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락 아래 소담하게 자릴 잡은 우리 마을은 하늘로부터 축복을 듬뿍 받은 땅임에 틀림없었다. 그러했기에 굳이 천혜의 땅이라 말하지 않아도 될 성싶었다. 눈 시리도록 푸른 하늘엔 옅은 조개구름이 알맞을 만큼 조화를 이뤄 곱살하게 펼쳐져 마음을 더없이 상쾌하게 했다. 그토록 청명한 하늘을 높이 우러러보며 가슴을 짝 펴고 두 팔을 벌려 몇 차례나 신선한 공기를 듬뿍 들이마셨다. 몸속 깊이 파고드는 신선함 속에 잠시인들 온갖 시름들을 모두 잊고 싶었다. 그 하늘 아래 아침 햇살에 반사된 뒤뜰 왕 소나무의 다복한 솔잎들이 상큼한 솔향기 속에 퍽이나 윤택하게 반질거렸다.
텃밭 모퉁이 감나무엔 불그스름하게 익어가는 탱글탱글한 감이 잎사귀 사이로 탐스럽게 보였다. 감나무 가지엔 서너 마리 까치가 꽤나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 가지 저 가지로 자리를 옮기며 장난스럽게 꼬리를 촐싹거렸다. 까치들의 요란스런 울음소리에 조금은 신경이 쓰이는지 쪽마루 앞 검둥이가 머릴 들어 바라보고 있었다. 부엌에 있는 물두멍에 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마을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다 채우려고 물지게를 지고 텃밭 앞을 지나 원두막 동근이네 밭에 닿았다. 참외 넝쿨을 걷어낸 밭엔 얼마 전에 소를 몰아 쟁기로 갈아엎고 가을 김장 무와 배추를 심었다. 그리고 연초록 잎들이 앙증맞게 자라 이젠 한차례 솎아줄 때가 되었다
채소밭에 벌레도 잡아주고 솎음을 하시려는지 키가 작달막한 동근이 아버지가 철길 건널목을 건너 밭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얼마 후 언덕배기에 오르신 동근이 아버지께서 잠시 발길을 멈추고 쉬어 가시려는 듯 펑퍼짐한 바윗돌 위에 앉아 계셨다. 물지게를 지고 언덕배기 위에 올라 동근이 아버지와 눈이 마주쳐 머릴 숙여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음, 상민이구나. 아랫마을에 물 길러 가냐?” “예.” “그려 암튼 애 쓴다. 어여 가봐.” “예 그럼 편히 쉬었다 가세유.”
두 그루 미루나무가 서로 의지를 하듯 맞바라보고 있는 방죽가를 지나 거북바위 앞에 닿았다. 면소재지로 곧장 이어진 달구지 길엔 오고 가는 인적이 하나도 없어 그리 휑하게 보일 수 없었다. 마을 앞 개울가 빨래터엔 동네 아주머니 한분이, 넓적한 빨랫돌 위에 옷가지를 얹어놓고 빨랫방망이로 세차게 두드리고 계셨다. 개울둑에 풀 뜯으러 어미 뒤를 따라가는 아기염소의 촐랑대는 모습이 그토록 앙증스럽기만 했다.
골목길 입구 첫들머리 우현이네집 안마당엔 여름내 애를 써 농사지은 빨간 고추가 멍석 위에 넉넉하게 널려 있었다, 그리고 마당 한쪽엔 우현이 동생 막내둥이가 보릿짚에 비눗물을 찍어 불어 오색영롱한 비눗방울이 온 사방으로 퍼져났다. 그런 모습이 그저 재미있는 듯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종구네 집 마당엔 머리 위에 빨간 혹이 달린 거위 한 쌍이 목을 길게 땅을 향해 늘어뜨려 달려들더니 이내 머릴 치켜세우고 ‘꺼억 꺼억’ 울어댔다. 종구는 교회에 가려는 듯 마른 걸레로 자전거를 정성스럽게 닦고 있었다.
연자방앗간 앞 마을놀이터에는, 동네 아이들이 모여 짤막한 나무토막을 긴 막대로 쳐서 거리를 재어 승부를 정하는 자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은 엎드린 가랑이 사이에 머릴 박고 말타기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동네 이장님댁 막둥이는 아직은 나이가 어려 위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추석날 면소재지 점방에서 산 듯싶은 작은 고무공을 가지고 한쪽에서 놀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할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할머니가 돌떡 받아 머리에 이고, 꼬불꼬불 산골길로 오실 때까지, 고추 먹고 맴맴, 달래 먹고 맴맴.”
놀이터 한쪽에서는 같은 또래 여자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며 노랫소리에 발을 맞춰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물가에는 언제 왔는지 나보다 먼저 온 옥순이가 김치를 담그려는지 함석으로 만든 함지박에 손을 넣고 솎음배추를 씻고 있었다.
“옥순아, 지금 오면서 보닌께 종구는 교회 갈라나 자전거 딱구 있던디 넌 교회 또 안 가냐?” “응, 인제는 그만 다닐라구 혀! 정숙이 보기 싫어서. 야, 상민아! 내 말 좀 들어 보라닌께, 저번에 교회 못 간 거 울 엄니가 고추 따라구 해서 못 간 거 너두 알지? 그런디, 정숙이란 년이 뭐라구 그러는 줄 아냐? 내가 영선이랑 짝궁 될라구 안 간 거라구 괜시리 트집을 잡더라 그리구 울 엄니가 가을바심 땜시 바뿌다구 못 가게 해서 당분간 안 갈라구 혀.” “음, 그랬구나! 참, 옥순아! 너 운동복 샀냐?” “아니, 아직은 못 샀는디 울 엄니가 돌아오는 장날에 사 준다구 했어, 너는?” “나두 울 엄니가 아침에 읍내 가면서 물두멍에 물 다 채워 노며는 저녁에 사온다구 했는디 몰르것다.”
언제나 그랬듯이 양쪽 물통에 담긴 물이 출렁거려 몸에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그런 상태로 물지게를 지고 가려니 힘이 들고 숨이 차올라 연자방앗간 앞 놀이터에서 지게를 벗어놓고 잠시 쉬었다. 고샅길에는 턱밑에 검은 수염이 가득하게 난 털보 엿장수 아저씨가 ‘찰캉 찰캉’ 엿가위를 치시며 종구네 집 앞을 지나 놀이터로 오셨다.
먹을거리가 귀했던 그 시절 동네 아이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엿장수 아저씨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하엿이 먹고 싶어 마음이 급해진 아이들은 헌 물건을 찾으러 저마다 자기 집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동네에 엿을 팔러 오는 아저씨는 턱밑에 검은 수염이 더부룩하게 나신 털보 아저씨와 등화동에 사는 키 작은 아저씨 그렇게 두 분이었다. 키 작은 아저씨는 하얀 가루가 덮인 가락엿을 팔았다. 그리고 털보 아저씨는 엿 목판에 널따랗게 깔린 엿 위에 빨갛고 파란색의 물을 들인 쌀가루를 뿌려놓은 박하 엿을 가지고 다니셨다. 박하엿은 납작한 쇠끝을 엿에 대고 엿가위 등으로 툭툭 쳐서 알맞은 양만큼 떼어내어 종이로 싸 주셨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양이 적다고 더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엿장수 아저씨들이 목판 위에 가져오는 물건은 엿 말고도 좀약, 바느질 실, 이약, 실핀, 옷핀 그리고 고무줄도 가지고 다니셨다. 엿 또는 물건과 바꾸는 고물은 떨어진 고무신, 찌그러진 양재기, 깨진 놋쇠 밥그릇, 주전자, 빈 소주병, 머리카락 그리고 잘 말린 노란 고추씨도 받아주셨다.
그래서 짓궂은 아이들은 종자를 하려고 남겨놓은 고추씨를 몰래 훔쳐 엿과 바꿔먹기도 했다. 고물을 찾으러 온 집안을 다 뒤지고 마루 밑까지 뒤지다 그래도 없으면 멀쩡한 고무신을 납작한 돌 위에 갈아 헌 신발을 만들었다.
그것마저도 안 되면 손가락을 고무신 속에 넣어 억지로 찢어 엿과 바꿔 먹고 나중에 어른들한테 들켜 부지깽이로 두들겨 맞고 집을 쫓겨나기도 했다. 동네 고샅길을 빠져나와 둥구나무 앞에 잠시 쉬고 있었다. 그때 군산 고무신 공장에 다니는 용숙이 누나 동생 용성이가 어깨에 망태기를 메고 제 동생하고 둘이서 걸어왔다.
“용성아, 너 어디 갔다 오냐? 그리구 망태기에 있는 건 뭐냐?” “응, 상민이 형! 이거 토끼 새낀디. 추석 때 우리 누나가 준 용돈 허구 내 동생 돈 합쳐 가지구 남산리에 가서 사오는 거여.”
망태기 속에 담긴 새하얀 털에 눈이 빨간 예쁜 토끼 새끼 두 마리를 보여주었다. 나는 부러운 눈으로 참으로 귀엽기만 한 토끼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어머니가 아침 일찍 장사를 나가시면 텅 빈 집에 언제나 홀로 남는 외로움에 지쳐 있었다. 그래서 어린 토끼를 바라보면서 한번쯤 키워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녁에 어머니가 장사를 끝내고 돌아오시면 사달라고 말씀드리려고 했다.
개울둑엔 순아네 송아지가 어미젖을 암팡지게 빨고 그런 모습 마냥 귀여운가? 어미 소가 혀로 송아지 머리를 가볍게 핥아주고 있었다. 따끔거리는 한낮 햇살에 머릴 숙여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불어오는 갈바람에 물결치듯 일렁거렸다.
추색이 완연한 들녘을 가로지르는 기차는 검은 연기를 푹푹 토해 하늘 높이 흩날리며 마을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