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 덤불숲에 조만조만한 머루 알이 선명한 아침 햇살을 듬뿍 받으려 잎사귀 사이로 성긋하게 얼굴을 내밀었다. 더불어 나뭇가지에 섭섭하지 않을 만큼 매달린 도토리도 누르스름한 빛으로 야무지게 익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둔덕진 곳엔 검게 익어가는 산초나무의 열매가 짙은 내음을 멀리까지 풍겨냈다.
그렇듯 계절의 변화는 가을을 몰고 고적한 산자락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며칠 전부터 마당으로 내려서질 않고 볏짚 둥우리에 몸을 잔뜩 웅크리던 암탉 한 마리가 알을 품어 가을 병아리를 까려는 듯 했다. 어쩌다 둥우리 근처에 다가서려 하면 목둘레에 깃털을 바짝 세우고 부리로 사정없이 쪼으려 제법 암팡지게 사나움을 피웠다.
“상민이 에미! 상민이 에미, 집에 있어?”
아랫마을 기성이형 어머니가 밭에 일하러 오시다 볼일이 있으신지 사립짝을 들어서시며 어머니를 찾으셨다.
“어매, 기성이 엄니네! 어서 오세유, 먼 일이 있는감유?” “먼 일은 뭐. 먼 일이사 있을라구, 상민이 에미 읍내 가는 길에 뭐 좀 부탁할라구 허는디 뭐시냐 읍내 가면 까만 물감 좀 사다 줘, 돈일랑은 이따가 상민이 한티 맡겨놓을 틴께그리 알구 잊어번지지 말구 꼭 좀 사오라구.” “갑자기 물감은 뭐시다 쓸라구 그라남유? 어디 이불 껍데기라두 물들일라구유?” “아녀, 그런 게 아니구, 우리 기성이란 놈이 어제 읍내에 나갔던 모양인디. 윗도리에 군복을 걸치구 갔다가 재수가 없을랑께 하필이면 순사한티 딱 걸려서 등짝에다가 잉크로 대문짝만허게 뭐시라구 써 가지구 왔는디 도대체 볼썽사나워서 못 보것드라구. 기성이란 놈은 재수없다구 투털거리면서 절대루 안 입는다구 하는디. 촌에서 막일 허는디 그보다 질긴 옷이 어디 있는감? 그래서 그냥저냥 물들여 입힐려구 허는구먼.”
푸른 군복 겉옷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하여 기분이 언짢으신 듯 말씀을 마치시자 옆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 그런 일이 있었구먼유. 지가 잊어버리지 않구 꼭 까만 물감 사가지구 올틴께 그리 아세유. 허긴 읍내서 보닌게 군복 염색 안허구 입구 댕기다 걸리면 끌려가서 등판대기다 그 뭐시냐 잉크로 큼지막허게 '염색'이라구 글씨를 써 가지구 나오던구먼유.”
어머니가 슬며시 웃으시자 그제서야 기성이형 어머니도 잔뜩 굳었던 얼굴을 펴시고 함께 웃으셨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정부는 국방정책의 일환으로 강병육성을 위하여 제주도에 있던 육군훈련소를 폐지했다. 그런 후에 충남 논산군내 구자곡면 황산벌 넓은 들녘에 육군 제2훈련소를 신설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보다도 더 깊은 산속에 있는 작은 면소재지가 어느 날부터 군용 차량들과 군인들의 모습으로 부산스러워졌다.
더불어 전국 각 지역에서 이주를 해 오는 군인 가족들로 작은 시골 동네가 온통 붐비기 시작했다. 턱없이 부족한 주거 공간을 마련하느라 연일 집짓는 공사가 계속되었다. 톱과 망치소리 속에 비포장도로 양쪽 옆으로 나지막한 단층건물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연무대는 그렇게 새로운 군인도시로 서서히 탈바꿈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훈련병들의 면회가 실시되었다. 면회 날에는 전국 각지에서 자식들 면회를 하기 위해 수많은 면회객들이 몰려왔다. 그로 인해 그 좁은 시골 도로가 꽉 막힐 정도로 사람들이 운집해 장사진을 이뤘다. 면회 때 얻어지는 특수경기로 작은 면소재지가 갑자기 군내에서 제일가는 상권도시로 새롭게 형성되고 있었다.
그런 흐름 속에 군부대 주변에서는 암암리에 불법적으로 군용물이 유통되었다. 군복과 담요는 물론이거니와 담배와 건빵 그리고 반합 등의 식기류와 심지어는 겨울 속내복까지도 일반시중에 불법으로 흘러나왔다.
그리 심했던 군용물 불법유출을 차단하려고 관계 군 당국은 물론 경찰까지도 불법 군용물을 엄히 단속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중에서도 일반에게 가장 인기를 끈 것은 옷감이 질긴 군복과 폭신폭신한 군용 담요였다. 특히 군용 담요는 겨울철 농한기에 소일거리 없으신 동네 어른들이 화투를 치실 때 아주 요긴하게 쓰셨다.
그렇게 군부대가 들어선 후, 한사나흘 간격으로 군사격장에서 쏘아대는 총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더욱이 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그 소리가 더욱 가깝게 들려왔다. 이따금 밤으로 야간훈련에 조명탄을 쏘아 올려 우산을 펼친 것처럼 둥그렇게 퍼져나는 그 불꽃이 밤하늘에 곱살하게 수를 놓았다. 그곳에서 이십여 리쯤 떨어져 있는 우리 마을에서도 그 불빛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줄기와 이파리에 핏물이 번져나는 것처럼 불그레한 빛으로 알이 영글어가는 수숫대가 바람결에 반가운 듯 몸을 흔들어주었다. 학교로 가는 개울 둑길에는 두서너 살 아래 동생뻘 되는 동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뒤를 따라 오고 있었다.
마치! 구구단을 외우듯이 숨이 차오르게 줄줄이 이어 가다 흥에 겨운지 바로 이어서 불렀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 대대로 이어 사는 우리 삼천만, 빛나도다. 그 이름 대한이로세.”
개울둑 밭에는 새터 마을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깨 대를 한 움큼씩 손에 쥐고 깨를 털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콩밭에서는 아저씨 한 분이 허리를 굽혀 낫으로 콩을 베고 계셨다.
포근한 아침 해는 거무스레한 측백나무 학교 울타리를 벗어나 수문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불어오는 바람에 시냇물에서는 비릿한 물 냄새가 코끝에 와 닿았다.
새터 마을 나들목을 지나 측백나무 울타리를 반쯤 돌아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운동장에는 선생님 한 분과 학교 일을 하시는 양씨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과 소사 아저씨가 둥글납작한 가죽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줄자의 끈을 운동장 위에 길게 늘어트려 하얀 횟가루를 뿌리면서 굵은 선을 하얗게 그으셨다. 그 주위엔 아이들이 모여 구경을 하고 있었다.
‘땡땡땡댕’ 교무실에서 교감선생님이 치시는 종소리에 따라 아침 조회시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이 검은 뿔테안경을 위로 추켜올리시면서 말씀하셨다.
“오는 10월 5일 날 우리 학교 추계 운동회를 한다. 그러니 운동회 연습을 열심히 하기 바란다. 그리니 다들 운동복 준비하고 남자는 운동모자를 그리고 청군은 모자에 청색 띠를 붙이고 여자들은 청군은 청색, 백군은 백색 머리띠를 준비해 오길 바란다, 알았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들 좋아서 소리를 쳤다. 남달리 달리기를 잘하는 성태와 태식이가 제일 큰소리로 떠들자 선생님이 지시봉으로 교탁을 치시면서 다시 말씀하셨다.
“야, 다들 조용히 해! 조용히 하라고. 저 놈 성태 좀 봐라. 인제 공부 좀 덜하고 운동회 연습을 하니까 저리 좋다고 날뛰네.”
학급 번호 순번에 따라 홀수와 짝수로 나누어 청군과 백군으로 편을 갈랐다. 반장인 명식이와 석란이 그리고 옥순이는 청군이 되었다 그리고 영선이와 석란이 짝궁인 정순이와 성태는 백군이 되었으며 나도 백군이 되었다. 그렇게 양군이 서로 갈려 편성되자 정순이가 선생님께 건의를 했다.
“선생님, 저유! 청군하면 안 되유? 저 백군하기 죽어두 싫은디유.” “안 돼! 그냥 정해진 대로 해. 너 하나 바꿔주면 다 바꿔야 해, 그러니까 절대 안 돼.”
단호한 어투로 말씀하시자 정순이가 제 짝꿍인 석란이와 같은 청군이 되지 못해 못내 서운한 표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우리들 모두가 명절 다음으로 좋아하는 것이 가을 운동회였다. 그리고 그 다음이 봄가을 소풍이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매일 계속되는 시험 준비에 가뜩이나 실증이 나던 터라 운동회 연습은 더욱 신바람이 났다.
운동복은 러닝 티에 검정 팬티와 운동모자가 전부였다. 대다수 학생들은 읍내 가계에서 파는 운동복을 구입했다. 그러나 생활 형편이 여의치 못한 아이들은 누런 광목을 까맣게 물들여 운동팬티를 만들어 입었다. 허리가 닿는 부분에 검정 고무줄을 넣은 운동팬티를 입어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허리 부분에 불그레하게 고무줄에 눌린 자국이 났다.
여학생들은 덧신을 신었지만 남학생들은 모두 맨발로 운동회 연습을 했다. 처음엔 까칠한 모래에 발바닥이 닿아 후끈거리기도 하였으나 이내 익숙해졌다. 운동 연습 중에 넘어져 무릎이 까지거나 손을 다치면 교무실에 가서 빨간색의 머큐로크롬을 상처에 발랐다. 몸에 상처가 나도 운동회 연습은 모두들 하나 같이 즐겁기만 했다.
운동회 날에는 집에서 준비해 오는 여러 가지 음식과 각지에서 몰려오는 각종 장사꾼들의 모습과 여러 가지 물건들을 볼 수 있어 눈이 즐겁기만 했다.
그중에서 면내 각 마을에서 선출된 선수들이 겨루는 부락대항 이어달리기는 온 면민들의 시선을 한데 끌어 모았다. 그리고 성인 마라톤의 결승점에 골인하는 장면이 그리 보기 좋아 마냥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