학 과제물을 제출하고 교실 청소와 주변 운동장 정리를 하여 오전 수업만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개울가에 다다르니 동네에 사는 동생이 뭔지 모르게 울고만 있어 물어보았다. 물놀이를 하다 그만 고무신을 물속에 빠트려 깊은 곳으로 떠내려갔다고 하면서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얼른 옷을 홀딱 벗고 물속으로 들어가 한참동안 물속을 이리저리 헤치며 살펴보았다. 엄마 후 잃어버렸던 신발 한 짝을 찾아들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였다. 발가벗은 내 모습을 보고 놀라 부끄러운 듯 옥순이가 다가오지 못하고 머리를 돌려 멈칫거렸다.

“야, 옥순아! 빨랑 옷 입을랑께 절대루 오지 말구 거기 있어.”

말을 마치기 무섭게 얼른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귀에 들어간 물을 빼내려고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이고 껑충껑충 뛰는데 옥순이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야, 옥순아! 서울서 온 그 애 무지허게 똑똑하구 이쁘더라. 석란이보다 훨씬 낫던디?”
“뭐라구? 너 석란이가 그 말 들으면 어쩔라구 그러냐?”
“뭘 어쩌니? 이쁜 걸 이쁘다구 하는디, 뭐시 잘못이냐?”
“하긴 그렇지. 그리구 서울 살아서 그런지 아는 것두 많고 말도 참 잘하더라.”
“나는 그 애가 부른 그 노래 참 듣기 좋더라. 내용은 모르지만.”
“응, 그건 서울 살게 되면 그런 노래 다 배우게 되는가 보더라.”
“누가 그러던디? 서울에 살게 되면 그런 노래 다 배운다구.”
“석란이가 그러더라. 자기네 사촌 언니도 서울 사는데 그런 노래 부를 줄 안다구 하던디?”

석란이가 그런 말을 했다는 말에 마음속으로 석란이가 영선이를 시기내지는 질투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지치지도 않는지 매미는 감나무 위에서 그리도 짜증스레 울어댔다. 마루위에는 닭들이 여기저기 볼일을 보았는지 지저분해 짜증이 났다. 마루에 흐트러진 닭똥을 치우면서 닭들을 노려보았다.
울타리 그늘진 곳에 발로 땅을 후벼 파고 둥지를 만들어 쉬고 있는 듯했다. 태연하게 졸고 있는 모습이 너무 얄미워 냅다 큰소리치며 싸리 빗자루를 내던졌다. 그러자 깜짝 놀란 듯 후다닥 뒤뜰로 줄달음쳐 달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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