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글, 사진 등의 저작물에 대한 무단복제를 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들메로 가는 길 - 94 조회 : 1,687




납작 엎드린 초가지붕 위에는 아침 일찍부터 둥그런 싸리 채반이 놓여 있었다. 채반 속에는 얇게 썰어 고루 펼쳐놓은 애호박고지와 불그레한 대추가 단작스럽게 널려 있었다.

가는 소금이 넉넉하게 담긴 종재기를 손에 들고 두엄가로 나섰다. 두 손가락에 소금을 잔뜩 묻혀 이를 고루 문대고 양칫물을 입 안 가득 머금어 오물오물했다.
그런 다음 입안에 가득찬 물을 ‘탁’ 하고 두엄에 대고 내뱉었다. 그러자 울타리 찔레 덤불에 촐랑대며 열매를 쪼던 멧새 몇 마리가 제풀에 놀라 ‘포롱포롱’ 소리를 내며 떼를 지어 날아가고 있었다.

뒤뜰 토담 위로 불그레한 모습을 띄운 담장이 넝쿨이 보기 좋을 만큼 얽히고설켜 있었다. 그 옆자리 밤나무엔 불그스름한 밤송이들이 입을 벌리기 시작했다.
뾰족뾰족한 가시 틈 사이로 알차게 붉은 밤알을 드러내어 그리 알차게 보였다. 찬연한 아침 햇살이 감나무 이파리에 살포시 내려앉아 눈 시리도록 투명한 빛을 발했다.
살이 꽉 차오른 불그레한 감이 언뜻언뜻 눈에 띄어 바라보기에 마음 부듯하기만 했다.

텃밭 모퉁이 감나무 아래엔 아침 이슬에 축축이 젖은 누르스름한 이파리 몇 개가 땅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덧없이 가는 세월에 새삼스레 민감해졌다.

부연 먼지 가득 쌓인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신작로가 평소보다는 시원스레 내다보였다. 둔덕 너머 밭 자락엔 바심이 끝난 콩과 들깨 대를 묶어 놓은 깍짓동이가 무릇 쓸쓸하게 보였다.

벼 베기가 끝나 텅 비워진 논배미 한가운데 표정을 잃어버린 얼굴에 한쪽 발로 오도카니 서 있는 허수아비가 더없이 고즈넉하게 보였다.
어머니께서 동네 동근이네 집에 다녀오신 듯 아주 늦은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기성이형 어머니가 주신 것이라고 하시며 검정 서리태 콩이 섞인 먹음직스런 찰떡을 건네주셨다.
그런데 그 일에 대해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 조금은 궁금했다. 허나 어른들 일에 성큼 나서 묻기도 겸연쩍어 그저 어머니 눈치만 살폈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어도 어머니는 그 일에 대하여 아무런 말씀 없이 여느 날처럼 읍내로 장사를 나가셨다. 어머니께서는 지난 늦여름에 두 식구 김장을 하려고 무, 배추를 겨우 두 고랑 심어놓았다.
텃밭엔 속이 실하게 들어찬 배추와 청록색 잎이 힘 있게 뻗어난 무가 서로 키 재기를 하는 것 같았다.

텃밭을 지나 논둑길 옆 도랑엔 맑은 물이 바람에 잔잔하게 일렁이었다. 갈잎 끄트머리에 맺힌 아침이슬이 햇빛에 반사되어 구슬처럼 반짝였다.
지난여름 장마에 징검다리로 놓았던 돌덩이 일부가 떠내려가 동네 어른들이 디딤돌을 새로 놓았다. 새로 놓인 디딤돌이 몸에 익숙지 않은지 자세가 잘 잡히질 않아 조금씩 뒤뚱거리며 돌다리를 건넜다.

동구 밖을 바라보니 영섭이네가 벼 탈곡을 하는지 동네 어른들이 모여 벼를 한 움큼씩 쥐고 호롱기를 발로 열심히 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놓인 풍구도 눈에 띄었다.

둥구나무 아래를 막 벗어나려는 옥순이 모습이 보여 함께 학교에 가려 발걸음을 늦췄다. 철길 건널목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개울 둑길을 급하게 걸어왔는지 숨이 찬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야, 상민아! 너 어제 밤에 기성이 오빠네 집에서 가져온 떡 먹었냐?”
“응!”
“어저께가 기성이 오빠네 아버지 제사였다구 하드라, 니 엄니가 나보고 먹으라구 주는디, 제사 음식이라 나는 기분이 좀 그렇구 해서 안 먹었는디 넌 먹은 모양이구네.”
“배부른 소리하구 있네, 뭐 언제는 제삿집 음식 안 먹었냐? 별걸 다 가리게 초상집 음식이라면 몰라두, 참, 울 엄니 어제 니네집에 갔었네? 어쩐지 좀 늦게 오더라구.”
“응 우리 엄니랑 말하는 거 슬쩍 들어본께 기성이 오빠랑 정희언니 일 때문에 그러는 거 같더라구, 니네 엄니가 그러는디 종구 아버지한티 잘 좀 얘기 해달라구 동근이 아버지에게 부탁했다구 하더라. 그래서 동근이 아버지가 오늘 논 일 마치구 저녁 나절에 종구 아버지한테 찾아가서 얘기를 한다구 했데.”
“그건 나두 알구 있는 거구, 뭐 딴말은 없구?”
“그런디, 울 엄니가 그러는디 일이 좋게 풀릴라면 엄청 힘들꺼라구 그러더라. 왜 있잖냐? 지난봄에 논에 물대는 거 때문에 종구 아버지랑 기성이 오빠가 싸워서 더 힘들 꺼라구 하면서 인제 정희언니는 종구네 아버지한티 된통 당할 꺼라구 하던디.”

그렇게 말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이 개울 둑길을 걷고 있는데 ‘따릉 따르릉’ 하는 자전거 방울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얼른 돌아보니 종구가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우리 두 사람 앞을 거들먹거리며 그냥 스치고 지나갔다.

“종구 쟈는 언제꺼정 저럴려는지 참, 한동네 살면서 말두 없이 살려구 그러는가 모르긋네 지가 잘살면 을매나 잘산다구 시건방 떠는지 아침부터 눈꼴사나워 지네,”
“내버려 둬, 나 땜시 그럴꺼구먼, 내가 그리 미안타구 했는디두 맘을 안 푸닌께 나두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지 뭐.”
“야, 그래두 교회에서는 을매나 말두 잘 하는지 아냐? 글구 인제 을매 안 있으면 지네집에 난리나는 줄두 모르구 빙신같이.”
“난리는 뭔 난리냐 어른들이 잘 알아서 하시겠지 뭐.”
“안 그럴꺼라구 하든디, 어른들이 말하는 거 가만히 들어보면 옛날부터 두 집이 사이두 별루 안 좋은 디다가 그 승질머리들이 좀 별나냐구 험서 이번에 한번 대판거리 붙을 꺼라구 하더라.”

아주 오래전부터 옹기종기 머릴 맞대고 그 험난하고 모진 세파를 그토록 힘들게 이겨내고 오순도순하게 살아온 마을이었다.
겨우 삼십 여 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이 그 일로 인하여 어떤 형태로든 한바탕 소란스러울 것만 같았다. 또한 그 일이 어떻게 끝맺음 될지도 궁금하기만 했다.

야트막한 둔덕 너머로 병막 터 정영감 댁이 오롯하게 보였다. 그 옆 산자락 움푹 들어간 우묵배미 골짜기엔 뽕나무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뽕나무 숲을 바라보니 두서너 해 전 초여름 날에 있었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다붓다붓하게 떠있는 양떼구름이 자글자글한 햇살에 새하얗게 보였던 초여름 어느 날 오후였다. 우묵골로 들어서는 산기슭 한 모퉁이에는 개복숭아 나무가 볼품없이 서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눈길 한번 주지 않아 토라진 얼굴을 생뚱맞게 내밀었다.

뽕나무 나뭇가지마다 다닥다닥 매달린 오디가 검자주색으로 달달하게 익어 있었다. 그때쯤이면 깃털이 유난스레 빛나는 오디새가 어김없이 찾아와 이 가지 저 가지로 폴폴 날아다녔다.

청록 들녘을 두 쪽으로 가르는 기차가 하늘가에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그리고 연기는 뽀얗게 실실이 흩어져 엇비스듬한 산기슭 뽕나무 밭에도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까까머리 동네 꼬마녀석들이 책보자기를 질끈 동여매 어깨 둘러메고 검정 고무신 찢어져라 숨차게 달려왔다. 그리고 검붉은 오디가 주렁주렁 매달린 뽕나무 가지에 깨금발을 딛고 들러붙었다.
두 손이 까맣게 물들도록 빈 도시락에 저마다 욕심껏 따 담았다. 푸른빛이 도는 덜 익은 오디는 새콤달콤한 맛이 났고 새까맣게 잘 익은 오디는 밍밍하면서도 달짝지근했다.
한동안 그리 정신없이 먹고 나면 입 언저리가 온통 까맣게 물들었다.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어린 날의 그런 추억 하나를 청아한 하늘에 곱살하게 수놓았다. 힘껏 뻗어난 줄기 따라 주렁주렁 매달린 검불그스름한 오들개를 정신없이 따다 보면 넉잠누에 뽕잎을 따러 오시는 밭주인에게 들켜버렸다. 화가 잔뜩 난 밭주인이 버럭버럭 큰소리를 치셨다.

우리들은 산자락으로 재빨리 도망을 쳐 어른 키만큼이나 자란 호밀밭 속으로 몸을 숨겼다. 마치! 잔뜩 굶주린 매에게 쫓기는 수꿩처럼 조심스레 머리를 슬쩍 내밀어 조심스레 밭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동네 고샅길엔 허리 굽으신 옥순이 할머니가 풍사(風邪)를 막아준다는 말만 철썩 같이 믿고 손때 자르르 흐르는 뽕나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며 걸어오셨다.
들녘 남의 집 밭에 일 나가셨던 어머니가 뽕잎에 싸 들고 오신 검붉은 오디를 한 움큼 손에 드시고 하나씩 내 입에 쏘옥 넣어주셨다. 그리고 앞산 자락 한 곳에 눈길을 모으시며 차오르는 설움을 참으시려는지 땀내 찌든 삼베 저고리 품 안에 나를 꼭 껴안고 볼을 부비셨다. 그럴 때면 짠해지는 어린 가슴이 울먹여져 나도 몰래 눈언저리가 젖어들었다.
그렇듯 고향 땅은 어느 한 곳을 둘러보아도 정이 든 만큼 곱살한 추억들이 간직되어 있었다.

추수가 끝난 넓은 들녘으로부터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여법 시원스럽게 폐 속 깊이 가득 스며들었다. 비석골 언덕배기 과수원에서는 붉게 익은 사과들이 앞 다투어 탐스레 얼굴을 내밀었다.
언덕 너머 비석골 공동묘지 펑퍼짐한 곳에 자릴 잡은 기성이형 아버지 분묘가 눈에 띄었다. 분묘는 마을을 향해 자리 잡고 있어 두 집 사이에서 일어난 그런 복잡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록으로

 

Copyrigt By 들메로 가는 길 All right reserved.
Webpage Administrator dooris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