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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68 조회 : 1,744




장마 끝이라 그런지 더욱 기승을 부리는 날씨는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온 대지를 푹푹 삶아대고 있었다. 텃밭에서 잘 익어가는 참외를 둘러보고 있는데 땅 밑에서 차오르는 열기가 만만치 않았다.
뙤약볕이 사정없이 내리쪼이는 산릉선에 몸체 뒷부분 생김새가 사다리를 닮은 군용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띄었다. 이내 고막이 터질 듯 강한 굉음을 내며 넓은 들녘을 후려치듯 지나 앞마당을 가로질러 지났다.
그리고 반대 편 산릉선에 이내 닿을 것처럼 나직하게 날아가고 있었다. 잠시 후 점점 작아지는 모습으로 동쪽 하늘가 구름 속으로 느슨하게 사라졌다.
비행기가 남긴 굉음에 귓속이 먹먹해져 한참을 마당에 멍하니 서 있었다.

비행기 소리에 놀란 듯 토방에 앉아 있던 검둥이가 마당가로 성급하게 뛰쳐나왔다. 비행기가 스쳐 지나간 하늘을 향해 머릴 들어 마구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리 줄기차게 울어대던 매미들도 울음을 뚝 멈췄다.

모처럼만에 영선이가 옥순네 집에 놀러 온다고 하여 옥순이네 집으로 가려고 하니 어머니한테서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사람의 도리’가 생각났다. 옥순이와 아무리 허물없는 친구 사이라고 해도 옥순이네 집에 그냥 가려고 하니 내 딴엔 좀 그랬다.
빈손으로 갈 수 없어 텃밭에서 잘 익은 노란 참외와 개구리참외를 몇 개 따서 새끼줄로 매듭지어 짠 망태기 속에 넣었다. 그리고 마루 한쪽 그늘진 곳에 볏짚 망태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마음속으로는 영선이를 은근히 기다리며 학교로 향하는 둑길에 눈을 모아 영선이가 우리 마을로 오는가 싶어 몇 번을 반복하여 바라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큼 흐른 후에 영선이가 마을 동구 밖 나들목에 모습을 보인 것은 정오를 알리는 지서의 사이렌소리가 울릴 때쯤이었다.
기다림 끝에 모습을 보인 영선이가 그리도 반갑기만 했다. 그즈음에 목포로 향하는 완행열차가 마을 앞을 스쳐 지난 직후였다.

조금 멀리 마을 앞 둥구나무 밑에서 기다리던 옥순이가 영선이를 보았는지 뛰어가는 모습이 언덕 아래로 보였다. 거의 같은 무렵 동네 골목길을 빠져나와 큰길로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 교회에 가는 종구의 모습도 멀찍하게 보였다.
옥순이와 영선이가 함께 마을 골목길로 모습을 감춘 후 망태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집을 나서 동네로 향했다. 그저 멋대가리 없이 따라오려고만 하는 검둥이를 소리쳐 떼어 놓고 마을로 향했다.

동네 골목길로 접어들자 자전거 짐받이 위에 얼음과자가 담긴 나무통을 실은 아이스케키 장사를 하는 아저씨 모습이 눈에 띄었다. 짐자전거에 실은 빈병들이 서로 뒤엉켜 부딪혀 ‘달카당달카당’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나보다 얼마만큼 앞서가던 얼음과자 장수 아저씨가 골목길 모퉁이를 지나 방앗간 앞 텃마당에 멈춰 섰다. 삼베 반바지에 밀짚모자를 눌러쓴 아저씨가 수건을 목에 두르신 채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으려나 ‘달고 시원한 얼음과자’ 라고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우물가를 지나 대나무로 엮어 워낭을 달아놓은 옥순네 대문 앞에 닿았다. 여러 해를 묵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난 감나무 가지에 달린 감들이 여법 알이 굵어가고 있었다.
흙 담장 안에는 아직은 덜 익어 푸릇한 포도송이가 널따란 잎 사이로 드문드문 보였다.

마당에 들어서니 마루에 앉아 있던 옥순이와 영선이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부엌에서 밥을 하시던 옥순이 어머니가 부엌문 밖으로 얼굴을 내보이시며 반가우신 듯 말씀을 건네셨다.

“상민이 왔구나, 덥지? 얼른 마루에 앉거라. 내가 금방 밥 해줄 틴게.”
“네, 안녕하셨어유?”

인사를 끝내고 조금은 멋쩍게 어깨에 둘러멘 망태기를 옥순이 어머니에게 드리는데 옥순이 어머니가 말씀을 이으셨다.

“이거 참외 아니냐? 뭘 이런 걸 다 가지고 오냐? 너나 먹지 않구.”

그러자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옥순이가 입을 쫑긋하게 모아 말을 했다.

“너 오늘 웬 일이냐? 영선이 땜시 참외 갖구 왔지? 평생 가도 나헌티는 먹으라구 한 개도 안 따주면서.”

그런 옥순이 말에 얼굴이 갑자기 확 달아올라 주체 못할 정도로 부끄럽기만 했다. 마루에 올라앉아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활발한 성격처럼 영선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상민아 너희 집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져 있니?”
“응, 그렇지만 얼마 안 멀어 뛰어가면 금방 가.”
“집에는 누구누구 있니? 형하고 누나도 있어?”
“아니, 나 혼자야! 그리구 울 엄마랑 같이 둘이서 살아.”
“응 그렇구나, 아빠는?”
“아빠 없어. 돌아가셨어.”

조금은 힘들게 말하는 내 표정을 보던 옥순이가 팔꿈치로 영선이 몸을 가볍게 건드리며 말을 거들었다.

“영선아, 상민이 아버지는 군인이셨는디 전쟁터에서 용감하게 싸우시다 돌아가셨어.”

전쟁으로 두 다리를 잃어버린 것은 맞지만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신 것은 아니었다. 그리 비참하게 삶을 마치신 내 아버지에 대한 예의를 갖춰주는 옥순이가 더없이 고마웠다.
그렇게 말을 하는 옥순이도 자기 아빠에 대한 아픔이 떠오르는지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를 어렴풋이 눈치 챈 영선이가 서둘러 다른 쪽으로 얼른 말을 돌렸다.

얼마 후 옥순이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상을 들고 마루로 오시면서 말씀하셨다.

“그나저나 배들 고프겠다. 어여들 먹어라. 그리구 학상은 서울서 살다 와서 잘 모르긋지만 시골은 사능 게 다 이래. 밥두 허술헌디 건건이까장 없어서 어쩐다냐? 이해하고 먹어라.”
“아니에요, 저도 삼촌 집에서 아무거나 잘 먹어요.”
“음, 그렇다면 다행이구.”

밥상 위에는 찬그릇이 가득 채워져 쌀 반 보리 반에 강낭콩을 섞어 넣은 밥이 먹음직스러웠고 오이와 땡감장아찌가 입맛에 맞았다. 밥 위에 얹어 찐 황세기(황강달이)는 집에서 너무 많이 먹은 탓인지 손이 잘 가질 않았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정성스레 해주신 밥을 배불리 먹고 난 우리들은 대문 밖 감나무에서 우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뒤뜰 장독대로 자리를 옮겼다. 곱게 얼굴을 들고 있는 꽃들을 바라보며 영선이는 신이 난 듯 봉숭아꽃잎을 조심스레 만지면서 말을 했다.

“야, 상민아! 나 너희 집에도 놀러가고 싶은데 가도 되니?”

너무 갑자기 듣는 질문이었다. 솔직히 그보다는 사는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열악한 환경을 보여주기 싫은 마음에 대답을 못했다.
잠시 주춤거리자 옆에 서 있던 옥순이는 내 속마음을 알고 있어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꾸만 우물쭈물하는 그런 내 모습이 답답했는지 영선이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힘을 줘 말을 했다.

“상민아, 내말 똑바로 들어. 나도 엄마 없이 우리 아빠랑 어렵게 살았어, 어쩜 너만큼은 고생을 했는지도 몰라, 그리고 진실한 친구는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거야, 내말 맞지?”

너무 조리 있고 씩씩하게 자기표현을 하는 영선이의 말에 더욱 기가 눌려 더 이상 말을 못하고 멍하니 서 있고 말았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옥순이가 거들며 말을 했다.

“그래 영선이 말대루 우린 한반 친구니께 서로 흉을 안 보면 되는 거여. 그러니께 니네 집에 같이 가자. 정 집에 들어가기 싫으면 참외밭에서 놀다가 더우면 옆에 동근이네 원두막에서 놀면 되지 뭐.”

그런 두 사람의 말에 동의는 하면서도 집으로 함께 가는 것이 마음속으로는 영 내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같은 반 친구에게 구차한 내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참으로 싫었다.
그러나 옥순이의 말에 힘을 얻어 함께 집으로 가려고 옥순네 집 대문 밖을 나섰다.

우리들은 우물가를 지나 한낮 햇살이 따끔거리는 동네 골목길을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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