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부터 소릿재 너머 부지런히 내달려온 아침 해가 잠시 동안이라도 쉬어 가려나 텃밭 수숫대 우듬지에 여유롭게 머물고 있었다. 햇빛이 봉창 문 안으로 스며들어 어둑한 방안을 다소나마 밝게 했다. 산마루턱에서 불어오는 갈바람이 뒷산 왕 소나무 솔잎에 부딪히는 소리가 ‘쏴아’ 하고 시원스레 들려왔다.
면소재지로 이어지는 둔덕마루엔 허연 목을 길게 빼어 내밀어 엄청스레 키가 자란 억새가 빼곡하게 들어차 군락을 이뤘다. 부는 바람결 따라 낭창낭창한 몸을 이리저리 흔들어댔다. 싸리 울타리에 몸을 눕힌 누런 호박 한 덩이가 아침 이슬에 젖어 미련스러울 정도로 풍만하게 배를 내밀고 있었다. 두엄 가 맨드라미도 여름내 더위에 시달려 지쳤는지 검붉은 얼굴로 오도카니 서 있었다.
종일토록 운동회 연습을 하느라 힘들다고 저녁에 장사를 다녀오신 어머니께서 밤늦도록 물동이로 물을 길어 나르셨다. 그래서 일요일만이라도 내가 물두멍에 물을 채우려 철길 건널목을 넘어 방죽가를 지나고 있었다.
기현네 집 울타리에는 줄기에 억센 가시가 촘촘하게 박힌 탱자나무 누런 잎 사이로 노란 탱자가 알차게 익어 탱탱하게 영글고 있었다. 며칠 사이 더욱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불어오는 갈바람에 남실남실했다.
우물가에서는 점례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젯밤에 점례네 아버지가 샛강에서 횃불을 밝혀 잡아 온 윤기가 흐르고 집게 발가락에 털이 무성하게 난 참게를 깔끔하게 씻고 계셨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그런 모습이 부러우신 듯 잠시 일손을 멈추시고 바라보고 있었다.
허연 거품을 내는 참게를 보며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다. 이번 운동회가 끝나면 일요일 날 오후에 주현이와 함께 샛강에 참게를 잡으러 가려고 생각했다. 모두들 참게 구경을 하고 있는데 병수어머니는 잔뜩 부루퉁한 얼굴로 애꿎게 함지박 속에 들어 있는 감자만 북북 문대고 계셨다. 아마도 술을 그리 좋아하는 병수 아버지가 들녘에 일은 안 나가시고 낮술에 취하셔 병수네 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하신 것 같았다.
물지게를 등에 지고 방앗간 앞에 닿았다. 가을 바심 탈곡 준비를 하시려는지 순태 아저씨가 발동기를 손질하고 계셨다. 담 너머 종구네 집 안마당엔 종구가 교회에 가려는지 자전거를 끌고 대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골목길 양쪽으로 줄지어 선 동네 집들 마당에는 저마다 깨를 터는 일과 콩 타작을 하고 있었다.
마을 우묵배미 논가에는 둥글넓적하게 생긴 바위가 어른 허리만큼 솟아올라 있었다. 고된 들녘 일을 마치고 새참을 먹고 쉬기에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남보다 일찍 서둘러 벼 베기를 하는 삼식이네 논에 품앗이로 일하시던 동네 아저씨들이 잠시 쉬려나 양쪽 팔에 걸쳤던 토시를 벗으면서 바위에 앉으셨다.
물지게를 지고 오느라 숨이 차고 힘이 들어 바위에 앉아 잠시 쉬었다 가려고 물지게를 벗어 놓고 있었다. 그때 동네 어귀 나무다리를 건너오신 홀태바지에 허리를 헝겊 끈으로 바짝 졸라맨 새터 마을에 사시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였다.
양쪽 볼따구니에 살이 두툼한 덩치가 큰 검정 수퇘지를 앞세워 회초리로 몰며 동네 어른들 앞으로 다가오며 말씀을 하셨다.
“다덜 일덜 허느라구 욕덜 점 보는구먼 그려.”
그러자 고추 농사를 많이 지으시는 준섭이 아버지가 반가워하며 말씀하셨다.
“어여 와, 동상, 동네 구장네 집 암퇘지랑 즙붙이러 가넌 몬양이구먼, 안 그래두 구장이 아침부터 쌔빠지게 기다리던구먼 그려.”
그러자 옆에 앉아 쉬고 있던 창섭이 아버지가 한마디 거드는 척하시며 말을 이으셨다.
“성님, 누가 뭐라싸두 저 넘이 성님헌티는 효자 노릇 많이 했지라우? 돈두 나소 벌어 들였을꺼구.” “돈은 먼 넘에 돈이랑가, 그저 노느니 술값시나 하는 거지 뭐”
그러자 우직해도 바른말 잘하기로 소문 난 삼식이 아버지가 나서서 말씀하셨다.
“암튼 자네는 온 사방간디다가 도야지 미누리 많이 둬서 참말루 좋긋네 그려.”
삼식이 아버지의 말씀에 모두들 걸걸대고 웃으시자 새터 마을 아저씨도 같이 웃으시며 말을 바로 받아치셨다.
“예끼, 이사람! 그걸 말이라구 허능가?”
그러자 삼식이 아버지가 멋쩍어하시며 잠시 웃음을 멈추고 다시 말씀하셨다.
“농삿일이 하두 되니께, 그냥 한번 웃자구 허본 말이네 그려, 맘에 담지 말게나, 기나지나 그넘, 붕알 한번 실팍허게 생겼네 탱글탱글한 것이 씨알이는 잘 들긋구먼, 그려.”
새터마을 아저씨가 돼지를 몰고 동네 들머리 나무다리 위를 건너셨다. 삼식이 아버지가 바위 위에 놓인 겉옷 속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아참, 자네들 소문 들었는감?” “소문은 뭔 소문이래유? 그저 앞뒤 다 짤라먹구 소문이라구만 허니.”
무척이나 궁금한 얼굴로 경수 아저씨가 턱을 앞으로 내밀며 재촉이나 하듯이 말씀하셨다.
“음, 나두 자상하게는 몰르것는디. 동네 여편네들 주딩이루 소문이 죄다 퍼져번져 동네 여자덜은 어지건히는 다 아는 모양이던디.” “아따, 성님 질질 끌지 말구 퍼득 야기를 혀 보시유 잉, 사람 답답허게스리.” “그러닌께 그게 뭔말인고 허니, 동섭이 승님 딸, 갸 이름이 머시더라?” “정희유? 근데 정희가 먼일이라두 있능감유?” “음, 그려 정희 맞구먼. 아 글씨 갸가 기성이랑 붙어 묵어 가지구 아를 뱃다구 허던구먼, 그려.” “워미, 그게 참말이랑가유? 내 으전찌, 그전에 장날에두 보면 기성이랑 정희가 늘쌍 같이 붙어 댕기구, 밤이슬 맞구 셋강 철교 밑에서 만나는 거 두어 번인가 봐서 쪼까 이상타구는 혔는디 그여 일을 저질러 번졌구만유.” “그러니 동십이가 누군가, 그 놈에 승질머리에 지 딸내미 그리된 거 알게 되면 다리몽댕이를 딱허니 뿐질러 놓구 말지 절대루 가만 안둘건디. 참 큰일이구먼 그려 아직까장은 암껏두 몰루구 있는 모양이구먼 그러닌께 이로콤시루 조용허지.” “에이구 성님, 큰일은 머시가 큰일이래유.머심아 지지배가 서로 정분나서 만나는거시사죽은 조상님두 못 말리는거유, 뭐시냐 둘만 좋타믄 사길 수도 있는거구,글타가 으찌으찌 혀번지다보면 그리 그리 돼번지구 마는건디유 뭐.” “허, 이사람 말허는거 쫌 보소, 뭐가 그리그리 된다는건가, 말이면 다 허는 줄 아는감? 암튼, 또 한바탕 동네가 시끌짝해질 판이구먼 그려.” “아따. 성님 그런 걱정이랑 아에 붙들어 매두시유, 왜냐면 성님두 생각해 보시유, 자기 체면이 있는디 아 그걸 죄다가 드러 내놓고 동네에 소문나게 하건는감유, 안 그래유? 그리구, 이왕지사 그리 돼번진 거 으짤께유. 지들 좋다면 짝이나 져 주야지유 뭐, 별 도리 있남유.” “그리만 되면야 좋것지만서두, 그게 좀 어려울 걸세 그려, 뭐시냐 지난 번 인공난리 때 기성이 애비 죽은 걸루 두 집 간에 사이가 아주 않 좋은디다 뭐시냐 지난 봄 가뭄에 못자리헐 때 그넘에 물땜시 서루 멱아지 잡구 박터지개 싸워서 읍내 경찰서까장 안 갔다 왔는감.” “알지라우, 다 지나번진 일이지만, 그때는 기성이란 넘이 좀 심했지유.지보다는 한참 어른인디 동섭이 성님을 논두렁에 꺼꾸루 갖다 처박었으니 동섭이 성님이 그럴만두 하지유, 뭐." “아무턴 간에 큰일은 일어난 기여, 동섭이 지 여핀네 그리 허망하게 가번지구, 그런 일 터져 번졌쓰니 누굴랑 나서서 일을 처리 할 끼여, 그건 그렇구 어여들 일어나 일덜 허드라구, 쪼매 있으면 새참 나오긋구먼, 그려.”
지난봄부터 연자방앗간 대문짝에는 동네 어느 개구쟁이가 써 놓았는지 기성이형님하구 정희누나가 연애를 한다고 크레용으로 낙서를 해 놓은 적이 있었다. 그 시절에는 총각 처녀가 연애를 해도 남의 입술에 오르내렸다. 더더욱 한 동네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큰 흉으로 알아 온 동네 소문이 떠들썩하게 났다. 더욱이 딸을 가진 부모들은 남 보기 남우세스러워 바깥출입도 못하게 집에 가둬놓고 감시를 했다. 심한 경우에는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 밖으로 다니지도 못하게 했다.
이제 한동안 조용했던 마을이 기성이형과 정희누나의 일로 어떤 형태로든 다시 소란스러워 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