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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96 조회 : 1,607




우묵골로 넘어서는 둔덕마루엔 높다랗게 뻗어난 백양목이 촘촘하게 들어서 나름대로 운치 있게 보였다. 새하얀 구름 한 덩이가 차분하게 떠올라 그 우듬지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한동안 은행나무 가지에 앉아 노닐던 작은 새 한 마리가 두어 번 세차게 우짖고 자태를 뽐내듯이 힘찬 날갯짓으로 비상을 했다. 창창한 하늘 드높이 솟아오른 새가 어디론가 점점 멀리 날아가 작은 점 하나 같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내 시야를 벗어나 하늘가에 그 모습을 홀연히 감췄다.

내 작은 초가집에 탱탱한 햇볕이 포근하게 내리쪼이고 있었다. 남들 눈에는 무척 어설프게 보이겠지만 작은 마당이라도 있어 머물러 살아가는 동안 스스럼없이 두 어깨를 활짝 펴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렇듯 작은 은혜로움에 더는 바랄 것 없이 감사할 뿐이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탓에 지난해 늦가을에 지붕을 새로 이어 올리지 못했다. 잿빛으로 변해 가는 지붕은 그렇다하더라도 울타리만이라도 생솔가지를 걸쳐 보기 흉하지 않게 가려 놓으려 했다.

뒷산에 올라 생소나무 가지라도 베려고 마당가에 숫돌을 꽃아놓고 낫을 갈았다. 예리하게 선 날에 다칠까 싶어 볏짚으로 단단히 둘둘 말아 감았다. 그리고 추녀 밑 굴뚝 옆에 오랫동안 쓰질 않아 먼지가 더북하게 내려앉은 지게를 꺼내 멜빵 길이를 조정해 어깨에 둘러메었다.
겸사겸사 모처럼만에 아버지 산소도 둘러보려고 마음먹었다. 그동안 조금씩 아껴 놓았던 용돈을 끌러 어젯밤에 삼식이네 집에서 사온 막걸리 한 병을 지게 목에 단디 매달았다.
그리고 아랫바지 주머니에 술잔을 하나 챙겨 넣었다. 모처럼 함께하는 나들이에 신이 났는지 얼마쯤 앞장을 서 껑충대는 검둥이와 함께 산으로 향했다.

조금은 비스듬하게 기우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그때 요란스런 굉음 속에 하얀 비행운을 남기며 전투기 한대가 서편 하늘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산은 푸른빛에서 벗어나 잡목들 잎사귀가 듬성듬성 누렇게 물들고 있었다. 여름부터 성급했던 홍단풍은 붉은 잎들을 자랑스레 내어 밀었다.

하얀 구절초가 바람에 간들거리는 둔덕바지 으름나무엔 혼잡스럽게 얽혀 있는 넝쿨 사이로 누르스름한 으름이 간간이 보였다. 가을바람에 얼굴이 간지러운지 다물었던 입을 이제야 벌리려 했다.
그리고 산머루 잎 사이에 머루 알이 수줍은 듯 몸을 감춰 탱탱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산자락을 굽이돌아 억새세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올랐다. 솔잎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한 줄기 시원한 갈바람이 앞가슴에 와 닿아 서늘키만 했다.
앞서 가던 검둥이도 힘이 드는 것 같이 보였다. 혀를 길게 내밀고 뒷다리 한쪽을 바짝 치켜들고 오솔길 싸리나무에 대고 오줌을 시원스레 누고 있었다.

갈참나무 가지가 하늘을 찌를 듯이 뻗혀 있는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동네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평온하게만 보였다. 집집마다 가을 추수에 여념이 없는 분주한 모습들이 눈 안에 들어왔다.
불그레하게 녹슨 양철 지붕 방앗간에선 벼 방아를 찧느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발동기 소리가 산언덕 위에까지 끊임없이 들려왔다.

저 작은 동네 안에서 온갖 사연 속에 그토록 숱한 다툼과 미움이 오고 가는가? 하고 잠시 생각을 하여 보았다.

산 밑 아래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마을 앞에 곧게 뻗은 기차선로가 중천에 떠있는 야무진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반짝였다.
멀리 밋밋하게 보이는 읍내 건물들의 높고 낮은 모습들이 하늘과 맞닿은 듯 보였다.

산 아래 펑퍼짐한 곳에 아직은 잔디가 덜 자란 듯해 보이는 곳이 종구 어머니의 분묘임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불그레하게 익어가는 청미래덩굴이 발목에 걸려 조금은 쓰라렸다.

얼마 후 언덕길을 내려서 조금은 가파른 곳에 있는 아빠의 분묘 앞에 닿았다. 잠시 숨을 돌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 바라보았다.
산 아래 검정 콜타르칠을 한 학교 건물이 내려다 보였다. 비석골 산자락 비알진 밭엔 가을걷이 끝난 허수아비가 홀로 텅 빈 자리를 지키고 있어 그리도 허전하게만 느껴졌다.

아버지에게 술 한 잔을 따르고 무릎을 꿇어 절을 올렸다. 그런 후에 분묘 주위를 빙 둘러 보았다. 잘사는 종구네처럼 비석 하나 못 세워 드린 것과 종구네 아버지가 모지락스럽게 묘를 파가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마음이 너무 아파고 서글퍼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들어 애써 울지 않으려 머릴 들렸다.

작은 바위 위에 다람쥐 한 마리가 입에 두 손을 모으고 방정맞게 촐싹거렸다. 산자락 주변에 주인을 잃은 듯 훼손된 분묘 하나가 눈 안에 들어왔다. 세상에 태어나 주어진 명대로 살다가 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인데도 그리 무상하게 느껴졌다.
그저 소유하려는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고 바동대는 인간들 그 누구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되고 말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마음 더없이 허무하기만 하여 산모퉁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화동 산자락 모퉁이를 막 돌아 나오는 기차가 검은 연기를 듬뿍 하늘 위로 내품으며 힘차게 달려오는 모습이 그 또한 정겹기만 했다.

아침 일찍 읍내로 나가시는 어머니에게 솔가지를 베려고 산에 오른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는 남의 종산에 나무를 베면 누가 가만히 있겠냐고 하시면서 몇 번을 극구 말리셨다.
돈이 좀 들더라도 아랫집 사시는 흥남이 아저씨와 사람을 사서 늦가을에 지붕 올리면서 울타리도 손을 볼 거라고 하셨다.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공연히 낫을 들고 집을 나섰나 싶기도 했다.

만에 하나 운이 나빠 종구네 집 우직스런 용만이 눈에라도 띄면 어쩌나 싶었다. 가뜩이나 분위기도 안 좋은 집에 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단초가 될 것 같아 왠지 꺼림칙했다. 그래서 소나무 가지치기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병에 남아 있는 술을 아빠의 분묘 주변에 뿌리고 검둥이를 데리고 산을 내려섰다.

엇비스듬히 기운 오솔길 싸리나무 숲에서 갑자기 버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나도 모르게 놀라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누렇고 허연색의 산토끼 두 마리가 이리저리 잽싸게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자 이내 검둥이가 재빨리 숲속으로 뛰어 갔으나 그만 놓치고 말았다.

멋쩍은 모습으로 숨을 몰아쉬며 숲속을 빠져나와 내 곁으로 다가서기에 검둥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그럼 그렇지. 검둥이 니가 토끼를 잡는다구 아이고 토끼가 너를 잡긋다. 쥐 한 마리두 못 잡는 놈이 뭘 잡는다구. 그냥 집 마당에서 땅강아지나 잡구 놀아라.”

그래도 내 곁에 반려를 하는 짐승이기에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니 꼬리를 흔들며 함께 산을 내려섰다. 그리고 언젠가 영선이가 종이에 적어줬던 노래 ‘팅클팅클 리틀스타’를 어물어물 부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길모퉁이 밭에서 기성이형 어머니가 김치를 담그시려는지 총각무를 뽑으시다 나를 보시고 몸을 일으켜 세워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야, 상민아! 이따가 니 엄니 오거들랑 내가 꼭 할 말이 있어서 니네 집에 온다구 꼭 좀 말혀라 그리구 아래께 타작한 햇콩 한 사발 마루에 갖다 놨으닌께 그리 알아라.”
“예, 알었어유, 꼭 말할께유.”

깊은 속내는 알 수 없었지만 말씀하시는 어투와 표정으로 보아서는 아직은 두 집 사이에 별다른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며칠 전 늦저녁에 옥순이네 집에서 동근이 아버지가 하시던 말처럼 종구 아버지도 그 일에 대해서 아직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마당 한쪽머리에 쌓인 두엄을 발로 뒤적여 지렁이라도 한 마리 잡았는지 ‘꼭 꼭 꼭 꼭’ 소릴 내며 어미닭이 어린 병아리들을 불러 모았다.

뒤뜰 왕 소나무 머리 위에 노을빛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서둘러 둥지를 찾아 가려는가 텃밭 감나무 가지 위에서 산까치가 요란스레 울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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