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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8 조회 : 2,189




착 가라 앉은 마음에 밤의 여운이 울먹일 정도로 묵직하게 느껴졌다.
그 이유가 험난하게 쏫아져 내리는 폭우 때문만은 아니였다.
그 보다 엄청스레 큰 아픔의 덩어리가 질풍 속에 노도처럼 밀려와 잔인하리만큼 지속적으로 숨통을 조이기 때문이었다.

어둠이 정점으로 치닿는 자정을 갓 넘길 무렵이었다.
그리 억척스레 퍼붓던 장맛비가 제 풀에 지친 듯 기세를 누그러 트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 종일토록 지루하리만큼 퍼붓던 비가 끝맺음을 하였다.
그러나 칙칙하게 짙어진 어둠은 암팡지게 똬리를 틀고 이제 곧 도래될 이른 새벽녘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명은 끈질기게 들붙으려는 어둠의 늪을 헤집어 하루의 장을 열려고 하였다.
더불어 온 누리에 찬란한 빛을 비춰주려고 혼신에 여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 찬란한 빛이 내 부모와 내 삶에 그침새 없이 비춰주길 늘상 마음 속으로 빌며 살았다.

그 무렵 내 부모님들의 지극한 사랑 속에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함 없이 잘 자라고 있었다.
가슴 쫙 펴고 자유롭게 숨을 내쉴 수 있어 더 바랄 것 없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간절하게 열망하는 내 삶의 지향점이었다.
더불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요체(要諦)라는 생각을 늘상 거듭해 보았다.

역사의 흐름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쉴틈없이 전개되는 것이라 믿고 살아왔다.
그 역사의 흐름은 순환의 틀 안에서 뭇인간들이 저질러 놓는 온갖 기쁨과 슬픔 그리고 애틋한 사랑과 처절한 미움까지도 묵묵히 아듬으려는 것 같았다.

허나 그것은 광풍이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미쳐도 아주 미쳐버린 바람이었다.
그 저주스러운 미친 바람이 한 순간에 내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아 버렸다.

‘인간만사 새옹지마’라고 평온하기만 했던 내 집이 놈들의 가장 악랄한 작태로 여지없이 파멸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온 집안을 아픔의 중압감이 짓누르기 시작했다.

지아비의 아내이자 어린 자식의 어미로서 큰 욕심 없는 아주 평이한 삶을 갈망했던 나약한 아녀자에게 하늘은 너무도 커다란 아품을 안겨주었다.
더불어 감당하기 너무도 힘겨운 고난에 멍에를 억지로 걸머지게 했다.
또한 티 없이 자라나야 할 내 어린 육신에게도 그토록 가혹한 아픔을 부여하고 말았다.

진실로 내 어머니는 지금껏 살아오시면서 그다지 큰 욕심을 부려 격 없는 행동을 하지도 않으셨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과 더불어 하루 밥 세끼를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 편안함을 마음 부듯하게 생각하시며 살아오셨다.

때론 지아비와 어린 자식과의 살붙임에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작은 감동을 자주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시며 살려고 하셨다.

그런 작은 소망마저도 알뜰하게 앗아간 놈들에게 더 이상 용서의 여지는 없었다.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라도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아랫 입술을 깨물어 마음에 다짐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놈들에 대하여 가타부타 한다는 그자체 부터가 논리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혹독한 자학이라는 생각도 해보았다.

이토록 혹독한 아픔은 그 무엇으로도 결코 치유될 수 없었다.
그 아픔이 일방적으로 강요된 것이었기에 더더욱 감당하기 힘들었다.
또한 어느새 여린 내 가슴 한복판에 옹이가 되고 말았다.
이는 바로 신이 나에게 부여해준 가장 과중한 형벌이었다.
그럼에도 내 가슴속에 시차 없이 치밀어 오르는 통한의 분노를 나 혼자감당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에게 처해진 그 모든 시대적 상황은 그토록 냉엄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불합리적인 모순의 바탕에서 커다란 상처를 입고 시작된 내 어머니와 내 삶은 억지로 강요된 역행이었다.
고로 그 모든 것이 타의적인 힘에 의해 돌연히 변이되고 말았다.

그날 밤은 하늘도 그리 격노 하는 것 같았다.
밤이 지새도록 땅덩어리가 몇차례나 요동 칠 정도로 하늘엔 천둥번개가 요란스럽게 내려첬었다.

아랫목에 누워 계신 내 아버지는 여지껏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데 내 귀가에는 자애로운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는 채 아물지도 못한 상처를 다시금 부추기고 말았다,
그로 인해 남는 비통함이 치유불능의 상처를 어린 내 몸에 가차 없이 부여하고 말았다.
이는 곧 악마의 저주라는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토록 어린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험한 일이었기에 감당하기가 실로 힘에 벅찼다.

어른들 말씀 중에 ‘고목은 나이가 먹어갈 수록 묵은 연륜만큼 운치를 더한다.’는 말이 있다.

탕 탕 탕, 장죽의 대꼬바리를 놋쇠로 된 재떨이에 강하게 두드려 서로 맞닿아 부딪히는 소리였다.
벽 너머로 아주 날카롭게 들려오는 소리가 여법 오랫동안 지속된 방안의 침묵을 드디어 깨뜨렸다.
그리고 이내 숨이 차오르시는 듯 가쁘고 탁한 기침소리가 몇 차례나 계속되어 외조부님이라는 것을 곧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내 외조부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시신이 그리 처참한 모습으로 내 집에 들어온 그날 늦은 밤은 물론 여태까지도 단 한 차례도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셨다.
그날 밤을 함께 지새운 동네 사람들은 그런 외조부님의 깊은 심지를 이해하기 어려워 의아하게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내 외조부님의 깊디깊은 심성을 이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어머니께서는 아주 작은 반응도 없으셨다.
그리고 그때까지 망연자실한 상태를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셨다.
그저 단 한마디의 말씀도 없으신 아버지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말을 잃은 벙어리처럼 묵묵히 앉아 계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아무런 말없이 그저 멍청하게 바라보아야만 했었다.
그런 내 마음은 마치 예리한 칼날로 생살을 도려내는 것보다 더한 아픔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자연의 순리는 한 치의 오차가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우리들의 시름 찬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명의 빛이 어둠살을 헤집고 힘들게 찾아왔다.

밤새도록 켜놓았던 석유 호롱불의 끄름 냄새와 향냄새, 그리고 총상을 입으신 내 아버지의 시신이 부페되어 나는 참기 힘든 냄새가 뒤범벅이 되어버린 방안이었다.

그 모든 애탄스럽기 짝이 없는 설움의 덩어리들을 한번쯤은 아듬어 주려나 여병의 빛이 방안으로 아주 살며시 그리고 살갑게 찾아주었다.

여명의 빛은 이내 조금은 뒤틀린 봉창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리고 이내 방 안으로 들어와 아직도 움츠리고 있는 희뿌옇게 힘을 잃어가는 어둠을 차츰차츰 걷어내었다.
그 빛의 힘으로 누렇게 색이 바랜 천장과 벽면의 벽지가 군데군데 희끔희끔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방안이 훤하게 밝아왔다.
그 시간이 아주 짧게만 느껴질 정도로 여명의 선연한 빛은 무직하게 내려앉았던 방 안 분위기를 확 뒤바꿔 놓았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마지막 집을 떠나시는 내 아버지께 올리려는지 아침밥을 직접 손수 지으시려 부엌으로 나가려 하셨다.
그리고 방안에 공기가 참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탁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방문을 열어 환기를 하려 하셨다.

그러자 거의 뜬 눈으로 함께 밤을 지새웠던 귀분이 어머님과 옥순이 어머니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 밤새 아무 것도 드시지 못 하신 채 설움이 복받쳐 우시느라 힘이 드셨던 어머니를 생각해서 아버지에게 올릴 아침밥을 대신 하려고 하셨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이제 가면 언제 올지도 모를 사람인데 마지막 밥 한 그릇은 어머니 손으로 직접 지어 올려야 한다고 하시며 한사코 의지를 굽히지 않으셨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대함에 있어 상대를 자기의 살붙이처럼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내 아픔을 생각하기에 앞서 오랜 세월을 두고 친숙하게 지내온 내 이웃의 아픔을 먼저 헤아리고 감싸 안으려 했다.
그렇게 마음에 순수한 정이 넘쳐났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런 우환 속에서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웃사촌’이라고 했던가? 평소에 돈독한 정을 나눠 잘 지내는 이웃이 직접 피를 나눈 어설픈 동기간보다 낫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날 밤 귀분이 아버지께서 우리 모자에게 보여준 헌신적인 사랑은 참으로 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평생도록 지워지지 않을 큰 은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 모두가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불행하게도 일부의 동네 어른들은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해 마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도 내 아버지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시하기는커녕 아예 발길조차 끊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므로 인간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어 사람된 진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더불어 놈들의 말처럼 세상이 뒤집어져 변했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 자신의 본심은 그렇지 않지만 놈들의 눈치를 보느라 자기가 지향하고자 하는 대로 못하고 사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면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반동분자를 찬양하는 것이나 돕는 것 자체가 바로 반동이라고 틈만 나면 선동 선전하는 놈들의 눈에 띄어 자신은 물론 가족들까지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인간이 자기의 사고에서 얻어지는 판단을 옳게 표현하지 못하고 행동으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그런 삶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느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 어머니께서는 먼동이 터 오르려는 여명의 그 순간까지도 단 한잠도 이루지 못하셨다.
이따금씩 아버지의 장례문제로 어른들과 말을 나누실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말씀이 없으셨다.

처해진 상황이 그렇다 보니 보통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평이하게 치루는 삼일장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저 날 밝기를 기다렸다가 등메산 산자락 어느 곳을 찾아 서둘러 시신을 땅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기가찰 일은 상가집 임에 틀림이 없어도 조등 하나를 달 수도 없었다.

그러니 고인이 저승길에 타고 갈 꽃상여는 커녕 그 저승길을 인도하는 요령잡이가 울리는 애간장을 훑어 내리는 요령소리도 없었다.
어디 그뿐이라 시신을 감싸야할 삼베 조차도 전쟁중이라 구할 길이 없었다.

포목점도 모두 피난을 가서 습도 못했다.
그나마 너무 그러면 안 된다고 하시는 귀분이 아버지의 말씀대로 싸리문 밖에 저승사자가 와서 먹고 갈 사자밥 한 그릇을 겨우 개다리소반 위에 놓았을 뿐이었다.

사실 마을 옆 산기슭 아래 상엿집에 상여가 있었다.
하지만 그 상여를 메고 이끌어 갈 동네 사람들이 모두 피난길에 나서 그마저도 할 수 없었기에 안타까움만 더했다.

사정이 그 지경에 이르러 내 아버지께서는 어절 수 없이 딱딱한 등지게 위에 얹어 가실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정이 서렸던 삶의 근원이었던 내 집을 어처구니없이 그런 쓸쓸한 모습으로 떠나셔야만 했다.

그것은 간밤에 우리들 모두에게 종구네 삼촌인 종섭이가 던진 서슬 퍼런 그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니 내 어머니는 그런 말에 위축되어 자신의 판단을 흐릴 정도로 심지가 나약하신 분이 절대 아니었다.

그보다는 그 무더위에 시차를 다투어 부패되어가는 내 아버지의 시신에서 퍼져나는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둘러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냄새를 내 어머니와 어린 나는 피를 나눈 혈족이기에 조금 참기에 힘들어도 참고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을 돕고 계시는 구장님과 귀분이 아버지는 물론 방앗간 일을 보시는 순태 아저씨와 그 외에 동네 분들에게는 참으로 무엇이라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미안하고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당시 상황이 전쟁 중이라 막말로 소나무 관 하나를 만들 수 있는 목수들마저 각자 살기 위해 이미 식솔들을 데리고 피난을 떠난지라 그 소나무 관마저도 구할 길이 전혀 없었다.

마을 구장님과 귀분이 아버지가 선두에 나서 아버지 친구인 응수 아저씨, 그리고 피난을 간 줄 알았던 순태 아저씨까지 힘을 모아 날이 밝아 오는 대로 서둘러 장례를 치루기로 결정하였다.
어머니와 나 또한 그렇게 마음을 굳혔다.

마을 지리를 손바닥처럼 상세하게 꿰차고 있는 방앗간 순태 아저씨가 내 아버지의 유택 문제에 관하여 강하게 제안한 의견이 있었다.
그래서 순태 아저씨의 의견에 따라 우선 급한 대로 마을 앞 등메산 자락 우묵골에 시신을 모시기로 하였다.

날이 밝기 무섭게 어른들이 묫자리를 정하고 땅을 파려고 등지게 바작에 삽과 괭이를 챙기셔 조금은 이른 듯싶게 집을 나서 등메산으로 향하셨다.

제아무리 생각을 수없이 거듭해보아도 내 아버지를 이렇게 허술하게 보내야 하는 현실이 도저히 용납되질 않았다.
왠지 더욱 안쓰러운 마음에 참을 수 없는 설움이 걷잡지 못하게 치밀어 올랐다.

그리 시간이 얼마쯤 흐른 후 어머니께서 소반에 반찬 몇 가지를 차리고 하얀 쌀밥을 정성껏 차려 양 손으로 들고 방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이내 누워계시는 아버지 앞에 밥상을 내려놓으시며 평소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말씀 하셨다.

“이봐유, 상민이 아부지. 어여 이러나 밥 좀 드시유. 어여유. 그래야 그 멀구 먼 구만리 저승 길 갈 때 배 안 곯구 가지유. 안 그런감유? 그러닌께 어여 싸게 이러 나랑께유. 어여유. 지발 내 말 좀 들어 보랑께유. 밥 한수깔이라두 드시고 가야 내 맴이 편하긋네유.”

그렇게 말을 마친 어머니의 양쪽 어깨가 자꾸만 들썩거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시려 무던히 애를 쓰셨다.
그러자 마루에 앉아서 어머니의 그런 처절한 모습을 바라보는 동네 사람들도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저 애태우며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도 그중에서 어머니와 남다르게 지내셨던 옆집 귀분이 어머니께서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닦고 계셨다.

울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자리에서 일어나셔 방 안 아랫목에 있는 반다지의 문짝을 열고 안에 들어 있는 옷가지들을 들춰내셨다.
반다지 안 깊숙한 곳에서 비단 천으로 싸놓은 보따리를 꺼내셨다.
그리고 방바닥에 펼치고 하얀 모시옷 한 벌을 꺼내 놓으셨다.

이불솜으로 쓰려고 모아 놓으셨던 목화솜 한 뭉치도 꺼내셨다.
그리고 동네 아주머니들의 눈을 가리시려나 얼른 방문을 닫으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시신에 덮어있던 이불 호청을 거둬내셨다.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 확연하게 드러난 아버지의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불쌍하다 못해 처참했다.

더욱 더 잔혹하게 보인 것은 놈들이 마치 짐승을 사냥하듯 네 아버지를 표적 삼아 사정을 두지 않고 집중적으로 마구 쏘아댄 가슴에 난 총상이었다.
앞가슴 여러 군데에 난 상흔은 마치 벌집을 쑤셔놓은 듯 보였다.
숱한 상처들에서 사정없이 흘러내린 검붉은 피와 찟겨져 터져나온 살점들이 옷에 잔뜩 들러붙어 참혹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내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된 내 아버지의 시신을 세숫대야에 담겨 있는 따뜻한 물에 목화솜을 적셔 정성껏 닦아주셨다.
심하게 살점이 뭉그러진 복부부근은 솜으로 대신 채우셨다.
가슴 시려오는 아픔에 입술을 깨물면서. 그렇게 얼마동안 상처 부위를 닦아내신 어머니는 정말 답답하리만큼 입을 다물고 계신 내 아버지께 다시금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이봐유, 상민이 아부지. 어여 옷 갈아 입으야지유. 그러닌께 지아무리 억울혀두 시방일랑은 팔 좀 펴봐유. 그래야 옷이 들어가지유. 어여 내 말 들으랑께유, 지발. 팔 좀 펴보라닌께유. 싸게유. 참, 그리구유. 으제 밤에 울 아부지가유. 당신 저승길 가는디 절대루 피묻은 옷 입고 가면 안 된다구 내년 여름 울 아부지 진갑 잔칫날에 입혀드릴려구 맹그러 놓은 이 옷 당신헌티 꼭 입혀 보내라구 그리 신신당부를 허데유. 그러닌게 팔 좀 피구서 얼른 입어유. 참! 글구 상민이 니넘두 두 눈깔 똑바루 뜨고 니 애비 꼬라지 한번 더 쳐다봐. 그래야 느그 애비 을매나 억울탕허게 죽었는지 알 꺼 아닌게비, 안 그려? 암튼 나사는 꼭 안이저부릴끼여. 암 절대루 안이저부리구 말구. 내가 꼭 살으나마 이놈으 웬수는 꼭 갚구 말팅께 어디 두구 보라구 혀.”

그렇게 울부짖는 내 어머니의 비통에 가득 찬 목소리가 참으로 애절하게 방 문 밖으로 퍼져 나갔다.
그 아픔이 마치 구곡간장을 예리하게 날이 선 가위로 토막토막 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들이 다 소중하게 귀담아 들어야 마땅했다.
그중에서도 마음에 아픔으로 와 닿는 말씀이 있었다. 내년 여름 외조부의 칠순 잔칫날에 외조부께 드리려고 내 어머니께서 손수 장만해 두셨던 모시옷 한 벌에 대한 대목이었다.

내 어머니께서는 그 하얀 ‘한산 모시옷’ 한 벌을 장만하시려고 얼마나 힘이 드셨는지 모른다.

이른 봄에는 앞산에 올라 뜯은 봄나물을 읍내까지 나가 파셨다.
그리고 모내기철에는 모 품삯을 받아 차곡차곡 모으셨다.

징그럽게 더운 여름날에는 남의 집 밭에 나가 호미로 김을 매셨다. 땅에서 훈김이 훅훅 올라와 참기 힘들어도 오롯이 참고 견디셨다.

그러다 가을이 되면 벼 베기와 탈곡 일을 거들어주고 바심 품삯을 받으셨다.

그렇게 모으고 모은 돈으로 시오 리 길 강경 읍내에 가시려고 금강둑길로 걸어 가시는 것을 마다않으셨다.
차비 한 푼이라도 아끼고 싶은 마음에 그리하셨다.

강경 읍내에 도착해서도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기어이 최상급의 ‘한산모시’ 원단을 구입하셨다.
그렇게 내 어머니께서 한 땀 한 땀 지으신 모시옷이었다.

그때부터 스멀스멀 찾아드는 크고 작은 아픔들이 내 가슴 군데군데에 서서히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생채기가 아물기도 전에 더 큰 아픔이 도래했다.

그로 인해 실로 나약한 내 한계로는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아주 큼직한 고통이 정곡을 찔렀다.
그로 인해 혈루를 흘리게 하는 처절함을 하늘로부터 다시금 부여받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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