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읍스름하게 색 바랜 초가지붕엔 박 넝쿨과 잎사귀가 온통 뒤덮여 있었다. 짙푸른 잎사귀 사이로 하얀 박이 둥그런 배를 봉긋하게 드러내어 퍽이나 정감 어리게 보였다. 아침 이슬에 누르스름한 잎들이 눅눅하게 젖어 있는 밤나무는 저마다 앞을 다퉈 입을 벌려 검붉은 밤알이 알차게 드러나 보여 그 또한 풍요롭기만 했다.
검게 그을린 굴뚝엔 아침밥을 짓는 연기가 땅으로 낮게 흐트러져 싸리 울타리를 힘겹게 넘을락 말락 하고 있었다. 부엌에서는 코에 익숙해진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온 집안에 배어나왔다.
흙벽과 서까래가 마주 닿은 구석진 곳에 언제 지었는지 둥그런 흙덩어리에 구멍이 뻥뻥 뚫린 말벌집이 큼직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 주위를 벌들이 쉴 새 없이 윙윙대며 맴돌고 있었다. 무심코 그 근처에 다가섰다 불시에 공격이라도 당할 까봐 왠지 꺼림칙했다. 그 숱한 곳 중에 하필이면 집안에 벌집을 지어 은근히 부담을 주는지 조금은 불만스러웠다. 윙윙대는 벌들의 소리가 신기한 듯 마당을 거닐던 검둥이가 겁도 없이 귀를 갸웃거리며 슬금슬금 다가서려 했다.
봉창 문 옆 서까래에 새끼줄로 매달아놓은 볏짚 둥우리 속엔 알을 품은 암탉 한 마리 몸을 가득 움츠려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둥이가 둥우리 부근에 어슬렁거리자 털갈이를 하려나 듬성듬성 털이 빠진 수탉이 퍽이나 신경이 쓰이는 듯 목을 한층 곧게 쳐들고 쏘아보고 있었다. 이제 얼마큼 지나고 나면 알에서 깨어난 샛노란 가을병아리들이 앙증맞게 앞마당에 종종걸음 할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부푼 기대감 속에 마음이 부듯해졌다.
울 너머로 시선을 모아보니 노랗게 색 바래져 가는 가로수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신작로에는 화물차 한 대가 고장이 난 곳을 고치려는지 멈춰 서 있었다. 가을바심을 하는 농번기여서 그런지 주막집 정류장에는 여느 날과는 달리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겨우 한두 명뿐이라 고적하게 보였다.
요 며칠 전에 어머니께서 방안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 정성껏 띄우신 담백한 맛이 우러나는 청국장에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사립짝을 나서 학교로 향했다. 기다란 다랑이 밭에서는 기순이 어머니가 목이 긴 양말 속에 살충제인 D.D.T 가루를 넣고 회초리로 두드려 무며 배추에 약을 뿌리고 있었다. 아래 밭에서는 동근이 아버지가 울퉁불퉁한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나무를 꺾어 만든 집게로 배춧잎에 들붙어 있는 벌레를 잡고 계셨다.
고구마 밭고랑에는 갈라진 흙 틈사이로 여법 알이 굵은 고구마가 불쑥불쑥 등 언저리를 드문드문 드러내어 먹음직스레 보였다. 누렇게 익은 차조가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흔드니 뒤따라 수숫대도 숙인 목이 마냥 무거운 듯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텃밭 주변에는 이슬에 젖은 잎사귀들이 탱탱한 아침 햇살에 앞 다퉈 반짝거렸다.
이른 아침부터 학교 확성기에서 울려 퍼지는 행진곡 소리가 온 들녘에 들려왔다. 여느 때처럼 밭둑길을 지나 건널목에 내려서는데 자전거가 고장 났는지 종구가 몸을 구부려 자전거를 붙들고 쩔쩔매고 있었다. 다소 서먹한 마음에 앞으로 다가서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종구야, 자전거 고장 났냐? 내가 붙잡아 줄까?”
어깨에 둘러멘 책보자기를 얼른 벗어 땅에 내려놓으려 하자
“놔둬, 니가 안 도와줘두 되, 내가 다 알아서 할 틴께, 걱정 말구 니 할일이나 혀.”
종구가 귀찮다는 듯이 내 얼굴을 바라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쏘아붙여 엉거주춤하며 다시 말을 했다.
“나는 그냥 도와줄라구 그러는 건디.” “아, 글쎄! 필요 없다닌까, 왜 자꾸 그러냐구? 귀찮게시리, 에이.”
종구가 짜증스럽게 말하며 자전거를 일으켜 세워 손으로 끌고 다시 동네로 되돌아갔다. 몹시 무안해진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냉정하게 대하는 종구의 태도에 다시금 서운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지난여름 비석골에서 싸운 일로 아직은 감정이 덜 풀려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먼젓번 교회 앞에서 사과를 하였을 때도 그렇고 또다시 거절을 당하고 나니 더욱 민망스러워 말을 붙였던 것이 한편으로는 후회스럽기도 했다. 같은 해에 같이 태어나서 마을 밭머리에 같이 태를 묻은 사이이거늘 …….
그렇게 나와 얽힌 감정의 폭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지속되어 가고 있었다. 아무런 사심 없는 순수한 우정으로만 대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종구는 나와의 사이에 쌓인 감정의 골이 깊은지 좀처럼 근접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런 머쓱한 내 감정을 표현하기라도 하는 듯 햇빛이 완연한 날씨인데도 갑자기 여우비가 내려 근처에 있는 새막으로 얼른 뛰어가 비를 피했다. 새막 추녀 밑에서 서성이는데 아침부터 바지런한 참새 떼들은 주인이 없는 틈을 노렸는지 벼 이삭에 달라붙어 요란스레 재잘거리고 있어 참으로 얄밉게 보였다. 참새들을 쫒으려고 논배미의 사방으로 늘어트린 새끼줄을 신경질적으로 잡아당기자 줄에 매달려 있던 깡통들이 꽤나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자 깡통 소리에 놀란 참새들이 혼쭐이 나도록 하늘 위로 날아 어디론가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제서야 방금 전 종구 때문에 다소 의기소침해졌던 기분이 다소는 풀리는 듯했다.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겁게 한차례 스쳐 지나 비가 멈추고 말았다. 물기에 젖은 풀 잔디 풀이 반질거리는 개울가에 듬성듬성 피어 있는 코스모스 꽃들도 실비에 가볍게 젖어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풀숲사이엔 구절초가 꽃잎을 수줍은 듯 내밀고 땅에선 짙은 황토 내음이 습습한 바람결에 콧속 깊이 묻어났다. 그렇듯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은 한결같이 평온 속에 시로 은혜롭기만 했다.
학교 운동회가 한 사날 앞으로 다가 온 탓인지 선생님들의 발걸음이 점차 바빠지셨다. 학교 교무실 앞에는 소사 일하시는 양씨 아저씨가 창고에서 꺼내 온 본부석과 내빈석에 칠 천막을 햇볕에 말리려 널따랗게 펼치고 있었다. 그 옆에서 영선이가 자기 삼촌의 일을 도와드리는 것 같았다.
얼마 후 면소재지 화산리에서 점방을 하시는 강씨 아저씨가 짐자전거 타고 교무실 앞에 닿았다. 운동회 날 우승자에게 나눠줄 상품인 공책과 연필을 한 짐 가득 실고 오셔 두 팔로 가득 끌어안아 교무실로 나르고 계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들 중에 달리기를 유난스레 잘하는 성태와 명수는 상품으로 나눠줄 공책과 연필 묶음을 보고 자기들이 기다리던 것이 온 것처럼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생각을 했다. 있는 힘을 다해 일등은 못하더라도 상품을 받을 수 있는 3등이라도 하여 그 날 구경을 오시는 어머니에게 작은 즐거움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아침 전체 체조를 실시하려는지 5학년 1반 담임선생님이 하얀 트레이닝복에 하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시고 교무실 현관 밖으로 나오셨다. 선생님 목에는 은빛 번쩍이는 호루라기가 걸려 있었다. 그리고 단단한 나왕목을 길쭉하게 잘 깎아 만든 지시봉을 들고 계단을 내려서 운동장으로 걸어오셨다.
교무실에서는 교감 선생님이 아침 조회를 알리려는지 창문 밖으로 손을 길게 내밀어 추녀 끝에 매달아 놓은 종을 세차게 두드리셨다.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앞 다퉈 운동장으로 뛰어나오고 선생님들도 한 분 두 분씩 교무실을 나오고 계셨다.
바로 그때 종구네 집 머슴살이를 하는 용만이가 엉덩이를 잔뜩 치켜들고 페달을 급하게 밟아 운동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짐자전거 뒤에는 용만이의 겨드랑을 바싹 움켜잡은 종구가 타고 있었다. 검정 콜타르칠을 한 목조 건물인 교실 앞에 자전거가 멈춰 서자 종구가 얼른 자전거에서 뛰어내려 책보자기를 교실에 가져다 놓으려고 급히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학교로 달려온 용만이는 종구가 자전거에서 내리자 다시금 방향을 돌려 마을로 가기 위해 조금 전과는 달리 자전거를 여유 있게 몰며 교문 밖으로 나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