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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71 조회 : 2,139




한여름 내 그리도 지긋지긋하게 들볶아대던 여름 더위가 물러나고 이제 서늘한 가을이 차분하게 찾아 오는 것 같았다. 뭉그적뭉그적 늑장 부리는 늦더위의 등을 떠밀어 한낮 더위도 한풀 꺾인 듯했다. 아침 동이 틀 무렵과 해거름 녘에는 날이 여법 선선해져 기분이 한결 가뿟해졌다.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듯 두엄 가 대추나무에 오글오글 매달린 대추알들이 아침이슬에 선명한 자태를 드리웠다. 봄부터 여름내 튼실하게 볼 살을 돋우며 누렇게 익어 한층 맛깔스럽게 보였다.
마당 한구석에 서있는 석류나무도 둥글둥글한 열매를 실하게 매달아 붉으레한 빛을 띄우고 있었다. 누렇게 익어 가는 호박이 드문드문 몸체를 드러내는 싸리나무 울타리 밑 풀숲엔 살이 도톰하게 오른 방아깨비가 아둔하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이랴 이랴, 쩌쩌! 이랴 이랴, 웨웨!’

차분한 아침 햇살 속에 소를 모는 소리가 들려와 눈을 들어 바라보았다. 마늘을 뽑아낸 밭에 가을김장 씨를 뿌리려나 순아네 할아버지가 소를 몰아 쟁기로 밭을 갈아엎고 계셨다.

아침 일찍 원두막에 나온 동근이 아버지가 밭 가장자리에서 밭주인인 귀분이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어이, 귀분이 애비! 벌써 김장 무, 배추를 심을려남? 아직은 좀 일르지 싶은디.”
“예, 아직은 쪼매 일른 듯싶구먼유. 어쩔까나 한 사날쯤 지나서 씨를 뿌릴려구 허는디.”
“황토바탕이라 무 깔은 잘 나오던구먼 그려, 무가 크기두 실허구.”
“안 그래두 배추 예닐곱 고랑 심고 나머지는 죄다 무를 심으라구 허는구먼유. 참, 그나저나 성님 그 얘기 들었남유?”
“뭔 얘기를 들어?”
“아, 글씨! 종구애비가 예배당에 다닌다는구먼유. 참, 사람 오래 살구 볼일이어유.”
“음, 그려! 지두 지 여편네 그리 허망허게 먼저 보내 놓구 꽤나 적적했던 모양이구만. 예배당에 다니는 거시사 지 발로 가는 거닌께 누구 뭐라구 헐 거여, 안 그런감?”
“허긴 그렇네유.”

옹고집에 퉁명스럽기만 종구 아버지가 성격상으로는 좀처럼 교회에 나갈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 그런 분이 어느 날 갑자기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이 참으로 의아스럽기만 했다.
아무튼 종구 아버지가 교회를 나가신다니 그 동안 줄기차게 마을로 전도를 하러 오신 전도사님의 노력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았다.

그 어느 한 곳도 막힘없이 탁 트여진 들녘은 누르스름한 가을빛으로 충만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눈으로 바라만 보아도 포만한 진정 우리들의 삶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근원지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근원지를 잃어 버렸다는 슬픔이 어린 가슴속에 아픔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 탓에 소외감에 깊이 빠져들다 보면 때론 자괴감마저도 들었다.

온종일 학교 운동장 위에서 어린 동심의 세계를 세심하게 살펴보던 해가 높다란 학교 울타리를 비켜서 오후로 접어들려 했다.
오전 수업을 마친 낮은 학년 아이들이 운동장 철봉에 귀염성스럽게 매달려 대롱거렸다. 측백나무 울타리 그늘 아래에는 노랫소리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하는 여자아이들의 올망졸망한 모습들이 정겹기만 했다.

잘 닦아놓은 교실 유리창 밖으로 새터 마을의 모습이 선명하게 내다보였다. 오순도순 머릴 마주 댄 크고 작은 집들이 평온한 느낌을 주었다.
교문 밖 큰길에는 면내 마을들로 배달을 가려는지 용화리 양조장의 자주 색깔 윤기가 도는 조랑말이 보였다. 마차에는 막걸리를 담은 나무통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몸이 나른해지려는 오후로 접어들어 첫 수업인 미술시간이 되었다. 선생님은 칠판 위에 풍경화라고 크게 쓰시고 우리들 모두는 책상 위에 스케치북을 꺼내놓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버릇처럼 은단 몇 알을 입에 무신 선생님은 쇠로 된 출판위에 등사원지를 올려놓으셨다. 그리고 콧등 아래로 내려오는 검정뿔테 안경을 치켜 올리셨다. 잠시 후 사각사각 소리를 내어 다음 시간에 우리들이 치려야할 시험 문제지를 작성하고 계셨다.
세월의 손때가 가득 묻어난 교탁 위에는 백일홍과 코스모스가 섞여 있는 꽃병이 나른한 교실 분위기를 나름대로 생기롭게 했다.

그리기와 색칠하는 것에 마냥 서툴기만 한 나는 한참을 고심을 했다. 그러다 동근이네 원두막을 그리기로 마음먹고 서툰 솜씨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수업시간이 끝날 무렵 각자 그린 그림을 선생님께 제출했다.
그중에서 잘 그린 그림 두 점을 골라 들어 보이면서 칭찬을 해주셨다. 한 장은 석란이가 그린 교회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었다. 또 다른 한 장의 종이에 그린 그림은 어데서 많이 보아 눈에 익은 듯했다.

자세히 보니 동근이네 원두막을 배경으로 우리 집과 왕 소나무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영선이가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을 꼼꼼하게 살펴보시던 선생님은 그날 일직(당번)을 시켜 수업이 끝나면 그림 두 장을 교실 뒷면에 있는 게시판에 붙이라고 하셨다. 나는 속으로 뭐하려고 허름한 우리 집을 그렸나 하고 생각을 했다.
그때 멀리 이십여 리 떨어진 구자곡면 뒷산 사격장에서 훈련병들이 M2 카빈 사격을 하는지 콩을 볶아대는 듯 총소리가 ‘탕탕탕탕 타당 타당 탕탕탕’ 들려왔다.

하루 일과 중 마지막 시간인 시험시간이 되었다. 두 눈을 감고 양 손을 머리 위에 얹어 숨소리를 낮춰 시험지를 받은 후 저마다 책상에 엎뎌 문제지를 풀고 있었다.

저녁 무렵부터 구름들이 심상치 않게 밀려오더니 한 줄기 소낙비라도 내리려는지 하늘이 온통 흐려 교실이 어둑어둑해졌다. 그러자 선생님이 서둘러 천장에 매달린 전구 알에 불을 켜셨다.

그리고 복도에는 집이 멀고 길이 험한 곳에 사는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우산을 들고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 종구네 집 용만이 모습도 보였다.
수업이 끝나 복도에 있는 신발장에서 신발을 꺼내들던 석란이가 앞으로 지나가려는 종구에게 말을 걸었다.

“야, 종구야! 너 내일 밤 금요예배에 나올 거지? 니네 아빠랑 꼭 같이 나와!”
“응, 나는 가는디 울 아빠는 잘 모르것다. 갈란지 안 갈란지 암튼 말은 혀 볼게.”

종구와 용만이가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먼저 가고 석란이와 정순이도 아이들과 함께 교문 밖을 나서고 있었다.
옥순이와 같이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검정색 몸뻬를 입은 옥순이 어머니가 학교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옥순이 어머니가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상민아, 느네 엄니 시방 우리 집에서 니덜 오면 준다구 칼국수 밀가루 반죽하고 있어서 나 혼자 비가 올 것 같아서 마중 나왔으닌게 나랑 같이 빨랑 우리 집으로 가자 아무래두 심술맞게 비가 한차례 퍼부을 것 같다.”

시커멓게 멈춤을 모르고 밀려오는 구름 모습으로 봐서는 금방이라도 소나기라도 내릴 것 같았다. 다행스럽게도 동네 어귀에 올 때까지 비는 내리질 않았다.

철로 길을 건너 둥구나무에 앞에 닿으니 동네 아저씨 몇 분이 석유횃불뭉치와 양철통을 들고 옥순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셨다.

“학교에 야들 마중 갔다 오시남유?”
“예, 그런디 갈탱이 잡으러 샛강에 가시는감유?”
“예, 게란 놈들이 밤에 불빛 보구 많이 나오닌께 잡으려고유. 여름 게라 풀을 잔뜩 먹어서 맛이 있을랑가 몰라두 호박 넣고 팔팔 끓어서 안주삼아 그냥 술추렴이나 할려구 가는구먼유.”
“음, 너 상민이구나! 너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지? 참 그러고 본께 옥순이도 가긋네? 암튼 열심히 혀서 꼭 붙어야 헌다. 동네잔치 한번 크게 벌리게.”
“글쎄유. 저는 한다고는 하는디 경쟁율이 엄청 높아서 우리 옥순이 실력 가지고 들어 갈 수 있을련지 통 모르것네유.”
“뭐, 잘되것지유. 그러구 얼른 들어가세유. 비라도 퍼부슬라. 우리사 젖을 각오하고 나왔지만서두.”

마을 골목길로 접어들자 바람결에 실려 오는 매캐한 보릿짚 타는 냄새가 온 사방으로 번져 아마도 집집마다 모깃불을 피우고 있는 듯싶었다.

종구네 집 앞을 지나려니 마루에 남포등을 켜놓고 종구와 용만이가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정희누나는 그래도 하나 밖에 없는 동생 종구가 그리 소중했던지? 밥상 옆에서 부채질을 해주고 있었다.

종구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시면서 담배를 안 끊으시고 물부리를 물고 마루에 앉아 계셨다. 비가 오려 해서 눅눅한 날씨 탓인지 마당에 피워 놓은 모깃불의 연기가 땅위에 나직하게 깔리고 외양간에선 워낭소리가 담 너머로 가깝게 들려왔다.

검은 구름 가득 끼어 더욱 어두워 보이는 골목길 하늘위엔 어둠 사이로 번쩍거리며 번개불빛이 보이는 듯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다.

“우르릉, 우르릉!”

천둥이 울려 퍼져 가던 걸음을 더욱 서둘러 빠른 걸음으로 옥순이네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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