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마루에 닿을 듯 구불구불하게 휘어진 좁다란 고갯길이 오롯하게 보였다. 언덕마루 성황당 당산나무가 탱글탱글한 아침햇살에 선명한 모습으로 눈에 띄었다. 은행나무에 잎들이 선선한 갈바람을 가르며 샛노랗게 물들어 느릿느릿한 가을 발걸음을 재촉이나 하는 듯했다. 가을걷이 끝난 밭에는 산비둘기 몇 마리 머릴 모아 구구대며 흩어 떨어진 낱알들을 쪼고 있었다. 뒤따라 검정 까마귀 떼가 날개를 접으며 밭 자락에 내려앉아 밭두렁 위를 어정어정 걷고 있었다. 산비알 밭에 한동안 발길이 뜸하셨던 기성이형 어머니가 아침 일찍 서둘러 우리 집으로 찾아 오셨다.
마침 어머니께서 읍내로 장사를 나가시려고 사립짝 앞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기성이형 어머니께서 급한 발걸음을 하신 듯 차오르는 숨을 고르시며 말씀하셨다.
“상민이 에미, 읍내 나가려는 모양인디. 아무리 바쁘더라두, 쪼깨 시간 좀 내서 내 야그 좀 들어 보구 가더라구.” “네에, 근디 뭔일이라두 있능감유, 그리 서두시게.” “아, 글쎄 큰일이라면 큰일이지 이보다 더 큰일이 어디 있을라구, 나 참 살다살다 별놈에 일이 다 벌어지는구먼 그려.” “아줌니, 뭔일인지는 몰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천천히 얘기를 혀 보셔유.”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자 기성이형 어머니가 잠시 말을 끊으시고 마당 안으로 들어서 그리고 이내 쪽마루에 걸터앉으시며 다급하게 말씀하셨다.
“상민 에미는 도통 모르고 있는감? 동네 여편네들 입에서 돌고 돌아서 나온 말인가 보든디.” “뭔 얘긴지는 몰러두, 저는 아줌니가 아시다시피 해뜨기 무섭게 나가서 저녁 해 다 떨어져야 집으로 오는디 뭘 알겠어유, 근디 먼일이래유.” “음, 우리 기성이 안 있는감. 아, 글쎄 그놈이 하필이면 동섭이 큰딸 정희하구 연애질을 해서 아를 뱃다구 동네 소문이 죄다 난 모양인디, 다들 쉬쉬하느라 나만 몰르구 있었구먼 그려, 나사 지들끼리 그냥 어울려 노는 줄만 알았지, 일을 이리 크게 벌려 놀 줄 누가 알았는감, 휴우.” “저두 시방 아줌니가 말씀을 해서 첨으루 알았는디, 그게 사실이면 참 큰일이네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들으며, 물이 차면 논둑이 터지더라.’고 이미 온 동네에 소문이 퍼질 대로 다 퍼졌다. 그 내막을 기성이형 어머니께서도 알게 되셔 다급한 김에 우리 집으로 찾아오신 것 같았다.
“그러니, 내가 어디다 얼굴 내놓구 말을 해보것어. 그래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하두 속이 터져서 그래두 상민애미가 제일 만만해서 속이나 털어 볼려구 왔네,그려.” “네, 잘 오셨네유, 그런디 참 궁금헌게 종구 아버지는 몰르구 있는 건감유?” “그려, 내가 볼때는 아직까정은 모르구 있는 거 같은디 금새 알게 되것지 뭐. 어디 이 밝은 세상에 감출 비밀이 있던감, 안 그려?”
“맞기는 맞는 말씀인디, 기성이는 뭐라구 하던감유, 뭐 본일들 의사가 젤루 중요하닌께.” “뭘 뭐라구 혀 통 말이 없으니 내가 속이 더 터지지, 뭔 말만 하면 소 잡어 먹은 귀신처럼 입을 꾹 다물고 말을 안 해서 참다 못해 큰소리치면 꼬라지에 성질을 퍽 내구 밖으로 훌쩍 나가 버리기만 허니 어쩌면 좋대.” “너무, 닥달하지 마세유, 지두 그 나이에 다 생각이 있겠지유, 아무려면 생각이 없겠어유?” “생각은 먼 넘에 생각이 있을라구, 아 그래 생각이 있는 놈이 그리 일을 벌렸을까? 내 지금두 그 때 지애비 파리 목숨 만도 못허게 억울허게 죽은 거 생각만 하면 오장육부가 다 썩어 문들어 내리는 구먼 그려.”
기성이형 어머니께서 그때의 참담했던 일을 힘에 벅차게 되뇌는 듯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말을 이으셨다.
“그래서 첨엔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죽어두 둘이 못 살게 할려구 했는디. 애까장 몸에 들어 있다구 허니, 이제 와서 내가 으짜 것는가 세상 구경 한번두 못해 본 뱃속에 들어 있는 어린 핏덩어리가 무신 죄가 있냐구.”
그동안 동네 사람 누구한테도 터놓고 말씀도 못하시고 무척이나 속이 타셨던지 어머니를 붙드시고 애끓는 하소연을 하셨다.
“그러니 어쩌면 좋대유. 그때 그 지긋지긋했던 일 생각하면 아줌니 속이 어떠실지 충분히 짐작이 가지만 글타구 그럴 수도 없구.” “그러니 어찌 길을 두고 뫼루 가긋는가? 그리고 중 제머리 못 깎는다구, 내가 종구 애비 앞에 선뜻 나설 수도 없구 일 아닌감?, 그래서 중간에 누굴 내세울라구 하는디 동근이 아버지가 어쩔련가 모르것네.” “글쎄유, 그 양반 생각이 어쩔련지 몰라두 지가 이따가 저녁나절에 장사 마치구 집에 돌아오면 동근이 아버지를 함 만나서 부탁혀 볼께유.” “그려 그리 해준다니 참말루 고맙구먼 내가 이 마당에 어쩌것는가? 지들 끼리만 좋다면 더 남사스럽기 전에 짝을 지어 줘야지, 암튼 그리 알구 갈테니 이따가 저녘나절에 우리 집에 꼭 좀 댕겨가, 그리구 얼른 가봐 괜히 나 땜시 발길만 더뎌졌네 그려.” “네, 그럼 이따가 저녁때 뵈어유, 상민아 에미 간다.”
기성이형 어머니께서 그 일로 마음이 답답하신지 텃밭을 내려서시는 발걸음이 퍽이나 무겁게 보였다. 밭둑길에는 동이를 한 손에 쥐고 주막으로 발걸음을 서두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보였다.
마당가 두엄더미에는 어린 병아리들이 어미닭 뒤를 따라 먹이를 쪼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슬금슬금 앞으로 다가서는 검둥이가 무서웠던지 제가끔 날개를 팔딱이며 어미 품으로 파들어 몸을 숨겼다. 그러자 햇빛에 영롱한 색깔로 반짝이는 긴 꼬리를 늘인 수탉이 성큼 달려와 검둥이를 향해 목에 깃털을 모아 세우고 겁도 없이 달려들었다.
기성이형네 집은 마을 앞 들녘 물길 좋은 곳에 논 여덟 마지기를 짓고 살았다. 그리고 등뫼산 기슭에 커다란 밭도 두 자락이나 있어 양식 걱정은 없었다. 해방의 감격어린 기쁨이 모두의 가슴속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비운의 저주스런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평화롭던 작은 시골 면소재지가 흉악무도한 놈들에게 불법 점령되었다.
놈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종구네 삼촌이 놈들의 눈에 들려고 과잉충성을 하려 인공기를 게양할 게양대를 마을 한 가운데에 세우려고 했다. 그 터를 마련하려고 기성이형네 집 앞에 있는 마늘밭을 내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기성이형 아버지가 펄쩍 뛰시며 단호히 거절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음속으로 잔뜩 벼루고 있던 종구 삼촌이 인민군들을 데리고 와 기성이형 아버지를 면소재지에 있는 ‘인민위원회’로 끌고 갔다. 해방이 되고 나자 극도로 어수선해진 사회질서를 바로 잡으려는 애국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대한청년단’을 결성했다. 그때 기성이형 아버지가 단원으로 활동하셨던 것을 놈들이 반동으로 내몰아 뭇매질을 가했다. 그때 같이 붙들려 가셨던 동네 구장 일을 보셨던 우물가에 사는 인식 아버지와 함께 면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위 인민재판을 했다. 그리고 그 이튿날 이른 새벽에 등뫼산 뒷자락에서 몇 방의 총성이 울리고 두 분은 같은 날 억울한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자 기성이형 어머니가 홀로된 몸으로 죽을 고생을 타하셔 어린 남매를 키우셨다. 그런 가슴 아린 사연 속에 기성이형 아버지 분묘가 학교에 가는 길 비석골 공동묘지에 있었다.
기성이형 어머니의 본심은 원래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거친 세파 속에 시달리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혼자의 몸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힘든 농사를 짓다보니 성격이 꽤나 거칠어지셨다. 그 별난 성품이 동네에서 억척스럽기로는 제일가는 주현이 어머니를 능가했다. 그런 탓에 그분 주위에 동네 사람들의 교류가 별로 없어 늘 외롭게 보였다. 그러나 기성이형은 그분의 성격과는 너무도 달랐다. 비록 배움은 국민학교 졸업에서 멈추고 말았지만 평소 예의가 바르고 행동거지가 조신했다. 더불어 성품이 과묵하여 동네 사람들로부터 깊은 신망을 얻고 살았다.
아무튼 종구네 집 하고는 영원히 화해가 될 수 없는 가슴에이는 악연이 얽혀 있었다. 더욱이 종구 아버지의 모난 성격이 기성이형 어머니의 성격과는 도저히 맞질 않아 일을 해결하기엔 무척이나 힘들 것만 같았다. 그리고 지난봄 극심한 가뭄에 온 동네 사람들이 턱없이 부족한 논물 때문에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다. 한 방울의 물을 놓고 다툴 때 두 집 사이에 논에 물을 대는 일로 싸움이 크게 일어났다.
종구 아버지가 기성이형에게 어른한테 따지면서 달려든다고 ‘애비 없는 후레자식’ 이란 말을 하시며 뺨을 헌집 벽 털듯이 후려쳤다. 그러자 분을 참지 못한 기성이형이 종구 아버지를 벌렁 들어서 못자리에 거꾸로 넘어뜨리고 말았다. 그 일로 기성이형이 경찰서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나온 일이 있었다. 암튼 복잡하게 얽힌 사연들로 기성이형과 정희누나의 일이 어떠한 형태로 귀결될지는 전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종구네 집의 일이다 보니 솔직히 한편으로는 자못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면서도 마음 한쪽으로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길 바랐다. 풍년과 더불어 두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짝을 이뤄 마을에 좋은 일로 기억되길 바랐다. 그런 마음은 동네 사람들 모두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