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다를 바 없이 아침 식사를 끝마치신 어머니께서는 나보다 앞서 읍내로 장사를 나가셨다. 지난 장마 때 비바람에 울타리 한쪽이 비스듬하게 기울어 바라보기에 눈에 거슬렸다. 집모퉁이를 돌아 밭둑을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그리 멀지 않게 보였다. 두 그루 은행나무가 다정하게 마주 바라보고 서있는 둔덕 위를 걸어가시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늘 마음은 한없이 무겁기만 했다. 어찌됐던 이 가난의 굴레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길 진심으로 바랄 뿐이었다. 헛간 초가지붕 너머로 바라 보이는 신작로엔 흙먼지 뿌옇게 이는 색 바랜 버스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면서 읍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마당 한구석 대추나무 밑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에는 이끼가 가득 끼어 파르스름하게 보였다. 그 돌무더기 위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목을 치켜들고 숨을 헐떡거렸다. 그러자 그늘 밑에 있던 수탉이 달아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목둘레에 난 깃털을 곤두세워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기이하게 보였던지 토방에 엎드려 있던 검둥이도 몸을 일으켜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길을 돌려 조금 멀리 바라보니 뒤뜰 끝머리엔 콜타르칠을 한 학교건물의 교실 유리창이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색채를 띠었다. 놓치고 싶지 않은 그런 모습 하나까지도 어린 내 마음엔 온유하게 와 닿았다.
맑게 흐르는 개울가엔 땡볕 아래 소금쟁이가 곡예를 하듯 물위를 사뿐사뿐 걷고 둥그런 물옥잠 이파리엔 작은 물방개 한 마리가 앙증맞게 기어올랐다. 지난번 장마 때 갑자기 불어난 물에 징검다리의 디딤돌이 휩쓸려 떠내려갔다. 장마가 끝나자 동네 어른들이 힘을 합쳐 커다란 돌덩이를 옮겨 징검다리를 다시 이어놓았다. 그런데 제각기 다른 색깔의 디딤돌들이 눈에 조금은 낯설게 보였다.
적당한 간격으로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 냇둑 길을 따라 비석골 앞에 닿았다. 냇둑 너머 과수원엔 붉은빛을 띠며 탐스레 익어가는 능금나무 아래서 두 내외분이 다정스레 밭일을 하시고 계셨다.
산비알 밭엔 산두벼가 벼이삭을 곧추세워 만추(晩秋)를 기다리는 것 같이 보였다. 언덕 위 공동묘지 묏등에는 어느 아저씨 한 분이 벌초를 하시는지 낫으로 풀을 깎고 계셨다. 그리고 길섶에는 이제 막 피어나는 코스모스가 소곳소곳하게 머릴 들고 있었다.
추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마을에서는 집집마다 추석빔을 마련할 대목장을 보기 위해 제가끔 돈거리를 장만하기에 분주했다. 어른들은 시간을 내어 조상님들 분묘를 둘러보고 벌초를 했다. 앞산 물레치기 골짜기 위에 있는 아버지 분묘의 벌초는 어머니께서 흥남이 아저씨에게 담배 값을 드리고 부탁을 하셨다.
동네에선 약속이나 한 듯 집집마다 문살에 붙어 있는 헌 문종이를 뜯어내고 새로 사온 문창호지를 발랐다. 더러는 문창호지 사이에 곱게 말린 꽃잎과 나뭇잎을 넣고 발라 한결 멋을 부렸다.
동네 아이들은 저마다 추석빔을 받을 생각에 마음이 온통 들떠 있었다. 살기가 어려워 객지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간 가족들이 고향에 돌아오기를 벌써부터 목매이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들떠있는 모습은 학교에서도 만찬가지였다. 얼마 전 부반장 선거에서 패한 뒤로 좀 시무룩하게 지냈던 석란이가 추석빔 자랑에 우쭐대고 있었다. 말 많은 떠버리 기수도 서울로 미장일을 하러 간 자기 아빠가 추석에 멋진 코르덴 옷을 사온다고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에 뒤질 새라 우직하게 생긴 성태도 전라도 광주 과자 공장에 일하러 간 자기 형이 선물을 잔뜩 사가지고 온다며 떠들어댔다.
옥순이는 할머니와 고모가 한 마을에 같이 살고 있어 명절이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영선이도 삼촌 집에 자기 아버지가 서울에서 내려온다고 하여 덜 외롭게 보였다. 그러나 누구 하나 찾아올 사람 없는 우리 집은 어머니와 단 둘이서 해마다 그저 쓸쓸하게 보내야만 했다. 어쩌면 해마다 반복되는 외로움에 점점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엊그제 교육청에서 나온 손님들이 다녀간 영향인지 교실마다 유리창이 아주 맑게 보였다. 운동장 한구석에 높다랗게 서 있는 백양나무 잎사귀가 햇빛에 반사되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마치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했다.
모두들 그토록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다. 교실은 온통 도시락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여는 소리에 술렁였다. 그런데 영선이가 슬금슬금 다가와 내 책상 속에 작은 도시락 하나를 넣어 엉겁결에 받고 말았다. 그리고 눈빛으로 말을 하면서 얼른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늘 하던 버릇대로 도시락을 들고 교실 문밖으로 나섰다. 무궁화 꽃이 가득 핀 울타리 그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엇에 놀랐는지 산비둘기가 떼를 지어 높다란 측백나무 울타리를 넘어 들녘 밭으로 힘차게 날아가고 있었다. 영선이가 주고 간 도시락 뚜껑을 열어보니 작은 종이 위에 글씨가 예쁘게 쓰여 있었다.
“상민아,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먹어, 응! 그리고 힘내.”
반찬을 담은 도시락 안에는 돼지고기 장조림과 달걀부침 그리고 멸치볶음이 들어 있었다. 나를 생각해 주는 영선이가 무척 고맙기도 하면서 마음 한편으로는 퍽이나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영선이에 마음을 고맙게 받아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빈 도시락을 같은 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영선이에게 직접 돌려줄 수는 없었다. 어떻게 돌려줘야 좋을까 하고 한참 동안 생각을 했다. 궁리 끝에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옥순이에게 부탁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언젠가 영선이가 부른 ‘팅클 팅클 리들 스타’ 노래가 떠올라 피식 웃고 말았다.
교실 앞 화단에 불그레하게 피어 있는 배롱나무 머리 위에 어둠살이 내려앉았다. 선생님께서 수업을 끝마친다는 말씀을 하시자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그리 좋아했다. 교문을 빠져나오려는데 용꽃 마을에 사는 응선이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야, 강상민! 니네 동네에 김기수라는 사람 사냐?” “응, 우리 동네에 사는디 왜 그러냐?” “그 사람 이번 가실에 우리 동네루 장가 온다구 하던디, 넌 몰랐구나?” “엉, 몰랐어! 증말루 너한티 첨 듣는 얘기라서, 그러믄 약혼두 했건네?” “응, 어저께 읍내 사진관에서 사진두 박구 한 모양이더라.” “음, 그렇구나! 알았다. 나 먼저 빨랑 갈께 낼 보자.”
동네에 사는 기수형이 용꽃 누구네 집 처녀에게 장가를 가는 모양이었다. 마을에 그런 경사가 있으면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아이들은 오랜만에 색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새색시가 꽃가마를 타고 오는 모습부터 신랑각시 예를 올리는 구경을 할 수 있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좋아했다.
교문 밖을 벗어나 두어 걸음 뒤에 따라 오는 옥순이에게 말을 걸었다.
“옥순아, 너 내일 이거 영선이한테 좀 갖다 줘라.” “그게 먼데? 도시락 반찬통 아니냐? 그걸 왜 영선이한테 주는디?” “아까 즘심시간에 영선이가 나 먹으라구 살짝 줬는디, 애들 보는 디서 주기가 챙피해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응, 그랬구나, 알았어. 내가 낼 돌려줄게.” “야, 참 그리구 아까 용꽃 사는 응선이가 그러는디, 울 동네 기수형 장가 간다는디, 넌 알고 있냐?” “아니, 나두 첨 듣는 말인디 언제 장가간다냐?” “음, 나두 자세히는 몰르는데 올 가실(가을)에 가겠지 뭐.”
산자락에 띄엄띄엄 늘어선 크고 작은 소나무들의 거무스레한 모습들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비석골 공동묘지에 우두커니 서 있는 비석들이 앞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아 그 또한 무섭기만 했다. 냇둑 풀숲에선 가을을 서둘러 부르는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가 처연하게 들려왔다. 어스름한 밤하늘엔 점점 배불러가는 열이틀 허연 달이 뒷산 왕 소나무 가지 사이에 비스듬히 걸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