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한 아침 해가 싸리 울타리 너머로 뻘쭘하게 얼굴 내밀었다. 햇빛은 토방을 딛고 쪽마루에 올라 성급하게 더위를 재촉하는 아침이었다. 맑게 갠 하늘에는 구름이 드높이 떠 있어 기분이 상쾌하기만 했다.
산마루턱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스럽기만 했다. 헛간 한 모퉁이에 오롯하게 서 있는 미루나무 잎사귀가 팔랑개비처럼 뱅글뱅글 나부꼈다. 내리쪼이는 늦여름 햇살은 금빛처럼 땅위에 부서져 내렸다.
거의 밑바닥이 들여다보이는 부엌 물두멍에 물을 채우려 물지게를 지고 텃밭을 내려섰다.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이 살갑게 몸에 와 닿았다. 길 건너편 밭두둑엔 네 발가락이 짧아 시커멓게 생긴 두더지 한 마리가 허겁지겁 콩밭 속으로 재빨리 몸을 숨겨 달아났다.
원두막을 지나 언덕배기를 내려서는데, 마을로부터 구성지게 풍물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동네 우물에 일 년에 한 번씩 올리는 제를 지내려는 것 같았다. 동네 방앗간 녹슨 양철지붕에 햇살이 잔뜩 내리쬐어 이글거리는 열기가 여름 더위를 부채질 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려는지 털 색깔이 누런 호박잎 같은 삽살개 한 마리가 나보다 앞서 재빨리 걸어가고 있었다. 우물가에는 동네사람들과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였고 그중에 옥순이 얼굴도 보였다. 이장 아저씨가 제를 올리려고 하니 서둘러 물을 길어가라고 재촉하셨다. 동네 아주머니 몇 분이 제를 모시려는 제물을 준비하시는데 허옇게 털이 잘 벗겨진 돼지머리가 나를 보고 웃는 듯싶어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서둘러 물을 길어 양철통에 물을 채우고 우물터 밖으로 나왔다. 동네 어른들이 우물 주위를 물로 말끔히 청소를 한 다음 왕골 돗자리를 갈고 제물을 정결하게 차려놓고 있었다. 막걸리를 배달하시는 아저씨가 짐자전거에서 막걸리를 가득 실은 말 통을 내려놓으시며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에 땀을 닦으셨다.
머리에 갓을 쓰시고 하얀 도포를 정갈하게 차려입으신 인식이 할아버지께서 마을의 태평을 축원하는 축문을 읽으셨다. 그런 후 축문이 담긴 종이를 촛불에 태워 하늘로 올린 후에 마을 이장님과 동네 어른들이 차례로 절을 올리셨다. 그중에 종구아버지는 교회를 다니셔 그런지 절을 하지 않으시고 두 손을 앞으로 모으신 채 옆에 서 계셨다. 절을 마치신 어른들 중에 사는 형편이 좀 윤택한 어른들 두서너 분이 빙그레 웃고 있는 돼지머리 입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이 인쇄된 지폐를 한두 장씩 물려놓았다. 그리고 뒤에 알게 된 일이지만 종구아버지는 백미 한 가마니를 냈다고 동네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제가 끝나자 동네 어른들은 우물가에 둘러앉아 막걸리에 고기를 안주삼아 드시고 이장님은 아이들에게 골고루 떡을 나눠주셨다. 옥순이 어머니가 떡을 한 덩이 떼어주셔 맛있게 먹고 있는데 옥순이가 곁에 다가와 말을 나눴다.
“야, 상민아! 물 길러 왔냐?” “응, 그런데 넌 일요일인데 왜 교회 안 갔냐?” “응, 오늘 울 엄니가 나랑 뒷밭에 고추 따야 된다구 혀서 못 갔어.” “응, 그랬구나!” “야, 참! 그리구 오늘 이따가 점심때 쪼끔 지나서 영선이가 지네 삼촌이랑 우리 동네 올지두 몰라.” “그래? 영선이가 뭣 땜시 우리 동네에 또 오는데 지네 삼촌이랑?” “음, 그건 나두 자세히는 모르는디, 영선이가 그러는데 낼 논산교육구청에서, 장학사라구 허는 높은 사람이 온데. 그래서 교장선생님 심부름으로 수박이랑 참외 사러, 동근이네 원두막에 온다구 하더라.” “음, 그럼 낼은 아침부터 죽어나겠네. 온 사방 간데 쓸고 딱구 혀야 되닌께. 에이 귀찮게 장학사는 뭣땀시 온다냐?” “그러닌께 말이다.” “야, 작년에두 얼마나 요란했냐? 깻묵으로 마루 문대다 안 되서 초칠을 다하구 어휴.” “나는 유리창 당번 걸려서 유리창 매달려 딱느라구 죽는 줄 알았다.” “그럼 나 가 볼께, 그리구 이따가 원두막으루 올래? 영선이 만나러.” “그건 이따가 보구. 고추가 일찍 다 따질랑가 몰르겠다. 암튼 될 수 있는 대루 짬내서 갈게.”
물지게의 균형이 잘 맞질 않는지 양철동이에 담긴 물이 출렁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동네 입구로 들어오는 개울가 나무다리를 건너 철길 건널목 앞에 이르러 숨을 돌리려고 멈춰 섰다. 낮 열두 시가 되었나? 기차가 검은 연기를 하늘로 내뿜고 세차게 달려 건널목을 지나며 기적소리를 요란스레 내어질렀다. 기차가 내 앞에 다가서자 얼른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검은 모자를 꾹 눌러 쓴 기관사 아저씨도 함께 손을 흔들어주셨다. 수증기에 묻어나는 매캐한 석탄 내음을 남기며 기차가 지나갔다. 방죽가에는 흥남이 아저씨가 지우산을 펼쳐놓으시고 지렁이를 미끼로 한가로이 대나무 낚시를 하고 계셨다.
언덕배기를 넘어 원두막에 닿았다. 나보다 조금 먼저 우물가에서 출발하신 동근이 아버지가 땀을 훔치시며 원두막 위로 오르고 계셨다.
“아저씨 이따가유, 우리 학교 소사 아저씨가 수박이랑 참외 사러 올 꺼닌께. 그리 아세유.” “음, 알았다 그런디 아까 우물가에서 떡이라두 쪼매 먹었냐? 으쨌냐? 난 제 올리는디 뒤치다꺼리하느라 통 정신이 없어서.” “네, 아까 옥순이 엄니가 한 덩이 주셔서 잘 먹었구먼유.” “음, 잘했다. 무거울라 얼릉 가그라. 그리구 이따가 니네 반 친구 오면 같이 오너라.”
산으로부터 불어오는 한줄기 시원한 솔바람을 맞으며 텃밭에 이르자 검둥이가 얼른 뛰어나와 꼬릴 흔들었다. 한낮 더위를 피하려는 듯 싸리 울타리 밑에는 닭들이 발로 땅을 헤집어 쪼그려 앉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졸고 있었다.
키가 커다랗게 뻘쭘뻘쭘 서 있는 해바라기는 해를 향해 머리가 무거운 듯 숙이고 있었다. 한낮 더위를 몰고 오는 해가 왕 소나무 위에 머물고 있었다. 갈참나무에서 그리도 요란스레 울어대던 매미소리도 잦아들었다. 고개를 돌려 멀리 새터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냇둑 위를 달려오는 짐자전거 뒤에 올라타고 있는 영선이의 모습이 보였다. 허나 지난번에 우리 집에 대하여 볼 것 다 보여준 탓인지 그리 쑥스럽고 창피한 생각은 덜했다.
원두막으로 오는 밭둑길이 비좁아서 그런지? 영선이가 자전거 뒤에서 내려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양씨 아저씨는 자전거를 끌고 걸어 오셨다. 마루에서 일어나 얼른 원두막으로 향하는데 검둥이도 덩달아 뒤를 따라나섰다.
“아저씨, 안녕하셨어유?” “응, 너 우리 영선이랑 같은 반 누구더라. 통 이름이 생각나질 않는다.” “에이 참, 삼촌도 우리 반 강상민이야.” “아 맞네, 강상민이구나! 하도 여러 아이들을 보다 보니까 잘 생각이 나질 않아서.”
양씨 아저씨가 조금은 미안스런 얼굴로 동근이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참, 아저씨 오랜만에 뵙네요?” “이게 누구랴? 학교 일 보는 양씨 아닌감. 그려 참 오랜만이네 그려, 더운데 어여 위로 올라들 가.”
재촉하시는 동근이 아버지 말에 원두막위로 올라가셨다. 동근이 아버지는 밭을 이리저리 둘러보시며 잘 익은 수박과 참외를 고르고 계셨다.
“상민이 너는 이 동네 어데 사니?” “네, 저기가 우리 집이에유.”
사는 형편이 구차하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자리에 앉아 있기가 좀 불편했다. 이를 눈치 챈 영선이가 나를 향해 눈짓으로 원두막 아래로 내려가자는 뜻을 전했다. 영선이 뒤를 따라 원두막 아래로 내려와 텃밭 쪽으로 걸으며 말을 나눴다.
“상민아, 너 지난번 선거 때 고마웠어. 그리고 성태도. 네가 말을 안 해도 나는 네 마음 다 알어.” “뭘 아는디?” “음, 그냥!” “그냥이 뭐냐? 싱겁게시리.” “참, 옥순이 못 봤지? 오늘 우리 삼촌하고 온다고 했는데.” “옥순이 아침에 우물가에서 보았는디 안 그래두 니 말 하드라 여기 원두막에 올 꺼라구.” “그래?” “옥순이 시방 지네 엄니하구 고추 따구 있는디, 얼릉 따구 온다구 했는디 잘 모르건네.” “바쁘면 할 수 없지, 뭐! 안 그래? 참 상민아 너 이번 추석에 어디 가니?” “아니 왜? 엄니랑 집에 있을 건디.” “응, 그렇구나! 추석날 석란이랑 아이들이 교회에 모여 놀라고 하는 모양 같아서 나도 너희들하고 같이 놀려고 해서 물었어.”
영선이는 텃밭 길섶에 강아지풀을 뽑아 가볍게 얼굴에 대고 문지르며 말을 했다. 얼마 후 동네 어귀 거북바위 앞에서 원두막을 향해 정신없이 달려오는 옥순이 모습이 작달막하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