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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92 조회 : 1,954




느긋한 아침 해는 잔뜩 거드름을 피우고 햇살은 슬금슬금 토방 위로 오르고 있었다. 언제나 바지런 하신 어머니께서는 햇볕에 말리려고 좁은 쪽마루에 두서너 되 남짓한 하얀 참깨를 고루 펼쳐 놓으셨다.
그리고는 행여 마당에 노니는 닭들이 참깨를 먹어치울까 싶어 퍽이나 신경이 무척 쓰이는지 부엌일을 하시면서도 몇 차례나 쪽마루 쪽을 내다보셨다.
어쩌다 닭들이 쪽마루 근처에 다가서려 하면 부지깽이를 들고 부리나케 부엌 문밖으로 나와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시며 닭들을 멀리 쫓으셨다. 그리고 나를 불러 어서 닭들을 쫓으라고 그리 성화를 대셨다.

마당 한구석 헛간 지붕 위에는 누렇게 잘 익은 호박 두서너 덩이가 등 언저리에 허연 분을 내며 둥그런 배를 내밀어 벌렁 누워 있었다. 그리고 봄부터 여름내 작은 초가집을 지키는 파수꾼 노릇을 충실히 했던 해바라기도 알알들이 탱글탱글하게 영글어 무겁게 목을 숙이고 있었다.
그에 뒤질 새라 뒤뜰 둔덕에 의젓하게 서있는 밤나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밤송이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입을 쩍적 벌리고 있었다. 어쩌다 밤나무 가지를 손을 힘껏 휘어잡고 흔들기라도 하면 ‘후두둑 후두둑’ 소리를 내며 탐스런 밤알들이 군데군데 떨어져 줍고는 했다.
그런 풍요로운 모습이 허전한 집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바꿔 놓는 것 같았다.

다랭이 밭에는 키가 무성한 수숫대와 들깨 그리고 콩대가 모두 베어져 널따란 밭이 텅 비워져 힁하게 보였다. 그나마 김장거리로 심어 놓은 무, 배추와 밑이 굵게 들은 고구마 밭이 남아 있어 허한 모습을 메워주는 듯했다.

농번기답게 마을에서는 저마다 가을 바심으로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벼 방아를 찧는 발동기소리가 솔가지 섶을 둘러놓은 울타리 너머로 커다랗게 들려왔다.
그렇듯 가을은 한해 농사를 걷어드리는 부듯한 계절이라 온 동네 사람들이 저마다 신바람이 나 있었다. 허나 빚에 쪼들려 어쩔 수 없이 땅을 잃었기에 그 어느 것 하나도 수확할 것이 없었다. 더불어 마음은 그토록 허전하기만 했다.

어젯밤에 어머니와 함께 아랫마을 영택이네 집에 마실을 갔었다. 그때 동네 사람들과 함께 들었던 축음기 소리가 알 듯 모를 듯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난생 처음 보았던 축음기의 모습이 다시금 생경스럽게 떠올랐다.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영택이네는 동네에서 종구네 집 다음으로 논밭이 많은 부잣집이었다. 영택이 아버지가 그리 큰돈을 주고 사온 축음기는 온 동네 사람들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물이 되었다.
네모난 상자 속에서 구성진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축음기는 이미 낮부터 온 동네로 소문이 쫙 퍼졌다.

저녁밥을 먹고 난 동네 사람들이 하루 종일 계속된 일에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한두 사람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쩌다 귀에 익은 노랫소리가 울려 나오면 중얼중얼 따라 부르며 하루의 피로를 달랬다.

그런 이유로 밤마다 영택이네 안방에는 동네 어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마루에는 어린 아이들과 동네 누나들이 모두 앉아 축음기를 바라보며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었다.
기성이형님과 정희누나 그리고 종금이 누나도 옥순이와 옥순이 어머니도 함께 구경을 하시고 마루 한쪽에는 주현이와 종구의 모습도 보였다.

축음기를 물론 교과서에서 그림으로는 많이 보았지만 직접 대하고 보니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그 축음기에는 백합꽃 모양 같이 긴 나팔이 달려 있고 그 옆에 조형물인 예쁜 강아지 한 마리가 앞발을 다소곳하게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참, 그놈 요상스럽게 생긴 것이 아주 소리는 죽여주는구먼 그려, 어떻게 요렇게 작은디서 그리두 고운 소리가 나오는건지 아무리 쳐다봐두 나는 통 모르긋네.”

축음기 옆에 바짝 앉아있던 병수 아버지가 말씀하시자, 옆자리에 앉아계시던 입담 좋은 삼식이 아버지가 말을 거들고 나섰다.

“아, 이 사람아. 참말루 이거 처음 보는 건감? 아래께 장날에 그 머시냐 읍내 자전거포에서 소리 나는 거 못 봤남? 그거 하구 똑같은 거구만 그려. 허기사, 밝은 대낮부터 술에 취했으니 뭐가 보였을라구.”

삼식이 아버지 말씀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웃자 조금은 무안하셨던지 병수아버지가 이내 말을 이으셨다.

“아따, 형님 뭔 말을 그리 심허게 한데유. 나사 술을 좀 먹었기루 서니, 그리 몰아붙이면 쓰것남유 안 그런가유? 참말루 내 눈으루 못 봤으닌께 물어보는 거지유.”
“야, 이 사람아, 내가 뭐시기 자네랑 무신 감정이 있다구 그러것는가 야긴 즉 축음기 얘기가 나와서 헌 말인께 당체 섭하게 생각일랑 말드라구, 그나저나 동섭이! 함 좋은 놈으로 골라서 노래 한곡 더 틀어 보게나.”
“암, 그렇게 함세. 제발 좋은 구경 와서 다투지덜랑 말구.”

영택이 아버지가 둥그런 원판 위에 돌가루로 만들었다는 판을 올려놓고 상자 옆에 달린 손잡이를 뱅글뱅글 돌리셨다. 그리고 둥그런 쇠뭉치 밑에 가는 바늘을 꽂아 판 위에 놓자 울림 판을 통해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흘러나왔다.
옆에 앉아계시던 어머니는 이미 읍내에서 몇 번 정도 들으셨는지 콧소리로 더듬더듬 따라 부르셨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도 구성진 노랫가락을 더듬더듬 따라 부르셨다.

그렇듯 문명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전깃불도 들어오지 않아 등잔 석유등을 켜고 사는 외진 시골 마을에도 서서히 불어오고 있었다. 그 실례로 종구네 집은 땅을 깊이 파서 쇠파이프를 묻어 작두펌프로 물을 끓어 올려 먹게 되어 이젠 동내 우물을 먹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리고 영택이네 집에는 축음기를 사 와서 동네 사람들과 함께 듣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이후로 영택이네 집은 마을 사람들로 들끓기 시작했다. 그중에 영택이 누나랑 정희 누나하고 종금이 누나가 열렬하게 축음기를 좋아했다. 노래를 배우려고 노래 가사를 종이에 적어 따라 불렀다.

그리 숱한 노래 중에 남자 어른들은 유난스레 ‘비 나리는 호남선’과 ‘울어라 기타 줄’을 가장 좋아했다. 동네 누나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고향초’와 ‘낭랑 십팔 세’ 노래를 즐겨 불렀다.

당시 집권당인 자유당의 대통령 후보인 이승만과 맞섰던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신익희씨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선거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던 1956년 5월 5일 야당의 강력한 후보였던 신익희씨가 호남지방 유세 중에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 서거했다.
그 후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렀는데 ‘비 나리는 호남선’ 노래 가사의 느낌이 신익희 씨를 추모하는 노래 같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과잉충성을 하는 지체 높으신 나리님의 지시로 순경들이 그 노래를 단속한다는 이야기도 동네 어른들로부터 한두 번쯤은 들었다.

그렇게 동네엔 한바탕 축음기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종구 아버지는 밤마다 떼를 지어 뭉쳐 다니는 다 큰 정희누나의 모습이 눈에 영 거슬렸다. 그리고 형편이 나만 못한 영택이 애비 네가 사는데 내가 못 살 것이냐 하는 시기심도 있었을 법했다.
암튼 그 이유를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며칠 후 종구네 집에도 동네 사람들 보라는 듯이 떡하니 축음기를 들여놓았다. 종구네 집 머슴 용만이는 종구네 축음기는 영택이네 것보다 훨씬 값이 비싸고 좋은 것이라고 온 동네에 자랑을 그리 늘어놓았다.

그 후 자연스레 틈만 나면 동네 어른들은 대하기가 좀 껄끄러운 종구네 집 보다는 영택이네 집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동네 누나들과 여자 어른들은 종구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종구네 집 아랫방에 모여 놀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종구어머니의 초상을 치른 후 그리도 쓸쓸하게만 보였던 집이 사람들의 잦은 발길로 퍽이나 훈훈하게 보였다.
어찌 보면 낙후된 작은 시골 마을에도 개화의 바람이 알게 모르게 서서히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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