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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89 조회 : 1,755




완연한 가을 날씨라지만 한낮으로는 다소 후덥지근했다. 말끔하게 갠 하늘 아래로 펼쳐진 널따란 운동장에는 형형색색의 만국기가 높다랗게 걸려 있고 트랙에서는 달리기의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가 연이어 들려와 운동회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다.
운동장에서는 행사 일정표에 따라 각종 운동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운동장 밖 군데군데에는 장사꾼들의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더불어 온 면민들이 모인 자리라 그런지 학교 안은 들끓는 사람들의 소리로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시골 학교라고 하지만 전교생이 육백여 명을 넘어 규모가 그리 작지 않은 학교였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운동회인지라 전 학년의 학부형들은 물론 온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운동회 구경을 왔다. 더불어 집을 지키던 개들도 주인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학교까지 따라 오기도 했다.

모든 아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눈여겨뒀던 장난감을 사려고 온통 신경을 모우고 있었다. 그렇게 부모님들을 졸라서 타내는 작은 용돈이라도 전체적으로 합치면 그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그런 이유였는지 논산 강경 양쪽 읍내에 거주하는 장사꾼은 물론 거리가 먼 타 지역의 장사꾼들까지 몰려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일 년에 단 한 번 있는 운동회라 한몫 단단히 잡아볼 욕심에 그리도 많이 몰려들어 운동회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그렇게 가을 운동회는 아이들만의 잔치가 아니라 온 면민들의 흥겨운 잔치 마당이 되었다. 흙먼지가 가볍게 이는 운동장 안 밖에서 오전에 실시하는 운동 경기가 모두 끝나고 그토록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었다.
모든 아이들은 신바람이 나는 듯 기쁜 마음으로 부보님을 찾아 달려가고 있었다. 그토록 점심시간이 즐거운 것은 평소와는 달리 반찬도 고급스럽게 장만한 점심밥이 반갑기도 했지만 그 보다는 벼르고 벼르던 용돈을 부모님들로부터 타내어 각자 갖고 싶었던 물건을 얼른 사려는 마음에 한껏 들떠 있었다.
어머니와 옥순이 어머니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돗자리를 깔고 한적하게 자리를 잡으셨다. 준비해 온 찬합 속에 담긴 밥과 반찬을, 그리고 어머니가 만드신 김밥과 삶은 계란과 찐 밤을 함께 펼쳐놓고 점심식사를 했다.

그런데 식사를 하시던 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젓가락을 바닥에 내려놓으시며 옥순이 어머니에게 말씀을 하셨다.

“야 득임아, 넌 으쨌는가 모르긋는디 나는 학교 운동장에 들어설라닌게 으쩜 운동장이 음층스리 짝게 보이드라. 우덜 학교 댕겼을 적이는 무지무지허게 커 보였는디.”

그러자 밥을 입 안 가득 넣고 계시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얼른 밥을 삼키시면서 어머니가 하신 말에 대꾸를 하셨다.

“왜 아니라냐. 나두 아까참이 학교 교문을 들어설 때부텀 그런 생각이 딱 들었는디 으짜면 너랑 나랑 맴이 똑같은 줄 모르것다잉. 참말루 요상시런 일일세.”
“야, 요상시럽기는 뭐시가 요상시럽냐. 그때쩍에는 우리 나이가 어렸으니께 우덜 눈에 그렇게 보였던 것이구. 시방이사 너랑 나랑 나이가 낼모리 40줄에 들어서는디 왜 안 그렇것냐.”
“허긴 세월처럼 딸랑 가는 것이 읍는가 보다잉. 너랑 나랑 아츰 일찍부텀 광목쪼가리 책보여다가 책이랑 공책이랑 필통까장 둘러매구 대부뚝길 걸어서 핵교 댕긴지가 바로 엊그저끼 같은디 우리가 시집을 가서 벌써 야들을 낳아가지구 시방 야들이 그때 우리 나이 또래가 되번졌으니 더 이상 뭐라 헐 말이 있것어.”
“참, 말이 나왔으니께 망정이지. 그때 핵교 댕길 때 그 뭐시냐 ‘마사오’라구 허는 교장선생님이 있었잖여. 근디 니두 잘 알것지만서두 배고픈 고양이매냥 핵교 이 구석 저 구석을 사부작사부작 후비구 댕기면서 쪼깨만 자기 맴에 안 들믄 그놈으 지긋지긋헌 ‘빠가야로, 빠가야로.’소리를 귀가 따겁게 허면서 싸돌아 댕겼는디 세월이 흘러서 이맨큼 되었응께 지금쯤은 죽었는지 살었는지두 몰르것다. 암튼 그때는 왜 그렇게 무섭게만 보였는지 참 지나구 보니께 하나하나 소록소록 생각이 나번진다.”

그렇게 두 분이서 이야기를 나누시다가 잠시 말이 끊어지자, 식사를 하시던 옥순이 어머니께서 옥순이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야, 느그들일랑은 6학년이라서 맨 나중에 달리기 허냐? 상민이는 몇 등 할 꺼냐? 우리 옥순이 저년은 맨날 달리기하면 5등은 맞어 놓구 하닌깨, 난 포기 해부렸는디, 금년에는 어쩔랑가 모르지. 혹시! 소가 뒷발루 모기를 잡을랑가 누가 알아 재수 좋게 금년엔 등수 안에 한번 들랑가!”
“몰러, 우리 상민이 쟈는 작년까장은 그냥그냥 등수 안에는 들던디. 이번엔 어짤란가 모르지 그 뭐시라냐, 사닥다리 구멍을 빠져나오는 장애물 경긴가를 한다구 하던구먼 그려 .”

어머니의 말씀대로 지난 5학년 까지는 힘겹게 3등을 하였으나 금년에는 과연 어떨는지 냉큼 자신이 서질 않아 마음 한구석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참, 그런디 올해는 부락 대항 달리기 시합에서 어느 동네서 일등 할라나 모르겠네. 야, 상민아! 우리 동네두 시합에 나간다구 아침부터 구장이 서둘구 야단이던디 니가 볼 때는 어떨 꺼 같으냐?”

옥순이 어머니께서 부락 대항 계주에 관심을 보이시며 물으셨다.

“글쎄유, 잘은 몰르것는디. 아이들이 아마, 화정리에서 일등 할꺼라구 하데유. 그 동네는유. 읍내 고등학교에 다니는 달리기 선수가 두 명이나 섞어 있대유.”
“그려, 그런 동네는 고등학생이라두 있으닌께 되것지만 우리 동네는 맨날 밥먹구 쐬갈이나 비는 용만이허구, 경수 그리구 또 누구라더라, 음, 아 기성이랑 광수가 나온다구 하던디 으찌 그런 동네를 이길 꺼여. 어림 반푼어치두 없지. 구장은 아침부터 시합 나가는 동네 선수들 준다구 날계란을 한 바가지 들구 오던디.”
“엄니. 그래두 몰르는 거여!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잘 달리다가 넘어질 수도 있는 거구.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 없당께. 안 그러냐, 상민아?”

옥순이가 앞에서 밥을 먹으며 나를 쳐다보고 슬쩍 웃으면서 말을 했다.

운동회에 내빈으로 오신 면내에 사시는 유지 분들은 학교에서 식권을 발행하여 점심을 대접했다. 각 부락에서 출전하는 선수들은 마을에서 말마디께나 하는 유지 분들과 구장님들이 함께 국밥집에 어울려 마을에서 추렴한 기금으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선수들 운동복은 각 마을에서 손수 만들었다.
두꺼운 골판지에 동네 이름을 써 글씨 모양대로 잘 드는 칼로 오려낸 다음 하얀 메리야스 위에 널빤지를 올려놓고 물감을 탄 분무기로 뿌렸다. 앞면에는 마을 이름과 뒷면에는 선수번호를 새겨 입고 출전을 했다.

동네 누나들은 그런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은근히 관심이 가는 형들에게는 의미 가득 서린 눈빛을 보냈다. 동네 누나들은 무척이나 수줍어하며 함께 있는 다른 누나의 등 뒤에 얼굴을 반쯤 가리고 남모르게 살짝 웃기도 했다

본부석 앞을 지나는데 본부석 앞 천막 끝머리 줄에 매달려 펄럭이는 종이쪽지가 있어 대충 살펴보았다. 내빈들이 운동회에 자발적으로 내신 찬조금액을 이름 밑에 표시한 것이었다.

그토록 마을사람들에게 인색하게만 굴던 종구 아버지가 종구 어머니의 죽음 이후 심경에 많은 변화를 일으킨 것 같았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교회에도 다시 나가시고, 크고 작은 마을 일이나 학교 일에도 옹색하게나마 열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 운동회에도 본부석에 있는 찬조금 꼬리표 중에 종구 아버지의 이름도 눈에 띄었다.

운동장 한구석 한적한 곳에 자릴 잡은 국밥집에선 쇠 가마솥에서 구수한 냄새가 물씬 풍겨나고 있었다. 종구 아버지가 마을 구장님과 동근이 아버지 그리고 마을대항 계주에 출전하는 동네 선수들과 같이 어울려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종구의 모습도 보였다.
입 가장자리에 벌겋게 국밥 양념국물 자욱이 묻은 채 어른들이 주고받는 말씀을 듣고 있었다.
동네 어른들은 선수들을 둘러싸고 우승을 부탁하며 격려하셨다.

널따랗게 쳐진 두개의 국밥집 천막 안이 각 마을 구장님들과 선수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이 혼잡스러웠다. 더러는 술이 거나하게 취하신 분들이 동네일에 쓸데없이 간섭을 하려고 소란을 피우시자 동네 어른들이 겨우 떼어 말렸다.
장사꾼들 앞에는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눈여겨보아 두었던 물건들을 고르고 있었다.

오후 진행을 알리는 안내방송 소리가 들려왔다. 내빈들과 일부 사람들이 국밥집 상머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어서 원외에서는 ‘탕!’ 하는 선생님이 쏘신 총소리를 시작으로 4학년의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어른들과 아이들의 ‘와아!’ 하는 함성이 운동장을 가득 메워 측백나무 울타리 밖으로 멀리 퍼져 나갔다.
또한 원내에서는 매스게임의 율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 후 프로그램 순서에 따라 남학생들의 기둥 넘기기와 협동심을 불러 일으켜주는 기계체조의 시범이 있었다. 그 뒤를 이어 5,6학년 여학생들의 부채춤 무용의 곱살한 율동이 운동장 가득 펼쳐졌다.

이어서 내빈들이 편을 가른 후 축구공을 발로 차며 반환점을 돌아오는 공차기 경기도 벌어졌다. 어쩌다 실수를 하여 공이 엉뚱하게 다른 데로 굴러가면 모두들 큰소리로 웃으며 구경을 하고 있었다.

이어 운동회에서 큰 볼거리 중의 하나인 청백 기마전의 순서가 되었다. 출발선에서 말을 타고 각 팀의 열렬한 응원을 뒤로 하고 기를 든 각 팀의 대장을 앞세우고 보무당당히 입장을 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 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행진곡을 큰소리로 합창하며 힘찬 모습으로 걸어갔다. 학부형들은 말 위에 타고 있는 자기 아들의 모습이 그리 흐뭇하신지 두 눈을 모으셨다.
그리고 옆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같은 동네 사람들에게 자기 아들 자랑을 하시려는지 손짓으로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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