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쯤 열어놓은 교실 유리창 문턱을 넘어 하얀 커튼을 가볍게 흔들며 산들바람이 시원스레 불어왔다. 그 바람은 쏟아지는 아침햇살에 후덥지근하게 달궈진 교실의 열기를 한층 식혀주었다. 교실 앞 화단에 핀 백일홍과 코스모스가 한데 어울려 불어오는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 틈새를 비집고 빨간 맨드라미가 또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말끔하게 탁 트인 푸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여유롭게 떠 가고 있었다.
첫 시간 수업을 거른 채 계속되는 반장 부반장 선거의 투표 결과에 온갖 관심이 집중된 탓인지 교실안 분위기는 너무도 착 가라앉아 있었다. 한 곳으로 모아진 투표용지를 추스르던 선생님의 모습에 우리들의 모든 시선이 모아졌다.
얼마 후 선생님이 교단에 올라서서 말씀하셨다.
“강상민이 하고 오정순 앞으로 나와. 내가 불러 주는 대로 칠판에 적어라.”
나하고 정순이는 교단에 올라 분필을 들고 선생님 말씀에 따라 칠판에 써진 각자의 이름 밑에 한문으로 ‘바를 정자(正)’를 한 획씩 긋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은 자연스레 칠판을 향해 숨소리를 낮춰 눈들을 모으고 결과를 지켜보며 가끔씩 작은 소리로 웅성거렸다.
그렇게 얼마동안 칠판에 표기가 끝나자 선생님이 조금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투표용지와 칠판에 써진 숫자를 상세하게 맞춰보셨다. 그런 다음 마지막 투표용지의 발표가 끝나자 교실이 환호성과 일부에서는 탄식소리가 나와 교실이 시끄러워졌다.
선생님이 교탁을 회초리로 내려치시며 조용히 하라고 큰소리치시자 다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선생님은 칠판을 가리키시며 투표결과를 발표하셨다.
“투표결과 반장에는 전체 59표 중에서 34표를 얻은 강명식이가 선출 되었고 부반장에는 31표를 얻은 양영선이가 선출되었다. 지금 말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와라.”
처음 투표를 시작할 때부터 모두가 반장선거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지난 4학년 때부터 학급석차 1위에 반에서 인기가 좋고 대인관계가 원만한 명식이가 늘 당선이 되었기에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반장 선거는 우리들 모두에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동안 반에서 인기를 모으던 석란이에게 새로운 바람의 주인공인 영선이의 도전이 모두의 관심거리였다.
투표결과 아주 근소한 차이로 아무도 상상치 못했던 이변이 작은 교실 안에서 일어났다. 교실 가운데 자리에 앉아있던 석란이는 책상에 엎드려 분했는지 부끄러웠는지 가늘게 울고 있었다. 성태를 위시해서 영선이를 지지했던 아이들은 영선이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앞으로 나갔던 반장, 부반장의 인사가 끝나자 모두들 박수를 치며 축하해 주었다. 선생님은 이명수와 윤석란의 자리로 가셔 가볍게 등을 두드려주시며 달래주셨다. 작은 변화 그것은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느낌에 따른 솔직한 행동의 표현이었다.
그런 어수선한 교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첫 시간 끝남을 알리는 교무실에서 치는 종소리가 요란스레 들려 아이들은 둘 혹은 셋씩 무리지어 운동장으로 나갔다. 석란이 주변에는 정순이를 비롯하여 친한 남녀 친구들이 석란이의 마음을 위로해 주려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넓은 운동장 왼편 울타리에는 무궁화가 가득 피어났다. 철봉대 앞에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어 학교 내에서 모든 분위기를 선제하는 성태가 조금 전에 있었던 반장, 부반장 선거 결과를 자기 일처럼 우쭐대며 말을 하고 있었다.
“야들아, 오늘 선거한 거 말이다. 난 석란이 떨어질 줄 진즉부터 알았어. 화산리 애들은 모두덜 석란이 찍었는가 몰라두 새텃말 하구 용꽃, 화정리 사는 애들은 다 영선이 찍었을 거여.” “그렁께 인심을 잃으면 못 쓰는 법이여. 지네 아버지가 그 잘난 지서장이라구 을매나 으시댔냐? 은젠간 내 그렇게 될 줄 알았어.”
옆에 있던 같은 동네 사는 응선이가 성태의 말을 거들었다.
“그려 응선이 말이 맞땅께, 먼일만 있으면 달구새끼모냥 선생님한테 달려가서 얼릉 일러바치구 선생님한테 점수나 딸라구 아양이나 떠니 그런 애를 누가 좋아하것냐, 안그러냐?”
사실 성태의 말처럼 석란이가 우리 담임선생님께 의존하려는 성향이 지나칠 정도로 높았다. 그리고 다 지난 일이지만 부반장이라는 위치를 지나치게 내세우려한 면도 우리들에게 그리 좋게 보이진 않았다. 더욱이 자기 아버지가 지서주임 임을 은연중에 과시한 것이 모든 아이들 눈에는 거북스럽다 못해 이질감을 주었던 것 같았다.
학교 남쪽 울타리 끝머리에는 말풀들이 무성하게 자랐다. 그곳에 며칠 전 교장선생님이 사다놓은 젖을 짜는 하얀 산양 두 마리가 다정스레 풀을 뜯고 있었다. 하늘가엔 가을을 재촉하는가? 빨간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한가로이 날았다.
석란이가 부반장에서 떨어진 탓인지 교실 분위기는 좀 가라앉은 듯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 같지만 침울해진 석란이의 얼굴 표정이 오전 내 그러했다. 점심시간에도 그런 분위기는 계속 이어졌다. 남학생을 제외한 여학생들은 석란이 주변과 영선이 곁에 각각 갈라져 모이기 시작하여 점심도 끼리끼리 먹고 있었다. 그렇게 서먹한 분위기 속에 하루의 해가 서서히 기우러 가고 있었다.
노을빛이 불그레한 모습으로 교실 유리창 가에 다가서 오색찬란한 영롱한 빛을 남겼다. 이윽고 해가 서산으로 꼬리를 감추자 교실은 점차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서둘러 교실 안에 전등불을 밝히신 선생님이 칠판에 시험을 치룰 범위를 적으셨다.
마지막 여섯 시간째 시험을 치루고 하루 수업이 끝나 교실 밖을 나섰다. 텅 비어 있는 널따란 운동장엔 어둠살이 잔뜩 깃들어 있었다. 언제나 그 시간쯤이면 배가 무던히도 고팠다. 시험을 치르느라 긴장했던 탓인지 불어오는 한줌 바람에 시원하기보다는 온몸에 긴장이 풀려 몸이 더욱 지치기만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배가 고팠는지 학교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옥순이와 나는 함께 어둠이 서서히 짙어드는 개울 둑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언덕 너머 비석골 공동묘지 앞을 지나 키가 엄청스레 큰 수수밭을 지나려니 선들선들한 바람이 불어와 기다란 수숫대가 가볍게 흔들렸다. 조금은 겁이 났는지 옥순이가 옆으로 바짝 달라붙으며 말을 했다.
“상민아, 너 오늘 누구랑 누구 찍었냐?” “그걸 뭐할라구 묻는디? 쓰잘데기없이 그럼 넌 누구 찍었는디?” “음, 난 첨에는 석란이 찍을라구 했는디, 가만히 생각해 보니께 영선이가 더 일을 잘 할 거 같아서 그냥 영선이를 찍어버렸어. 그런디 석란이한테는 좀 미안하드라.” “미안키는 뭐가 미안 하냐? 니 생각이 제일 중요한 거지 안 그러냐?” “상민이 너 영선이 찍었지? 맞지?”
나보다 키가 좀 작은 옥순이가 내 얼굴을 조금 올려보며 말을 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답답했는지 옥순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말하기 입장 곤란하믄 하지 마. 뭐 알어두 구만 몰라두 구만인께.”
어스름이 깔려 주위가 점점 어두워지자 길섶에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왔다. 콘크리트 수문 교각의 형체가 희끄무레하게 보여 왠지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뒤에서는 그 무엇이 바로 쫓아오는 것 같은 무서운 생각에 발걸음이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일이 있어 늦으시나 늘 마중을 나오시던 옥순이 어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은연한 달빛 아래 밤의 적막감을 더하듯 앞산 접동새 울음소리만 섧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