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80 조회 : 1,692




어둠살이 짙어오는 늦저녁부터 산마루에 검은 구름들이 떼 지어 밀려왔다.
밤이 이슥해지자 그 기세가 더욱 거세져 ‘후두득 후두득’ 굵은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봉창 밖으로 여법 크게 들려왔다.

방문이라고 대나무를 쪼개어 어쭙잖게 빗살무늬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달랑 한 짝뿐이었다. 사나흘 전에 바른 문창호지의 새하얀 빛깔이 가뜩이나 어둡고 침울해 보이는 방 분위기를 그런대로 환하게 바꿔놓았다.
봄에 꽃무늬 벽지로 바른 벽은 햇빛이 잘 들어 그런지 여름장마에도 얼룩진 곳이 별다르게 없어 도배를 하지 않았다.

추석명절이라는 설렘 속에 다른 날보다 잠에서 일찍 깨어났다. 대전을 향해 달리는 화물열차의 진동소리가 내리는 빗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기차는 새로 바른 문창호지를 세차게 울리며 스치듯 지났다.

부엌에서 차례 상에 올릴 제물을 준비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신 어머니의 말씀이 그릇 부딪는 소리와 더불어 포근하게 들려왔다.

“상민아, 일어났냐? 일어났으면 얼른 세수하구 방 좀 치워라. 차례 지내야 하닌께 어여, 얼릉 움직여라. 그나저나 뭔 넘에 비바람이 이리두 쎄게 분다냐? 내 원참 명절 다 망칠라구 그러나?”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세차게 부는 비바람에 싸리나무 울타리의 울대가 흔들렸다. 울타리에 등을 기댄 대추나무 작은 잎들이 쉴 새 없이 부대끼고 있었다.
넓은 들녘 벼들이 바람결에 한쪽으로 엇비스듬히 휩쓸렷다. 텃밭 수수들도 힘에 겨운지 몸을 비스듬히 누이고 멀찌감치 빗속에 가린 주막집이 작달막한 모습으로 부옇게 보였다.
웬만한 바람에는 좀처럼 몸을 흔들지 않던 둥구나무도 가지가 부러질 듯 마구 흔들려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저마다 즐거운 명절날은 경청한 하늘 아래 조상님 제사 모시고 성묘를 했다. 온 집안 일가친척들이 한데 모여 덕담을 나누며 흥겹게 풍물을 치고 온 동네를 돌아 격 없이 춤을 추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뒷동산에 떠오르면 여자들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둥구나무 밑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강강술래’를 하며 밤이 이슥토록 놀았다.

허나! 사납게 몰아치는 비바람 때문에 우려했던 대로 즐거워야할 추석명절이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일 큰 걱정은 성묘를 다녀오는 일이었다. 그런 걱정은 비단 우리 집뿐만 아니라 동네 모든 집들이 같았다.
줄기차게 내리는 굵은 빗줄기가 세찬 바람에 쓸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좁은 방에 가득 차오는 향냄새를 맡으며 차례를 지낸 후 아침밥을 먹으며 어머니께서 말씀 하셨다.

“니 애비한테 가봐야 허는디, 이넘에 빗속을 어찌 뚫구 간다냐? 그리 밤새도록 퍼붓었으니 우묵골 계곡에두 물이 엄청나게 불어났을 건디, 어찌 잘 건너갈 수나 있을런지 모르것다. 그러니 이를 으짠다냐? 참 난감허네, 그려! 그르타구 안 갈 수두 없구.”
“뭐, 비 맞을 각오허구 가면 되지 뭐, 엄니는 그냥 집에 있구 나만 얼릉 댕겨오면 되지 뭐.”
“아니다, 그래두 내가 가야지. 참말루 비 치고는 징허게 오네. 장마가 또다시 올라구 그러는가? 암튼 좀 기달려 보자 비가 좀 뜸해지면 가버리게."

그렇게 어머니와 나는 성묘 문제로 엉거주춤하며 쪽마루에 앉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명절 끝에는 집에서 키우는 짐승도 호강을 하는 것 같았다. 주인은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성묘 갈 문제로 심난해 있는데 그런 속내도 모르는 듯 마루 옆에 검둥이가 고기 뼈다귀를 하나 물고 엎드려 열심히 뜯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려도 비는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오히려 바람만 더 거세게 불고 있어 싱숭생숭한 마음에 마을앞 쪽을 내다보았다.
빗속에도 성묘를 하러 가려는지 종구아버지와 종구가 비를 피하려고 지우산을 펼쳐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그 뒤를 용만이가 지게를 지고 따라가고 있었다.
읍내에서 돈을 주고 구했는지 용만이는 제물을 가득 담은 지게를 군용우의로 덥고 마을 고샅길을 벗어나고 있었다.

거세게 부는 바람에 종구 아버지가 쓰고 있던 우산이 훌떡 뒤집혔다. 종구 아버지가 두 손으로 우산을 꽉 잡으셔 겨우 버티시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지게 위에 얹은 우의 끝자락이 비바람에 세차게 펄럭거렸다. 그리 세차게 불어오는 비바람에도 동네 사람들이 성묘를 가려는지 둥구나무 밑에 드문드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엄니! 우리도 그냥 비 좀 맞더라두 성묘 가자. 지금 종구네 집도 가닌께. 엄니는 우산 쓰구 나는 거적 둘러쓰고 가면 되닌께.”
“그래두 쓰것냐?”
“뭘, 어쩌! 비 좀 맞으면 그만이지 뭐, 갔다 와서 얼릉 옷 갈아입으면 되지. 그리구 엄니가 제물 보따리 못 들구 간다구. 바람이 세게 불어서 우산이 뒤집힐라구 허닌께 내가 들구 갈게, 얼릉 가자.”

집을 나서 뒷산에 오르려는데 마주쳐 부는 세찬 바람에 어머니께서 쓰고 가시시던 우산이 훌떡 뒤집혔다.
어머니는 비를 맞을 양으로 내 손에 들었던 보따리를 얼른 받아 앞을 서 가셨다. 나도 온몸에 빗물이 젖어 아랫도리 바지 속까지 빗물이 스며들어 흠뻑 젖었다.
드세게 내려치는 빗물에 산기슭 계단식 밭의 황토가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 어수선해 보였다.

아버지 산소로 가기 위해 오솔길을 벗어나 오솔길보다 더 비좁은 소릿길로 들어섰다. 말이 좋아 소릿길이지 이른 봄 고사리 순을 꺾으러 산에 오르시는 동네 아주머니들을 제외 하고는 거의 발길이 끊긴 곳이라 적막하기 더할 나위 없었다.

길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가늠키 어려울 정도로 싸리나무와 키 낮은 도토리나무가 울창하게 들어서 있었다.
가뜩이나 잘 보이질 않는 길을 청미래덩굴과 칡넝쿨이 길섶 소나무 등을 아금박스럽게 휘감아 덤불숲을 이뤄 이미 길이 묻혀버렸다.

두 손으로 앞을 가로 막고 있는 나뭇가지를 헤치며 걸어 나갔다. 무릎 높이만큼 자란 풀숲을 헤쳐 억지로 길을 만들려니 나뭇가지를 헤칠 때마다 나뭇잎에 고인 빗물이 동시에 머리 위로 ‘후두둑’ 소릴 내며 떨어졌다.

좀처럼 그칠 줄 모르고 내리는 빗속에, 물기가 가득 밴 잔디 위에 제물을 주섬주섬 차려놓고 절을 올렸다.
질퍽하게 내리는 빗속에 땅에 엎드려 절을 올리려니 마음 더없이 처연하기만 했다. 더욱이 단 한마디 말조차 없으신 아버지를 생각하니 참았던 눈물이 빗물에 섞여 흘러 내렸다.

그런 내 모습을 애써 보지 않으시려고 어머니는 얼굴을 마을로 향해 돌리셨다. 힘들게 외면하시려 하는 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아버지에게 하시고 싶은 말들이 무척이나 많으실 것 같았다. 그래도 끝내 입을 굳게 다무시고 단 한 번 자세를 흩트리지 않으셨다.

시야가 가릴 정도로 엇비슥하게 내리치는 비를 흠씬 맞고 힘들게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반닫이에서 속옷을 꺼내 마루에 내놓셨다. 그리고 이내 방문을 닫으신 후 어머니께서는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셨다.
나는 혹시 누가 볼 리는 없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옷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얼른 옷을 벗고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검둥이가 벌거벗은 내 모습이 좀 이상스러운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후 방문을 열고 나오시던 어머니가 마루에 앉으시며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상민아, 나 있다가 비가 좀 그치면 옥순네 집에 갔다 올려는디 넌 어쩔래?”
“나두 같이 가지 뭐, 옥순이 지네 삼촌두 이번엔 못 올께야, 비가 이리 엄청 오는디 안 그래?”
“허긴 그럴 끼다, 토끼재서 요기 올라면 시오리 길이 훨씬 넘으닌께, 그리구 비나 안 와야 오던지 말던지 하지, 에이구 명절이랍시구 왜 이 모양이라냐?”

비는 계속 내리는데 바람이 좀 멈칫하는 듯해 어머니와 우산을 함께 받쳐 들고 옥순네 집으로 갔다.
여느 때 명절 같으면 고샅길에 오가는 발걸음이 분주할 것 인데 비 때문인지 마치 떠나간 동네처럼 그리 조용하기만 했다.

“야, 옥순에미야! 나 왔어 나여, 상민에미.”

대문 밖에서부터 어머니가 큰소리로 옥순이 어머니를 부르셨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안방에 앉아 있던 옥순이 어머니와 옥순이가 몸을 일으켜 마루로 나왔다.
옥순이 어머니가 토방에 내려서며 말씀하셨다.

“야, 비나 멈추거들랑 오지, 그랬냐? 어여 올라와 상민이두 비 많이 맞았구나! 아무래두 장마가 다시 올라는 가벼, 안 그러구 비바람이 이리 극성을 떨긋냐?”
“그러게 말이다. 왜 아니라니!”
“참, 상민 애비 산소는 댕겨 왔는감, 이 비를 다 맞구?”

옥순이 어머니가 방벽에 걸린 수건을 어머니에게 건네시며 말씀을 하셨다.

“에휴 말도 마라, 어찌나 비가 퍼붓던지 정신혼창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 거기다 뭔 놈에 바람까장 그리 불어대는지 그냥 가만히 서 있어두 몸이 저절루 떠밀려 가드라. 옥순이 니네는 성묘 낼이나 가야 허긋다. 비두 오구 거리가 그리 머닌께.”
“응, 친정집에서 지 애비 묘등 들여다볼라나? 암튼 낼은 옥순이 하구 일찍 서둘러서 가 볼려구 혀. 그리구 상민아, 뭐 좀 채려줄까? 먹을래?”
“채리긴 뭘 채리니, 번거롭게 이따가 밥이나 먹으면 되지 뭐.”
“그려, 참! 그리구 옥순아 어젯밤에 기순이 엄니가 주고 간 거 그것 좀 상민이두 줘라. 그렇게 귀한 거라닌께.”
“귀한 게 먼데?”
“응 그거? 어젯밤에 옆집 기순이 엄니가 떡시루 좀 빌려 달라구 하면서 가지구 온 건디 미국사람들 먹는 과자라는디, 뭐시라구 하더라?”
“에이구, 엄니 쪼꼬래또! 그것두 몰라?”
“그거 귀한 건데 어디서 났다냐? 그걸 다 주게?”
“상민 에미야, 너만 알어라. 아무헌티두 말하지 말구 상민이랑 옥순이 너두 입조심혀야 된다.”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짓는 옥순이 어머니의 말씀에 갑자기 분위가 숙연해졌다. 그러자 어머니께서 말을 이으셨다.

“야 무슨 말인지 싸게 혀봐 사람 답답하게시리 글구 내 입 무거운 건 니가 잘 알틴께 그런 걱정일랑 아예 붙들어 매고 싸게 허든 야그나 혀봐.”
“음 그러닌께 그게 뭐냐면 작년 봄에 용숙이랑 기순이가 군산 고무신 공장에 취직하러 안 갔는감? 그랬는디 용숙이는 거기 그냥 계속 댕기구. 기순이는 쪼매 댕기다가 먼 일이 있었는가? 그만두었다구 허드라.”
“그래서?”

어머니께서 다그치시자 옥순이 어머니가 옥순이와 내 얼굴을 한번 둘러보시고 다시금 말을 하셨다.

“기순이가 지네 집 형편 뻔하게 아닌께 집으루 돌아올 염두도 못 내구 취직이랍시구 헌 게 비행장인가에 있는 술집으로 빠진 모양인디, 아, 그기서 미국 놈을 만난 모양이더라구. 기순이 엄니 말로는 기순이가 을매 안 있다가 미국으루 아주 살러 들어 갈 꺼라구 하더라.”
“그럼 기순이두 왔구먼, 그 집두 지그 애비 폐병인가 뭔가루 안 죽었으면 애들이 그리는 안 풀렸을 건디. 아무튼 큰일이여, 그러니 지 애미 속은 오죽 허것써, 다 없이 사는 게 죄지 뭐.”
“야, 상민에미야! 기순이 엄니가 그러는디 동네 사람들 눈두 있구 그래서 두서너 달 있다가 읍내루 작은 집 하나 사서 식구들 모두 이사 갈 모양이더라.”
“읍내루 이사 갈려면 돈두 많이 들 건디.”
“응, 돈은 그 미국 놈 사위인가 뭔가가 대줄라나 보더라, 암튼 잘된 건지 못된 건지 나는 통 몰르것다.”
“에이구, 내 코가 석자인디 누굴 흉볼 꺼여. 안 그려냐? 그 집이나 내 집이나 땅 덩어리라구 논은커녕 자드락에 눈꼽만 한 밭뙈기 하나두 없으니.”
“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니가 뭘 어때서? 너만큼 살려구 팔 걷어붙이구 사는 년 있으면 나와 보라구 혀, 내가 낯짝 좀 보게.”
“에이구, 다들 언제나 이넘에 가난을 면해 볼라나? 휴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 암울하기 그지없던 그 시절임에 틀림없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기 위하여 아니! 살아남기 위하여 그렇게 발버둥을 쳤다.
그런 아픔을 씻어내려는 듯 작은 들메 마을에도 비는 멈출 줄 모르고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