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장을 활짝 펼치는 햇살에 눈이 잔뜩 부셨다. 울타리 너머로 조금 멀리 바라보이는 서낭당 고갯마루엔 아주 큼직한 당산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을 견뎌 온지라 섣불리 수령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래된 고목이었다. 그런 연유로 겉으로 드러나는 그 위용이 자못 웅장 했다. 예로 부터 그 당산나무에는 민초들의 한이 서려있는 온갖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해 내려왔다. 전해 내려오는 온갖 이야기들 중에는 그럴 법하게 믿겨지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지각이 더딘 어린나이라고 해도 과연 그랬을까? 할 정도로 의구심이 드는 이야기들도 함께 뒤엉켜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당산나무 인근에 사는 여러 마을의 사람들이 그 나무를 영험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일이 쉽사리 잘 풀리지 않을 때나 마음속으로 간절하게 바라는 소원이 있을 때에는 곧 잘 그 곳에 들려 두 손을 모아 치성을 드렸다. 그렇게 당산나무는 민초들의 한으로 얼룩진 아픔을 어루만져 달래주며 세월의 테를 두루고 있었다. 그 당산나무 우듬지 위에는 솜털 구름 한 점이 앙증맞게 발돋움을 하고 있었다.
서낭당 고갯마루 아래로 기다랗게 펼쳐진 둔덕 밭엔 새하얀 메밀꽃이 꽉 들어차 불어오는 산바람에 하얀 물결처럼 일렁였다. 싸리울 너머로 바라보이는 아랫마을엔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것처럼 올망졸망 머릴 맞댄 초가지붕 굴뚝에서 아침연기가 하늘 위로 검뿌옇게 흩어지고 있었다.
한 해 동안 뼈 빠지게 땀 흘려 지은 벼농사의 결실을 거두려는지 풍요롭기 더없는 들녘엔 고개 숙인 벼들이 놋황색 물결로 장관을 이루었다. 논배미 군데군데엔 두 팔 벌인 허수아비가 넓은 들녘을 홀로 지키고 있었다. 논배미 사방으로 연결된 새끼줄에 매단 얼룩덜룩한 헝겊조각들이 부는 바람에 제가끔 펄럭였다.
철롯길 전봇대 전선줄 위에 까막까치 두어 마리가 한동안 시끄럽게 우짖어댔다. 그러다 산모퉁이 돌아 나오는 기차소리에 놀란 듯 후다닥 산기슭 밭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뽕나무 가지 사이를 그리도 부산스레 휘돌던 참새 떼들도 불그레하게 목을 숙인 수수밭으로 떼를 지어 도망치듯 날아가고 있었다.
목화송이가 새하얗게 여물어가는 기순네 밭을 지나 개울 둑길에 내려섰다. 풋벼바심을 마친 논에 가을보리를 심으려는지 순아네 소가 논바닥을 갈아 뒤엎어 쟁기를 몰고 가는 어미 소 뒤를 송아지가 껑충껑충 따라가고 있었다. 갈아엎은 논고랑 흙속에 꾸물거리는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동네 꼬맹이들이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뒤를 따라가고 있었다. 냇둑 위에는 등교 시간에 늦을 새라 학교를 향해 뛰어가는 동네 아이들의 모습이 활기차게 보였다. 어깨에 둘러멘 책보자기에선 필통 속에 연필이 부딪히는 소리가 ‘딸랑 딸랑’ 들려왔다.
동구 밖을 바라보니 철길 건널목을 넘어서는 옥순이가 조각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냇가 수문 옆 논가에는 볏짚으로 지붕을 이은 작달막한 새막에서 노인 한 분이 ‘훠이 훠이’ 하고 쉰 소리를 내면서 팡개질을 하여 새떼를 쫓고 계셨다. 높다란 측백나무 울타리 너머로 확성기에서는 운동회 노랫소리가 커다랗게 온 들녘으로 울려 퍼져 운동회 분위기를 한껏 고취시키고 있었다.
맑게 갠 드높은 하늘아래 운동장에는 전교생이 한데 모여 선생님들과 함께 음악소리에 맞춰 보건체조를 했다. 그러나 아직 연습이 덜된 탓으로 동작들이 일치하지 못하여 움직이는 모습들이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운동회 날이 목전에 다가오자 낮은 학년의 학생들은 오전 연습만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5,6학년은 오전에만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해가 어둑해질 때까지 운동회 연습을 열심히 했다.
남학생들은 장애물 경기와 기계체조, 기둥 넘기기를 그리고 기마전을 연습했다. 그리고 여학생들은 내빈경기와 여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고전무용인 부채춤을 단체로 연습했다. 각 학년 각 학급에서 선출된 달리기 선수들이 청백으로 나뉘어 계주 연습도 하였고 각 팀 응원단장의 동작에 따라 응원연습도 꽤나 열심히 했다.
그렇게 온종일 연습을 하고 나면 온몸이 흙먼지로 뒤덮여 목이 칼칼하고 발가락 사이에는 황토 흙가루가 땀에 베어 묻어났다. 그런 탓에 점심 도시락을 먹었는데도 저녁녘에는 배가 몹시 고팠다.
중간 쉬는 시간에 풋벼를 베어 찐쌀을 마련한 집 아이들은 불룩 튀어나온 아랫주머니에서 찐쌀을 꺼내 입 안 가득 한 움큼 넣고 맛있게 씹어 먹었다. 그러지도 못한 약삭빠른 아이들은 학교 뒤편 울타리를 비집고 넘어 남의 고구마 밭을 몰래 후벼 파서 고구마를 캐냈다. 붉은 황토가 눅눅하게 묻은 고구마를 잔디 풀에 쓱쓱 문댄 후 이빨로 껍질을 벗겨 선생님께 들킬까 두려워 울타리 무궁화 나무숲이나 교실 한 모퉁이에 숨어서 잽싸게 먹었다. 그 다음날에는 고구마 밭주인이 학교로 찾아와 선생님이 화가 나서 누가 그랬냐고 물으시면 딴 곳을 바라보며 능청을 떨었다. 어쩌다 운이 나빠 들키는 날에는 호된 벌을 받기도 했다.
운동 연습을 하느라 목이 얼마나 말랐는지 몰랐다. 학교 우물가에는 아리들이 참새 떼처럼 몰려 우물을 에워싸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려 서로 입들을 대고 벌컥벌컥 마셨다.
온종일 운동장 하늘 위에서 같이 놀던 하루해가 서쪽 읍내 봉화재에 턱을 걸쳐 넓은 운동장가에 어둠이 서서히 깃들기 시작하면 그제서야 운동 연습을 끝마쳤다.
교실로 들어온 우리들은 하루 종일 지속된 연습으로 모두들 지쳐 있었다. 더불어 선생님께서도 무척이나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종례시간에 선생님이 각 마을에 사시는 면내 유지들에게 보내는 운동회 초청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아이들에게 각각 나눠주시며 당부를 하셨다. 틀림없이 정확하게 전달해야 된다고 몇 번을 말씀하시고 운동복 준비가 덜된 학생들에게 준비를 독려하셨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교문을 나와 새터 마을 끝머리 집에 닿았다. 울타리에는 탱자가 탱글탱글하게 익어가고 울안에서 모과냄새가 울타리 밖으로 퍼져 나와 배고픔을 더욱 부채질 했다. 잠시 발을 멈춰 서려고 하자 길동무 옥순이가 서둘러 뛰어오며 나를 불러 세웠다.
“야, 상민아 같이 가, 같이 가자구! 너만 그렇게 빨리 가면 어쩌냐?” “너는 뭐하는디 맨날맨날 늦게 오구 그러냐? 빨랑 와, 나 배고푸단 말여!” “상민아, 우리들 무용 가르치는 선생님 무지허게 싸납다. 쪼매만 틀려두 엄청 혼내키구 그려. 그렇게 싸나워서 올가을에 시집을 어떻게 갈라나 몰라!” “응, 그럼 그 선생님이 이번 가실에 용꽃 양조장 큰 아들하구 결혼한다는 그 선생님이냐?” “응, 그렇타니께, 겉으로는 그렇게 안 보이는디 얼매나 싸나운지 몰라. 걸리면 절대루 용서 없어, 먼젓번에는 석란이도 무지하게 혼내켰어, 그래서 석란이가 엄청나게 울었어.” “그건 뭐 지가 잘못 했으닌께 혼난 거겠지, 그런 걸 가지구 울고 그런다냐? 참! 어린애처럼.”
읍내 봉화재에 불그레한 노을자락을 남기던 저녁 해가 아쉬운 듯 언덕 아래로 기울어가고 있었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찾아드는 새터 나들목을 지나 언덕배기를 넘었다. 비석골 공동묘지 묏등 앞을 지나려는데 덤불숲에 숨어 있던 꿩 한 마리가 푸다닥 소리를 내며 비석골 쪽으로 날아갔다.
옆에 따라오던 옥순이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책 보따리를 땅에 떨어뜨리고 나를 왈칵 끌어안았다. 엉겁결에 나도 깜짝 놀라 몸을 함께 움직이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몹시 부끄러운지 옥순이가 얼른 나를 밀쳐 떨어지면서 말을 했다.
“어매, 놀래라! 무신 귀신이라두 나오는 줄 알았네, 에휴.” “야, 빙신아! 귀신은 무신 귀신이냐? 귀신이 어디 있냐구?” “음, 그런디 순아네 할머니는 그 전에 백여시랑 귀신을 참말루 보았다구 하던디, 아닌감?” “너는 아니라닌께 그렇게 우겨쌌냐? 그건 밤에 산으루 들루 늦마실 다니는 동네 누나들 바람난다구 겁을 먹게 해서 일찌감치 집에 들어가게 할라구 동네 어른들이 거짓부렁이로 맨들어낸 말이라구 울 엄니가 말했어.” “정말루? 나는 그런 줄두 모르구 있는가? 없는가? 양쪽으루다가 생각했었다.” “에이구 빙신, 그것두 몰르구!” “야, 뭐가 빙신이냐? 너두 니 엄니가 알켜줘서 알었구먼, 뭘 그러냐?”
어둠을 가득하게 산자락에 두른 등뫼산은 새로운 내일아침을 기다리나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둑어둑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동네 모습 속에 뜨문뜨문 흐릿하게 등잔불빛이 보였다. 마치 여름밤 풀잎에 띄엄띄엄 보이는 개똥벌레 같았다. 산 계곡 아래서는 서울로 향하는 밤 열차의 기적소리가 아주 가늘게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