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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69 조회 : 1,805




그동안 짜증나게 찌는 더위에 지쳐 그저 무덤덤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그러나 그 날만큼은 달랐다. 아마도 우리 마을로 놀러 온 영선이를 반갑게 만났기 때문인 것 같았다. 옥순이 어머니께서 차려주시는 점심밥을 배불리 먹고 나니 어느덧 하루의 해가 오전을 넘겨 오후로 접어들었다.
모진 낮 더위는 그 여세를 몰아 전형적인 여름 날씨답게 땅껍질을 더욱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땅에서 솟아나는 열기는 발에 걸친 고무신의 밑바닥조차 뜨겁게 했다.
골목길을 걷다보니 머리를 땅에 깊숙이 박은 깨진 사금파리 한 조각이 햇빛에 반사되어 조금은 눈이 시렸다.

뜨거운 날씨 탓인지 오고가는 발길이 뜸한 좁다란 마을 골목길이 확 트여 훤히 내다보였다. 한 덩이 솜털구름이 높다란 가죽나무를 가볍게 지나 잘 달구어진 방앗간 함석지붕 위를 여유롭게 넘고 있었다.
방앗간에서는 뒤늦게 뉘 집 보리방아를 찧고 있는지 발동기소리가 요란스러워 한낮 더위를 부추기는 듯했다.
골목길 중간쯤에 있는 동네 구장댁 담 너머로 꽃 모양이 무궁화를 닮은 부용화가 우리들을 향해 다정하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비스듬히 열린 대문 안으로 널따란 마루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낮잠 자는 어린 손자가 그리도 귀엽기만 하신지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텃밭 가장자리 두엄 가에서는 거름냄새가 대문 밖까지 물씬 풍겨왔다. 흙 담장이 유난스레 높은 구장댁 울타리 모퉁이 돼지우리에서는 검정돼지가 꿀꿀거렸다.
넓은 마루위에는 저녁나절에 구호대상자인 가구들에게 나눠 줄 밀가루 포대가 쌓여 있었다. 안방 문 앞 마루엔 구장댁 아주머니가 할머니와 옥수수를 드시며 처음 보는 영선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계셨다.

길 건너 대문조차 없는 경수아저씨네 집엔 경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들녘 밭에 가셨나 추녀 끝까지 검게 그을린 굴뚝만 외롭게 보였다. 텅 빈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이 소슬바람에 가볍게 너풀거려 홀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좁다란 고샅길에는 저도 더위에 지친 듯 혀를 앞으로 내밀어 숨을 가쁘게 내몰아 쉬는 누렁이가 제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와 동구 밖 둥구나무 밑에 이르렀다. 널따랗게 깔린 멍석위에 나이 드신 노인 분들이 장죽을 입에 물어 정담을 나누고 계셨다.
그리고 동네 아저씨 두 분이 열심히 장기를 두고 계셔 둔탁한 장기 알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쪽 옆에선 장기소리가 귀에 거슬려 잠이 잘 안 오시는지 아저씨 한분이 무엇이라 싫지 않은 소리로 궁시렁거리며 보릿짚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다시금 누우셨다.

거침없이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으며 잠시 쉬어 있으려니 예배가 끝났는지 나들목에 종구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이 보였다. 동구 밖엔 읍내에 다녀오시는지 잘 다린 삼베 바지에 저고리를 입으시고 손부채를 부치시며 걸어오시는 영택이 아버지 모습도 보였다.

이윽고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온 종구가 둥구나무 밑에 닿았다. 내가 옆에 있어 그러는지 둥구나무 밑으로 오지도 않고 자전거 위에 올라탄 채 옥순이를 향하여 말을 건넸다.

“야, 옥순아! 너 오늘 교회에 왜 안 나왔냐? 전도사님이 몇 번을 묻던디.”
“응, 갈려구 했는디 친구가 놀러 와서 못 갔어.”
“그래두 주일은 지켜야지. 안 그러냐?”
“알았어, 내가 전도사님께 담에 말할게.”
“그건 니 맘대로 혀!”

조금은 깐죽거리는 투로 말을 마치고 서둘러 동네 골목길로 달려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영선이가 옥순이에게 물었다.

“야, 옥순아! 쟤는 누구니? 학교에서 본 듯하긴 한데.”
“응, 종구라구 우리와 같은 학년 2반 아이여.근디 공부는 지랄나게 못헌다 ”
“응, 그렇구나! 그런데 좀 거만스럽다. 하는 말투하고 행동도 좀 그렇게 보인다.”
“그래?”

옥순이가 대답을 하며 살짝 웃는 모습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나도 의미 있는 웃음을 지었다.

개울가엔 한낮 더위에 잎들이 축 늘어진 버드나무 위를 몇 마리 말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고
있었다. 배꼽을 잔뜩 드러낸 동네 아이들은 말잠자리를 잡으려 그리도 애를 썼다.
긴 싸리나무 가지 끝에 실로 매어 단 암컷 말잠자리를 하늘을 향해 날렸다. 그리고 수컷 잠자리를 잡으려고 ‘애부렁, 애부렁, 애부렁 …….’ 하며 잠자리 꼬리 끝을 따라 달려가고 있었다. 그런 꾸밈없는 동생들의 모습이 보기에 매우 좋았다.

동네 어귀 거북바위를 지나 철길 앞 방죽에 닿았다. 어미 오리 뒤를 따라 작은 오리 새끼 몇 마리가 자맥질을 하는 모습이 몹시 귀여워 우리들 모두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웃으며 바라보았다.
마을로부터 떨어진 외딴집 기현이네 마당엔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벗겨진 왕골껍질을 줄에 널어 말리고 있었다.
철길 건너 동근이네 참외밭 원두막엔 면소재지에서 참외를 사러 왔는지 아주머니 두 분이 원두막 위에 앉아 있었다. 밭에서 참외를 골라 따시던 동근이 아버지를 보며 옥순이가 인사를 드리자 동근이 아버지가 말씀을 하셨다.

“응, 상민이네 집에 놀러 가냐? 그리구 옆에 있는 애는 누구냐? 첨 보는디.”
“네, 우리 반 친군데 상민네 집에 같이 가는 길예유.”
“응, 그렇구나! 그놈 참 참하게 생겼네.”

동근이 아버지께서 처음 보는 영선이에게 하시는 말씀이 듣기에 좋았다. 원두막에서 조금 더 걸어 우리 집 앞 텃밭에 이르자 영선이가 말을 했다.

“와, 참외 좀 봐. 어머, 수박도 있네!”
“영선아! 너 수박 좋아하냐 내가 따 줄까?”
“응, 나 수박 많이 좋아해.”
“그럼, 이따가 집에 갈 때 따 줄게.”
“그럼 나는?”

그러자 옥순이가 시새움 하는 양 부루퉁한 얼굴로 말을 했다. 나는 그저 멋쩍어 선 채로 웃고만 있었다.
그때 저만치서 우릴 보았는지 검둥이가 한달음에 달려와 꼬릴 흔들어 반겨주었다.

“어여 들어와, 이렇게 못 살지만 절대루 흉은 보지 말어.”
“야, 흉은 뭔 놈에 흉을 보냐? 친구끼리.”

부끄러워하는 나를 의식했는지 옥순이가 말을 하며 영선이와 함께 쪽마루에 앉았다. 나는 활짝 열린 방문을 닫으려 서두르자 영선이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 상민아! 닫긴 뭘 닫니? 너 아직도 나를 꺼리는구나. 우리 집이 잘사는 부자였으면 내가 여기 삼촌 집에까지 내려오지도 않았어, 알어?”

닫으려던 방문을 그대로 놔두고 멋쩍어 말없이 들녘만 바라보았다. 온종일 배를 잔뜩 불렸는지 흰 황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날아 주위를 한 바퀴 맴돈 뒤 왕 소나무 위로 날아와 가볍게 날개를 접었다.

“이 분이 아빠니?”
“응!”
“엄마는 어데 가시고?”
“응, 읍내에 …….”
“와 여기 우등상장이 있네? 하긴 넌 공부 잘 하니까.”

그저 이어지는 질문마다 대답하기 어려웠다. 영선이가 아무리 이해를 한다고 해도 마음은 그저 부끄럽고 답답하기만 했다.
솔직히 마음 한쪽으로는 영선이가 구차한 내 집의 모습들을 더 이상 살펴보지 않고 얼른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을 것만 같았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옥순이가 서두르듯 영선이에게 말을 건넸다.

“영선아, 빨랑 우리 집에 가서 봉숭아 꽃잎 따야지.”
“응, 조금만 더 있다 가자. 공기도 맑고 참 좋다. 조용한 이런 곳을 언제 수채화물감으로 한번 그려보고 싶다.”
“그려보긴 뭘 그려보냐? 부끄럽게시리.”
“너, 또 그런 말 한다!”

영선이가 나를 향해 눈을 가볍게 흘기며 마당가에 내려서 등뫼산을 바라보았다. 산릉선 위에는 티 없이 자라가는 우리들에 모습을 반겨 주는 듯 뭉게구름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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