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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6 조회 : 2,428




전쟁 속에 하루하루가 예측키 어려울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로 인해 국토는 망종인 놈들의 더러운 손에 의해 할퀴여 이미 돌이킬 수 없게 페허되기 시작했다.
그런 혼란 속에 어정쩡하게 흐르는 세월이 칠월의 중순에 접어들어 잠시 다리쉼을 하고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매화산을 내려다보고 있는 하늘은 비가 그친 뒤라 그런지 짙디짙은 청잣빛으로 흠뻑 물들어 있었다.
그하늘을 바라보는 눈이 잔뜩 시려와 마음까지 뻬앗기고 말았다.

마을 앞 야트막한 등메산도 온통 검푸른 초록빛으로 한여름의 자태를 여실히 드러내 짙게 물들고 있었다. 산자락엔 수많은 싸리나무가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울창한 숲이 작열하는 여름 햇살의 열기로 짙푸른 나뭇잎들이 저마다 번득거려 계절이 한여름에 닿았음을 실감하게 하였다

오솔길이 울창한 숲을 양쪽으로 가르며 야트막한 고갯마루까지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었다.
선연하게 바라보이는 좁다란 길이 나름 아늑한 정취를 가득 자아냈다.

산자락 에는 가무스름한 크고 작은 바위들이 적당한 조화를 이뤄 듬성듬성 누워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바라보기에 나름 듬직하게 보였다.
그 바위 들 사이사이로 키 작은 소나무들이 술래잡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린 소나무들이 다복다복 자리를 잡아 그 푸른 모습들이 참으로 아담스럽게 보였다.

마을 앞 등메산은 그리 높지도 않으면서 아기자기한 자태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언제나 그 자리를 지켜 들메마을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채운들녘은 씨줄과 날줄이 정교하게 조화를 이루어 놓은 바둑판처럼 질서있게 보였다.
수많은 논배미들이 검푸르스름한 물결을 이뤄 날로 짙어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푸르스름한 벼 이삭들의 물결이 탁 트인 넓디너른 들녘을 꽉 채우고 그 끝이 저 멀리 지평선까지 맞닿아 있었다.
그런 풍만함이 가득 서려 뒤늦게 찾아드는 불청객 태풍만 피해 별다른 이변이 없으면 지난해에 이어 틀림없는 풍년인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커다란 기대감에 젖었던 마을 사람들 모두를 절망에 빠트리고 말았다.
바로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패륜적인 전쟁 때문이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소박한 농부들의 작은 꿈마저 여지없이 짓밟히고 말았다.

그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천혜의 터에서 땀으로 일궈 놓은 피 같은 논과 밭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다.
그리고 가족들과 함께 한치 앞을 가늠키 어려운 전시 상황에서 목숨을 건져야만 했었다.
그 모두를 그렇게 버릴 수밖에 없어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고향을 버려야만 했다.
그리고 기약 없는 멀고 먼 피난길을 걷고 또 걸어 떠나고야 말았다.
그런 뼈 마디마디가 시려오고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함을 그 누가 헤아려 달래줄 것인가 답을 구할 길이 전혀 없었다.

마을 앞에 소곳하게 있는 등메산과 넓은 채운 들녘은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인 큰 버팀목으로 아주 먼 옛날부터 자리매김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옛날 우리에 선조 때부터 시작하여 우리들 모두까지 그런 지대한 관계가 자연스럽게 맺어진 것 같았다.

그런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언의 교류 속에 그렇게 이루어진 것 같이 느끼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

등메산과 널따란 들녘은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가슴 아픈 사정을 알고도 모르는 채 하는 지 아니면 정녕 모르기에 아는 채 하는 것인지 그 속내를 알 수가 없었다.

어쩜 진작부터 동네 사람들 그 누구도 모르게 그 둘만이 암암리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니 그리도 입을 꽉 다물어 아주 인색할 정도로 한마디 말이 없었다.
그러므로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지도 않았나 보다.

처해진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러 극에 달하자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생각에 따라 시차를 두고 점차적으로 피난을 떠나고 말았다.
그로 인해 군데군데 멀쩡했던 집들의 온기가 사라져 썰렁하기만 했다.

아직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동네 사람들의 얼굴 표정들까지 어두워 질대로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을 분위기가 말할 수 없이 싸늘하다 못해 걷잡을 수 없게 음산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하루를 거르지 않고 오르고 내려 온 동네의 지축을 흔들며 기적소리를 울리던 증기관차가 얼마 전부터 운행을 멈췄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생활에 필요한 시간까지도 얼추 알려주었던 증기기관차였다.
그런 증기기관차마저 마을 앞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자 가뜩이나 썰렁한 마을 분위기를 더 흐려 놓아 마냥 을씨년스러웠다.

그런가 하면 면내에 단 하나뿐인 새터 마을에 있는 국민학교마저 인공난리에 학교가 정상적인 수업을 할 수 없어 임시적인 휴교를 하여 문을 닫았다.
그로 인해 언제나 학교로 향하는 동네 아이들이 걸어가던 개울 둑길도 벌써부터 아이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리 모두 다 정신없이 피난을 떠나 그나마 이따금씩 볼일을 보려고 마을을 왕래하던 타 동네 사람들의 발길마저 뚝 멈추고 말았다.

어디 그뿐만이 아니었으니 논산과 강경의 두 읍내를 이어주던 신작로에 차량이 보이질 않아 그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제반사정이 그렇다 보니 가뜩이나 외떨어져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마을이 자연스럽게 바깥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되어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제반 상황이 그렇게 다급해지자 내 어머니께서도 노쇠하신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와 함께 동네 사람들을 따라 피란길에 나서려고 진작부터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 내 아버지의 의사는 너무도 완강했었다. 그런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비단 그때 뿐 만이 아니라 평상시에도 뜻을 같이하는 외부 사람들 하고만 더욱 친밀하게 어울리셨다.
그래서 가정과 가족에게는 그리 소홀했었다.

그래서 내 외할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사시는 내 아버지가 영 탐탁치 않으셨는지 푸념 삼아 이따금씩 이렇게 말씀하셨다.

“참 으찌 보면 타고난 한량인 긋 같긴 헌디, 또 으찌보면 지 실속기두 못 챙기는 틀림읍는 팔불출이란 말여. 그러니 우짤라구 저리 사는 근지 내사 알다가두 모르긋구먼 그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살림을 꾸려나가는 힘든 일은 늘 어머니 혼자만의 몫이었다.

당시 우리 식구들이 살고 있던 집은 다른 집들에 비해 지붕이 유난스레 낮은 초가집이었다.
그래도 내 아버지의 이름 석자를 면내 어디에 내놔도 체면을 유지할 정도는 되는 집안 이었다.

그러나 속사정은 그리 여유롭지도 못했다.
실제로는 앞 들녘에 있는 논 서마지기와 그 옆자락에 단작맞게 붙어 있는 두 고랑의 단작스런 밭뙈기가 전부였다.

살고 있는 초가집은 물론이려니와 들녘에 있는 논 서마지기 그것마저도 외할아버지께서 내 어머니에게 물려주신 유일한 유산이었다.

그런데도 내 아버지께서는 농사일을 외면하셔 그 고된 일을 어머니 혼자서 힘들게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농사일에 힘이드시고 돈문제로 아버지와 다투고 나시면 아버지께서 출타를 하시여 집에 계시지 않을 때를 골라 푸념 아닌 푸념을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나를 향해 들으라는 것처럼 늘상 볼멘소리로 이렇게 말씀을 하시였다.

"아이구 참말루 으쩔라구 저러구 댕기는지 도무지 알 수가 읍다,그런다구 돈이 나와 밥이 생기는 긋두 아니구 허구 헌날 지 지집은 쎄 빠지게 농사 짖는디 저리 태평허게 사니 참 누가 뭐라구 혀두 타고 난 상팔자가 맞는 긋 같다,그럼 뭣헌다냐 그저 집만 번드르허지 당장에 먹구 살 때꺼리 극정 하는 내 문들러 터지는 속을 알랑가 모르 긋다.남들이사 팔자 좋아서리 츠가살이 헌다구 생각헐련지는 몰라두 말이사 바른 말이지 껍데기만 번지르허면 뭣헌다냐 허풍세기지 뭐,아니 그러구 보닝깨 빛 좋은 개살구지 뭐시긋냐 않 그러냐"

나는 그 '빛 좋은 개살구' 란 말을 내 어머니로 부터 귀가 쟁쟁하게 하두 들어서 참으로 제일 듣기 싫은 소리였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느그 애비가 나 헌티 장가 올 때 으짰는 줄 알기나 허냐, 그저 가진거시라구는 달랑 부랄 두 쪽에 깜장 꼬무줄 는 광목 빤쓰 한 개 입구 왔다' 는 말이였다.

집안 사정이 그럴진데 내 아버지께서 밖에서는 그리 죽고 못살 정도로 교분을 나누웠셨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로부터 얼마만큼의 신뢰를 쌓아 찬사를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허나 삶을 지탱하는 면에서 한 여자의 남편과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는 그토록 무책임할 수가 없었다.

아니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인공난리가 나기 몇 해 전에 해를 거듭한 가뭄에 보릿고개까지 찾아왔었다.
당장에 끼닛거리가 간곳없어도 그런 절박감보다는 그 분들과의 사회적 교류를 더욱 중요시 하며 살아오신 분이시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내 외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겉만 번드르했지 틀림없는 팔불출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였다.
늘 밤이 이슥해야 면소재지에서 볼일을 다보시고 집으로 돌아 오시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뭔 일인지 그날따라 서쪽 강경읍내 옥녀봉에 노을이 질 무렵인 초저녘에 집으로 일찌감치 돌아 오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그래도 여뉘 날보다 일찍 귀가 하신 아버지를 그리 좋아하셨다.
그런 이유였는지 여름 내 파리가 들붙지 못하게 쫒으시며 햇볕에 잘 말려 꾸들꾸들한 서대를 석쇠에 구워 밥상을 차려 드렸다.
그래서 아주 모처럼만 외조부님과 겸상을 하셨다.

그리고 그날따라 어머니께서도 무슨 작심을 하셨는지 부엌 설거지를 일찍 마치시고 방 안으로 들어 오셨다.

“아니, 기나저나 상민이 아부지는 무신 생각을 잡쉈는지 내사 잘은 모르것지만서두 다들 하나둘씩 이 인공난리를 피할라구 동네를 순번적으루 떠나번지구 있는디 나사 으짯으면 좋을랑가 모르것네유. 그러닌께 당신두 으짤란가 으디 한번 오장육부 시원허게 말을 혀보시유.”

참으로 너 나 할 것 없이 그토록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제가끔 하늘로부터 받고 태어난 목숨이라도 건져보려고 일구월심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아, 임자 맴을 내사 무엇땀시 모르긋는가? 허지만 딱 깨놓구 얘기혀서 내 맴은 그렇구먼. 나 혼자 살아보것다구 으찌 지금까장 인연을 맺고 살어온 동지들을 버릴 수 있것는감? 그려설라무네 나사 이렇게 말허면 듣는 임자 맴이 썩 좋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서두 으짤 수 읍네 그려. 그러닌께 구지 피난을 가고 싶으면 그 무시냐? 장인 어른 잘 모시구 싸릿재골 처남네 집으로 우선 가 있는 것이 좋을 것 같구먼 그려. 기나저나 대전두 지금 위태위태허니께 피난을 갈라고 쬐끔만치라도 맴먹었으믄 어여 서둘러 떠날 채비를 혀보는 게 좋것구먼 그려.”

그러자 흐릿한 등잔불빛이 마냥 갑갑하게 느껴지는 방 안에서 한숨을 크게 내쉰 어머니께서 말을 이으셨다.

“참말로 으찌 되앗든 지간이 당신헌티 와서 이자껏 살어왔는디 을매나 나라에 충성허고 친구들끼리 의리를 지킬런지는 내사 참말루 몰라두 내가 당신 말을 듣고 있을라니께 애간장이 다 타서 녹아내리는 것 같네유. 더군다나 세상 암것두 몰르구 그저 때 되면 배고프다고, 밥이나 달라고 졸라대는 저 어린것을 그러콤시롬 매정허게 떠나보낼려구 허는 당신의 맴을 나설랑 쪼금맨치도 이해헐 수가 없네유. 그란디 으짜것소. 당신이 구지구시 갈 수밖에 읍다고 허니 낸들 더 이상 무슨 수로 붙들갔소, 근디 한 가지 당신헌테 신신당부허는디 하늘이 준 단 하나 밖에 읍는 소중헌 목숨이니께 워떠튼지간에 조심허구 또 조심혀야 되유. 내 말 알어듣갔지유?”

내 어머니께서 그동안 살아오면서 오늘밤처럼 비장한 어투로 말한 적은 처음이었다.
나는 겉으로는 표현을 하지 못해도 안타까움이 마음 가득 차올랐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무어라 그에 대한 대답을 더 이상은 할 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 집안 사정이 참을 수 없게 답답하셨는지 바튼 기침을 하시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서둘러 겉옷을 걸쳐 입으시며 면소재지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았다.

그렇게 할 말도 다 하시지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말았다.
그 모습이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두 사람 간의 마지막 모습이 되고 말 것을 그 누구 하나도 예측하지 못했었다.

내 아버지께서는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 훨씬 이전 청년 시절부터‘대한청년단’의 열성단원으로 참여했었다.
그 단체는 이승만 정권 하에서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국민들을 계몽하여 국가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불온세력과 간첩들을 색출하여 관계기관에 적극 협조하는 아주 강성이 강한 우익단체였다.

그런 와중에 대전의 상황이 긴박해지자 국군은 조금 뒤로 물러서 병력을 제정비하여 금강에 방어전선을 구축하고 적과 일전을 벌리려고 했었다.

그런 가운데 면소재지에서는 일부 우익단체 인사들과 면내에 근무하는 공무원들, 지서에 근무하는 겨우 몇 안 되는 경찰관들과 의용소방대의 일부 대원들이 합세하여 놈들의 침략에 결사적으로 저항하려 했다.

물론 놈들에 비해 화력이나 전투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턱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아주 열약한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그들 모두는 국군이 금강에 방어진지를 구축한다는 소식에만 의존하려 하였다.
막강한 놈들의 화력을 막아내려고 생각하면서 아군 주력부대의 힘에 모든 것을 의존하려 했다.

맨 처음 내 어머니께서는 그토록 완강하게 버티시는 아버지와 인공난리가 끝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있을 각오를 하셨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피난길에 나서려 했다.
어머니께서는 전라도 운주 싸리재에 사시는 외삼촌댁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외할아버지에게 조금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신 대화의 내용과 앞으로의 문제들에 대하여 여쭙고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셨다.
그래서 피난길을 나서려고 피난 보따리를 주섬주섬 싸고 있었다.

그런데 피난을 가야 할 목적지가 전혀 없는 대다수의 동네 사람들과는 달리 우선 피할 수 있는 친척집이라도 있어 다행이었다.

그래서 다른 집들처럼 밥을 해먹을 솥단지와 잠을 잘 수 있는 이부자리를 거추장스럽게 굳이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우선 급한 대로 입고 벗을 수 있는 옷가지만 챙겨 놓고 날이 밝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날 밤 내내 나를 바라보시며 인민군과 싸우러 나가신 아버지에 대한 걱정을 옆에서 듣기에 심할 정도로 하셨다.

동네에서 그곳 작은 싸리재까지 오십여 리가 족히 되는 거리를 철없는 어린 나를 데리고 걸어서 가는 것도 힘든 일이었다.
그런데 병색이 짙어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신 외할아버지를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 모시고 나서려니 고생할 것은 물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런저런 걱정 끝에 답이 없어 그저 어린 나를 쳐다보시며 한숨만 쉬고 있으셨다.

그런 답답한 와중에 본격적인 여름 장마까지 겹쳐 날씨한질라 좋지 않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비가 한 이틀 잘 참아주었다.
그래서 조금은 근심을 덜어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이른 저녁부터 바람이 미친 듯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드디어 장대비가 사정없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피난길에 나서려고 짐 보따리까지 싸놓고 날이 밝기를 기다리며 잠을 설친 동네 사람들의 애간장을 태울 대로 태웠다.

그런데 오랜 세월 동안 한동네에서 그것도 바로 옆집에 머리를 맞대고 사는 집이있었다.
다른 집보다 유독 자별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집과 경계를 이루는 흙담장이 무너졌어도 두 집이 그냥 신경을 쓰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그 길로 스스럼없이 오가는 사이였다.
그런 옆집에 사시는 귀분이 어머니가 마음이 심란해서 잠이 안 오시나 저녁부터 마실을 오셨다.

장마 중이라 습하고 구질구질한데다 후덥지근한 날씨에 더위를 많이 느끼시는 것 같았다.귀분이 어머니가 부채질을 하시며 말씀하셨다.

“기나저나 너나 내나 다덜 난리통일랑 피해볼라구 그러는거 가튼디 상민네는 우짤라구 맴을 먹었능가 모르긋네, 우리 귀분이 아부지는 피난을 갈라구 허는건지 말라구 그러능가 꿀묵은 병어리 매냥 아즉까장 말 한자락이 읍스니 참 나사 알다가두 모를 일이구먼 그려. 그르닌께 이를 으찌허면 좋당가?”

“왜 아니래유. 지 맴두 아줌니허구 똑 같구먼 유. 으디 야덜 애비가 움직일라구 혀야 피난일랑 가보던지 말든지 헐 껀데 으짜면 좋을랑가 도통 모르것구만유.”

“참 그건 그렇구, 그 육실헐 놈들이 도대체 으디까장 처내려 왔디야? 글구 상민이 애비는 으뜩헐려구 저리 겁읍시 마구재비루 나댕기는지 증말루 알다가두 모를 일이여.”

“아이구 말두 마세유. 이날 이때까장 같이 살을 맞대구 살었지만, 그넘에 쇠심줄보다 더 찔긴 고집을 뭔 수루다가 막는대유. 하이구 지는유, 포기헌지 설차니 오래됐구먼유. 아, 죽어두 그렇게 사는 게 좋다구 쌍지팽이 짚구 나서는디 심읍는 여펜네가 뭘 으쩌것슈. 안 그리유 성님?”

그 이튿날, 우려했던 대로 대전이 괴뢰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자 절대적인 위기에 봉착한 군내 각 읍면을 지키고 있던 일부 애국심이 투철한 우익 단체 인사들이 각자 자신의 지역을 수호하기 위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날 자정을 좀 넘긴 무렵이었다.
면소재지를 수호하고 있던 그들의 짧은 머리로는 논산에서 강경까지 이어진 신작로를 이동수단으로 삼는 것이 교통에 편리했기 때문에 분명히 놈들이 탱크를 앞세워 그 길을 따라 침략을 감행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 결정적인 가장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고 말았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놈들은 논산 외곽 마을인 등화동을 거쳐 매화산을 넘어 공격을 했다.
그렇게 면소재지 뒤편으로 침투하여 임시적인 방어본부를 구축한 지서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집중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숙달된 그들의 조직적인 행동에 대항하기에는 참으로 역부족이었다.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무기라고 해봐야 일부 경찰공무원에게 지급된 미군이 쓰다 버리다시피 한 M1 소총이 주된 무기였다.
그리고 나머지 전투원들은 그저 쉽게 구할 수 있는 굵은 대나무를 꺾어 끝을 뾰족하게 다듬은 죽창과 소나무로 만든 몽둥이가 거의 전부였다.
그렇타 보니 그 모습이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보다 못할 정도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화력이나 수적으로 또는 전술 면에서도 열악한 아군은 결국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부는 교전 당시 놈들의 손에 사살되었다.
그나마 남은 인원은 도저히 대항할 능력이 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벼가 무성하게 자란 논으로 각자 혼비백산한 상태로 흩어져 숨고 말았다.

그때 내 아버지도 그들과 함께 논에 무성하게 우거진 벼를 헤치고 그사이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지서를 점령한 놈들에게 끝내는 발각되어 결국 허무하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 후 면사무소 창고에 놈들이 임시적으로 마련한 감옥 아닌 감옥에 강제로 수용되어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이 땅에 전쟁이 발발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겨우 이십 일이 지난 후였다.

바로 1950년 7월 17일 새벽 2시쯤이었다.

면소재지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던 병막 옆 우묵골에서 그 당시 살아남았던 우익 인사 두 분과 함께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리 극악무도한 놈들의 손에 비통하게 목숨을 잃으셨다.

그날 밤늦게서야 놈들이 처음에는 사상자의 연고를 찾아 시신을 처리하려 했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가장 무서운 천벌을 받아 마땅할 놈들은 다음 공격 목표인 강경읍내로 이동하기 바뻣다.
그리고 상부로 부터 지시를 못 받았다고 하면서 시신을
그 자리에 방치하고 말았다.
시신을 어떻게 수습하지도 못한 채 볏가마니를 뜯어서 기다랗게 만든 덮석으로 덮어 두었다.

때가 한여름인지라 시신은 급속도로 손상될 수밖에 없었다.
그다지 깊은 산속이 아니라 날짐승들과 맹금류들이 없었기에 더 이상 시신이 훼손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무더위 속에서 빠른 속도로 부패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살해된 시신들은 아주 악질적인 반동분자라 하여 시체마저도 쉽사리 돌려주지 않으려 했다.

왜냐하면 놈들이 선동 선전하기 위해 밥 먹듯이 거짓으로 그럴싸하게 내세우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일으켜 남한을 점령하는 이유가 철천지원수인 미제국주의자들로부터 압박과 설움을 받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혹시라도 그런 처참한 모습을 보고 지역민들이 동요되어 놈들에게 적개심을 가질까 하는 우려심에서 더욱 그랬다.

또 하나 다른 이유는 우익인사들이 놈들이 지향하는 사상과 판이하게 다르다 못해 놈들에게 투철한 적개심을 갖고 살아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더불어 우익인사들을 이 세상에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되는 적으로만 간주해 놈들 나름대로는 철저한 응징에 대상이자 처형을 감행할 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토록 몸서리쳐지는 전쟁 속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철천지원수인 잔인무도한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나에게서도 단 하나뿐인 내 아버지의 목숨을 그 무엇이라 형언키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게 빼앗아 가고 말았다.

그로 인해 얻어진 통한에 상처는 내 어린 시절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아푼 기억을 남기고 말았다.

물론 한시도 잊을 수 없는 처절한 상처였기에 영원히 치유될 수도 없었다.
언제나 고통 속에 혀를 깨무는 아픔을 평생 동안 가누며 살아야 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다.

그렇게 면소재지를 점령한 놈들은 그여세를 몰아 전북 이리를 거쳐 남원으로 공격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주력부대와 이곳 면소재지에서 합류하여 화력을 더욱 증강하였다.
그리고 남쪽으로 침공을 하던 중 중요거점인 경경 땅에
이르렀다.
강경경찰서를 목표로 삼아 16일 부터 18일 까지 연 3일 간에 걸처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자 목숨을 걸고 지역을 사수하려는 경찰관들이 강경천 둑을 방패 삼아 치열한 교전을 벌렸다.
그러나 끝내는 아군인 경찰관들이 중과부족으로 결국 비참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그 치열한 전투에서 당시 경찰서장이였던 정성봉을 비롯하여 경찰관 83명이 조국의 이름으로 안타깝게 순직하고 말았다.

애국애족에 정신이 투절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분들의 고귀하신 시신들은 그후 논산시 등화동 산에 있는 순국경찰관합동묘지에 안장되어 영면에 드셨다.

이에 우리 모두는 후세에 이르기까지 애국애족에 가득찬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높히 받들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조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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