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넓은 들녘에 안개가 자욱하더니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자 하늘은 모처럼만에 가을 날씨답게 상명했다. 한낮으로는 아직도 여름 늦더위가 머적거리지만 이젠 한풀 꺾인 듯싶었다. 내 키보다 훨씬 높게 목을 쳐든 파초(芭蕉)의 머리 위로 하늘은 마냥 푸르러 더없이 높기만 했다.
여름내 푸릇푸릇했던 들녘 벼들도 탱탱하게 여물어 누르스름한 이삭을 점차 숙이고 있었다. 뒤따라 뒤뜰 밤나무도 누릇누릇하게 잎 색깔을 바꿔 가득 오므린 입을 벌릴 듯 말 듯 밤송이가 야물딱지게 달려 있었다.
도랑으로 내려서는 내 발자욱 소리에 놀란 듯 텃밭 콩잎 뒤에 몸을 숨겼던 메뚜기가 ‘톡톡톡톡’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튀어 흩어졌다. 그리고 몸짓이 좀 둔해 보이는 방아깨비도 덩달아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좁다란 논길엔 하얀 오리 몇 마리가 좌우로 몸을 가볍게 흔들어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줄을 맞춰 방죽으로 향하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제딴에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웠다.
납작 엎드린 초가지붕 앞마당에는 이른 벼를 풋벼바심을 하는가? 기현이 할아버지께서 홀태 질을 하고 있었다. 동구 밖 냇둑에는 두 어깨가 떡 벌어져 우직하게 생긴 종구네 집 용만이가 쇠꼴을 한 짐 가득 지게에 지고 마을로 걸어가고 있었다.
해마다 명절 끝에는 뭔지 모르게 허전하고 늘 한산하기만 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동네 어른들 말처럼 명절이 끝나 하루 이틀이 지나자 명절을 쇠러 귀향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났다. 동구 밖 둥구나무 밑에는 석별의 정을 나누며 아쉬워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애잔하게 보였다.
명절 끝머리에 남은 조기 한 마리가 도시락 속에 담겨 다른 날보다 마음이 부듯했다. 철길 건널목에는 추석빔으로 받았는지 도톰한 검정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옥순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노란 편지봉투에 한 움큼 담긴 것을 앞으로 내밀며 말을 했다.
“상민아, 이거 우리 외갓집서 가지구 온 찐쌀인디. 너 줄라구 내가 챙겨왔어, 먹어 봐!” “응, 고맙다, 와! 너 무지허게 멋쟁이 됐네? 니 엄니가 사줬구나! 넌 좋것다. 근디, 느네 외갓집은 벌써 풋벼를 베었냐?” “응, 이번 추석에 베었나 봐! 어서 먹어보라구 무지허게 꼬습다. 참 그런디 이번에 부산인가에서는 물난리가 나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었다고 하드라! 태풍인가 뭐가 불어 닥쳐 가지구 그렇게 됐단다.” “응, 나는 벌써 알구 있었어. 에제 이장님한테 들었어, 참 안됐지 뭐 그 사람들 불쌍해서 어쩐다냐?”
옥순이가 건네준 찐쌀을 한 주먹 입에 넣고 깨물며 개울가 말풀들이 즐비하게 자라고 있는 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얼마 후 수문 앞에 닿았다. 거무스름하게 물이끼가 가득 낀 수문 콘크리트 벽 위로 여법 살이 오른 참게가 주둥이에 하얀 거품을 가득하게 내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떨어지는 물줄기를 차고 피라미가 뛰어오르다 힘에 겨운지 이내 물위로 떨어져 곤두박질쳤다. 그 틈 사이 아주 작은 새웅개 몇 마리 촐싹거리며 물위로 뛰어오르고 물길 잦은 풀숲엔 그만그만한 송사리 떼가 가볍게 몸을 숨기고 있었다.
학교 후문에는 앞서가던 아이들이 개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다가 선생님에게 걸린 듯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위에 손을 얹은 채 벌을 서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자 저마다 새 옷을 입고 교실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들이 곱살하게 보였다.
교실 안에는 추석 차례를 지낸 송편과 음식들을 나눠먹으며 추석 때 자기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었다. 교실 한쪽에서는 태풍 ‘사라호’에 대한 얘기도 하고 있었다.
‘땡 땡 땡 땡 …….’ 교무실에서 치는 아침 조례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서둘러 각자 제자리의 걸상에 앉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얼마 후 출석부를 옆에 끼신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셔서 칠판 위에 커다랗게 ‘사라호 태풍’ 이라고 글을 쓰셨다. 그리고 칠판 열에 걸린 세계 지도 중에서 일본을 지시봉으로 가리키시며 말씀을 하셨다.
“바로 엊그제 그러니까 추석날 새벽에 일본 영토 아주 남쪽 끝에 있는 섬 오끼나와를 통과한 태풍 사라호가, 제주도를 휩쓸어 수많은 사상자와 집을 잃은 수재민을 남겼다. 그리고 태풍은 다시 동남쪽으로 북상하여 부산과 그 주변 해안에 가까운 지역은 물론, 경상북도 일대를 강타하여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니 너희들은 같은 국민으로써 그 분들의 아픔을 마음에 새기고 하루 빨리 그 분들이 피해를 복구하고 상처가 달래질 수 있도록 너희들 모두 진심으로 빌어야 한다.”
한동안 장황하게 말씀을 하신 선생님이 잠시 멈춘 듯싶더니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더 궁금하거나, 알고 싶은 사람은 손을 들고 질문하기 바란다.”
선생님 말씀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 맨 뒤쪽 자리의 성태가 손을 번쩍 들고 일어서 선생님께 질문을 했다.
“선생님 일본 사람들은 우리나라 한티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망해 가지구 도망갔는디, 왜? 또 오끼나문가에서 태풍인가를 보내 가지구 우리나라를 괴롭힌데유?”
성태의 말이 끝나자 교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고 선생님도 껄껄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야, 오성태! 넌 그러니까 공부를 만날 꼴찌만 하지. 야, 이놈아! 공부 좀 해라. 공부 좀 그저 싸움이나 잘 하지 어디다 써 먹니?” “저는 유, 아까 선생님이 일본 나라 오끼나문가에서 태풍이 왔다구 해서 그랬는디유?”
성태가 재차 말을 하자 다시 온 교실이 온통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자 선생님도 어이가 없는 듯 성태를 바라보며 다시 말씀을 하셨다.
“오성태, 잘 들어. 오키나와에서 온 것이 아니고, 그보다 더 먼 남쪽 바다에서 태풍이 발생하여 일본 오키나와를 거쳐서 우리나라 제주도에 상륙한 것이다. 이제 알았냐?” “네!”
성태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아침 조회를 마치고 선생님은 교무실로 가셨다. 부끄러움이 컸었는지 성태가 교실 전체를 바라보며 조금 큰소리로 말을 했다.
“야, 니덜 내말 잘 들어. 아까 웃은 사람 내가 다 알고 있으닌께 함 두구보자. 내가 가만히 안둘 테니까! 그리구 너 윤석란이 니가 최고로 많이 웃었는디 두고 보자구.”
성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란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성태를 쏘아보며 말을 했다.
“야, 나만 웃었냐? 나만 웃었냐구?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그리구 니가 안 웃겼냐? 오끼나무가 뭐니? 아예 오동나무라구 해라!”
석란이 말이 끝나자 모두들 다시 웃으려 하는데 성태가 모두를 노려보아 웃지를 못했다. 그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웃음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는데 성태가 말을 이어갔다.
“야, 석란이 너는 공부를 잘해서 그러는가 본디, 오끼나무면 어떻구 오끼나오면 어떠니? 그게 뭘 중요허다구. 내가 잘못 들어서 그런 걸 가지구 참 그리구 인제는 뭔 일있어두 선생님한티 일러바치지두 못하긋네. 부반장두 아니닌께.” “너, 누구 약 올리는 거냐? 두고 보자. 내가 절대루 안 참을 테니께.” “야, 니 맘대루 혀! 두고 보자는 놈 하나두 안 무섭더라.”
교실 분위가 갑자기 싸늘해지자 성태의 눈치를 살피느라 모두들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있는데 부반장인 영선이가 성태와 석란이에게 말을 했다.
“성태야, 네가 말실수를 한 것은 맞어.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석란이와 타투지 말어. 그리고 석란이 너도 성태가 듣기에 거북한 말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어. 자꾸 말을 하면 서로 싸움만 되니까.”
영선이가 조리 있고 경우에 맞게 말을 하자 성태는 한발 물러서려 하였으나 석란이는 영선이를 향해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대꾸를 했다.
“야, 양영선! 너 지금 성태 편드네? 그렇구먼, 너 성태랑 가깝게 지내는 거 다 알아. 그리구 지난번 선거 때 너 찍어준 것도 내가 다 안다구.” “야, 석란아! 너 참, 고집 세네! 내가 누구 편을 드니? 다 같은 반 친구끼리. 그리고 성태가 나를 찍었는지 네가 어떻게 아는데? 네가 투표용지를 보았니?”
영선이가 말을 마치자 석란이가 다시 말을 하려는데 성태가 큰 소리로 떠들었다.
“야, 윤석란! 니가 어떻게 그런 말하는디? 내가 영선이 찍는 거 니 눈으로 봤냐? 봤냐구? 참, 귀신 곡할 노릇이네. 안 보구도 다 알구, 내가 있다가 선생님 오시면 물어 볼란다. 어떻게 안 보구 다 아느냐구, 선생님이 절대루 비밀 투표라구 했으닌께.”
성태의 강경한 어투와 성태의 성격상 틀림없이 선생님에게 질문할 것 같았다. 그러자 석란이가 불만스런 얼굴로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영선이가 다시 말을 계속했다.
“성태야, 아무리 네 생각이 옳다고 해도 이런 일을 선생님께 직접 질문하지 말어. 너 때문에 공연히 교실 분위기만 흐려지니까 알았지?”
그런 영선이의 말에 성태가 공감을 하는 것 같았다. 종일토록 수업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그 일에 대하여 성태가 입을 다물어 아무런 일없이 지나갔다.
하루 종일 그 넓고 누런 들녘을 헤집던 해가 서쪽 읍내 봉화재 너머로 몸을 감춘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등메산에도 골짜기마다 짙은 어둠이 괴어 있었다. 아마도 주현네 집에서 또 다시 비석골 무당 아주머니를 불러 치성을 드리고 있는 것 같았다. 등잔불빛이 흐릿하게 새어나오는 마을에서 꽹과리와 북소리가 멀찍하게 울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