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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73 조회 : 1,686




밤사이 몇 차례 내려치는 천둥번개 속에 멈출 줄 모르고 내리던 비는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그 기세가 모두 꺾인 듯했다.
잠자리에서 막 일어나려는데 빗소리가 들리질 않아 비가 멈췄나 싶은 궁금증에 얼른 방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역시 비는 완전히 멈췄다.

구름만 가득 낀 흐려 어두운 날씨에 등메산이 비구름으로 가득 들어차 산자락이 답답할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허나 산릉선과 산자락에 맴도는 운무가 적절한 조화를 이뤄 신선하게 다가서는 느낌이 그리도 좋게 가슴에 팍 와 닿았다.

어쩌다 구름사이로 해가 빼꼼하게 얼굴을 내비추면 온 주위가 금방 밝아지는 듯싶더니, 이내 해가 구름에 가려지면 주위가 다시금 어두룩해졌다.
그렇게 여름날씨는 참으로 변덕이 심했다. 동네 어른들은 그런 변덕스런 날씨를 두고 ‘호랑이가 장가를 가려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만큼 빠른 시간에 하늘이 흐렸다 개기를 반복 한다는 비유였을 것이다.

밤새껏 내린 비는 온 마당을 흥건하게 적셨다. 마당으로 내려서려니 고무신 신발짝 밑에 진흙이 쩍쩍 들러붙었다. 개울가에 세수를 하러 가려고 밭둑을 걸으니 붉은 황토 흙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좁다란 개울엔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린 부연 흙탕물이 갑자기 불어나 세수를 못하고 집으로 되돌아왔다. 어물쩍하게 마루에 앉아 있는데 어머니가 부엌에서 밥을 짓고 계신지 ‘타닥 타닥 타닥 타닥 …….’ 매캐한 냄새 속에 보릿짚 타는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렸다.

토방엔 닭들이 한데 모여 몸을 흔들어 털며 부리 끝으로 깃털을 다듬고 있었다. 아마도 두엄을 헤집고 마당으로 기어 나온 지렁이를 잡으려 바지런히 나돌아 다닌 것 같았다.
검둥이도 우중충한 날씨에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아랫마을로 마실을 가려는지 토방에 엎드려 마을 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텃밭에는 빗물에 젖은 수박의 등 언저리에 검정 줄무늬 색깔이 또렷하게 보였다. 마을 앞개울과 맞닿은 좁다란 도랑에는 빗물 타고 올라온 미꾸라지를 잡으시려는지 동네 아저씨 두세 분이 발로 풀숲을 뒤척이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일찍 학교에 가서 아침 자습을 하려는 마음에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책보자기를 어깨에 질끈 동여매고 사립짝을 나섰다. 개울 둑길엔 밤새껏 비에 젖은 물컹한 흙에 신발이 푹 빠져 찐득찐득 온통 눌어붙었다.
봄에 입학을 한 어린 순아를 순아 어머니가 등에 업고 걸어가시는 모습이 그리도 포근하게 보였다.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제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지우산을 힘들게 받쳐 들고 가는 동네 아이들 모습도 띄엄띄엄 눈에 띄었다.

개울가 풀숲 위엔 비를 피해 있던 검정 실잠자리가 가쁜 날갯짓을 하고 있었다. 마을 앞에는 화물열차가 커다랗게 기적을 울리며 스쳐 지났다.
철로가 빗물에 젖은 탓인지 열차의 바퀴와 맞부딪히는 소리가 다른 날보다 더욱 커다랗게 들려왔다. 밤사이 흡족하게 내린 비로 개울물은 넉넉하게 불어나 힘찬 모습으로 끝없이 흐르고 있었다.

빗물에 흠씬 젖은 측백나무 울타리가 더욱 선명한 모습으로 눈앞에 성큼 다가섰다. 개울 둑길을 걸어가는데 발자욱 소리에 놀란 배가 불룩한 얼룩무늬 개구리 한 마리가 덥석 뛰어 물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물안개 가득 서린 교실 유리창이 정교롭게 보이는 운동장을 지나 교실로 향하는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 뒤돌아보았다. 남산리에 사는 먼 친척 벌 되는 인규가 나를 불러 세운 것이다.

“상민아, 같이 가자!”
“응, 빨랑 와!”
“야, 상민아! 니네 이번 추석에 집안 어른들한테 절하러 올 거지?”
“몰라! 울 엄니한테 물어봐야 해.”
“그때 일가들 많이 오닌께 너두 느네 엄니랑 함께 오면 좋을 건디.”

해마다 봄가을에 치루는 시제와 그리고 설날과 추석명절엔 친척 어른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다. 그래서 어렸을 적 아버지를 따라 남산리 친척들 집에 간 기억이 났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사는 형편이 여의치 못해 그 뒤로는 발길이 좀 뜸해졌었다.

인규가 묻는 말에 시원하게 대답을 못하고 어물거렸다. 그러자 우리 집 형편을 알음알음으로 잘 알고 있는 인규가 조금 멋쩍었는지 말끝을 흐리고 다른 쪽으로 말을 이어갔다.

“상민아, 니네 반 부반장하는 애랑 종구랑 사귀는 거 아냐?”
“몰러, 사귀든 말든. 그게 뭐 중요하냐 글구 사귀긴 뭘 사귀냐? 교회에 같이 다니는 것뿐인디 뭐.”
“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께. 종구 지가 우리반 애덜 한티 말했당께 그 애랑 사귄다구.”

사실은 관심이 가는 말이었기에 더 자세히 묻고도 싶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시침을 뚝 떼고 인규와 함께 교실로 향했다.
교실 한곳 책상을 아이들이 에워싸고 있어 가까이 다가섰다.
말썽꾸러기 성태가 책상 위에 등껍질이 검은 녹색 풍뎅이를 뒤집어 놓고 책상 위를 손바닥으로 치면서 소리 치고 있었다.
‘앞마당 쓸어라, 뒷마당 쓸어라.’ 노래를 부르니 풍뎅이가 소리에 놀란 듯 날개를 활짝 펴 책상 위를 빙빙 돌고 있었다. 모두들 그런 모습을 재미있는 듯이 서로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때 뒤에서 보고 있던 석란이가 앞으로 나서 성태에게 말을 건넸다.

“야, 오성태! 그 풍뎅이 밖에 놔줘라, 불쌍하니까!”
“싫어, 니가 먼데 놔주라 마라 날 시키는데?”
“그래두 불쌍하니께 그러는 거지 뭐, 너 안 그러면 선생님한테 다 말할 틴게 알아서 혀.”
“일러바칠라면 일러 봐! 혼나면 구만이지, 뭐! 근디 넌 추접스럽게 일러바치기 대장이네?”
“뭐, 너 뭐라구 했어?”
“일러바치기 대장이라구 했다 왜? 아니냐? 먼젓번에 여자애덜 고무줄놀이 할 때 내가 칼로 고무줄 짤른 것두 니가 일러바쳤지?”
“니가 나쁜 짓을 하닌께 일렀지, 니가 잘하는데두 일러바치냐?”

석란이와 성태가 한발 양보 없이 팽팽하게 맞서 한참을 떠들면서 다투고 있는데 ‘드르럭’ 레일에 걸쳐 있는 쇠 도르래가 달린 교실 출입문을 여는 소리가 나더니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셨다.
모두들 놀란 듯 제자리를 찾아 서둘러 앉느라 정신이 없는데 석란이가 선생님께 다가서 성태의 일을 말했다.

석란이의 말을 듣고 나신 선생님이 콧등 아래로 내려온 검은 뿔테안경을 추켜올리시며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오성태! 너 풍뎅이 가지고 앞으로 나와. 얼른 나오라고!”

담임선생님이 큰소리치시자 성태가 잔뜩 풀이 죽은 모으로 선생님 앞으로 불려나갔다. 선생님은 성태 손바닥을 매로 몇 차례 세게 내려치시며 말씀하셨다.

“하라는 공부는 않고 그런 쓸데없는 장난이나 치니 성적이 그리 엉망이지. 너 중학교 들어가는 거 포기할래? 그리고 아무리 말 못하는 곤충이라도 이렇게 잔인하게 다리를 자르고 목을 비틀어야 니 속이 시원하냐?”
“아니에유, 선생님! 지가 잘못 했어유. 다시는 안 그럴 틴께 한번만 용서를 해주세유.”
“너, 오늘부터 3일간 교실 청소당번 해 알었어?”
“네!”

성태는 작은 소리로 겨우 대답을 하고 머리를 숙인 채 교실 마룻바닥만 바라보며 걸어가 제자리에 앉고 있었다.
물론 성태의 행동이 올바르진 못했다. 그러나 아무리 부반장이라도 그렇게 선생님에게 곧바로 고자질하는 석란이의 태도가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석란이와 사이가 소원(疏遠)한 아이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작은 교실 안에서도 서로의 살아가는 생활환경 수준과 이해관계에 따라 두 부류로 나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들 앞에 그런 현상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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