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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97 조회 : 1,637




낟알을 줍듯 종일토록 들녘을 짯짯이 헤집던 해가 서편 하늘가에 불그레한 노을빛을 남기며 서서히 기울어가고 있었다.
더불어 일몰이 몰고 오는 어둠살이 들녘에 점점 짙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조금 멀찍하게 부연 흙먼지 속에 신작로가 바라다 보였다.
논산 읍내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가 샛강 다리를 건너 비스듬한 언덕배기를 내려서는 모습이 시야로부터 멀리 떨어진 만큼이나 희끄무레하게 보였다.

늘 그랫듯 동네 나들목 벼랑바위 앞에 앉아 더디 오는 어머니를 눈 시리게 바라보며 기다렸다. 뒤따라온 검둥이도 두 귀를 쫑긋하게 세우고 멈칫멈칫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워지는 늦저녁 하늘 아래 총명하게 빛을 발하는 별들로 곱게 둘러싸인 달은 더없이 밝기만 했다.
여름내 벼랑바위 등 언저리에 줄타기를 하던 담홍색 능소화도 이젠 꽃잎이 죄다 시들어 그 모습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어둑어둑해지는 밭둑 길섶엔 구절초가 어둠 뒤에 오는 청아한 밤이슬에 소리 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렇게 느긋한 심정으로 보고 싶은 어머니를 얼마쯤 기다리자 스멀스멀 어둠이 다가서는 주막집 정류장에 막차가 도착했다. 마지막 버스라 그런지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어머니를 포함하여 겨우 서너 사람뿐이었다.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어스름한 불빛이 유리창 너머로 새어나오는 지서 앞을 지나고 있었다.
잠시 후 어머니가 집으로 오는 지름길인 좁다란 논둑길로 접어들었다.

희부옇게 옅은 구름 사이로 둥그런 보름달이 성큼 얼굴을 내밀어 저녁이슬에 젖은 풀잎들이 달빛에 저마다 은은하게 빛났다.
나들목 벼랑바위 앞에 다가서는 어머니가 머리에 이고 계신 옹기가 달빛에 우련하게 보였다. 지쳐 있는 어머니의 온몸에서 비릿한 젓갈 냄새가 배어났다.
남들은 그런 냄새가 맡기에 역겨워 저마다 눈살을 찌푸리려는지 몰라도 나에게 만큼은 그런 냄새도 은혜로운 어머니의 냄새였다. 더불어 어린 내 가슴 한편을 마냥 시려오게 했다.

“상민이냐? 뭐하러 나왔냐? 그 시간에 공부 한 자리라두 더 하지 않구.”
“엄니! 빨랑 와 힘들지? 참, 아까 저녁나절에 기성이형 엄니가 밭에 김칫거리 뽑으려 왔었는디, 이따가 엄니한티 할말이 있다구 집으로 온다구 했어 그리구 우리 먹으라구 콩두 갖구 왔어.”
“응, 그려 그 아줌니가 급히긴 되게 급한 모양이다. 넘한티 먹을 거 쪼매라두 주는 양반이 아닌디.”
“몰라, 암튼 이따가 꼭 온다구 기달리라구 했어.”

은은한 달빛에 비친 어머니의 그림자를 따라 둔덕을 넘어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회색빛으로 색 바랜 초가지붕 위에는 하얀 박이 둥그런 배를 봉긋하게 내밀어 해말끔한 달빛아래 마냥 풍요롭게 보였다.

밝은 달이 마당 한 자락에 싸리 울타리의 그림자를 기다랗게 남겨 놓았다. 호롱불 흐릿하게 비추는 마루에서 밥상을 가운데 놓고 어머니와 서로 마주보며 저녁밥을 먹었다.
반찬이래야 새우젓 무침에 배추를 양념에 버무린 풋김치와 고구마 순을 삶아 무쳐놓은 것 정도였다.
그래도 그런 자식이 못내 귀여웠나? 밥 위에 얹어 찐 황세기를 내 밥그릇 앞에 놓아주셨다. 그러면서 비록 가난할지라도 튼튼하게만 자라라고 귀에 아프도록 이야기를 반복하셨다.
훈훈한 어머니의 정을 듬뿍 느끼며 저녁밥을 먹고 포만감에 젖어 토방으로 내려섰다.

토방 밑에는 그새 날름 먹어치웠는지 애꿎게 빈 밥그릇만 대굴대굴 굴리던 검둥이가 무엇을 보았는지 큰소리로 짖어 얼른 밖을 내다보았다.
동근이네 배추밭 앞을 걸어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기성이형 어머니와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기성이형인 것을 이내 알아챌 수 있었다.

“상민 엄니, 집에 있는감? 나여, 기성 에미.”
“어여 오세유, 안 그래두 기다리던 참이였구만유, 기성이 총각두 같이 왔네.”
“장사하구 오느라 저녁이 늦었구먼 그려. 에이구 사는 게 뭔지, 이리들 힘들어서야.”

검정 치마 깃을 앞으로 모으시며 격 없이 마루에 걸터앉으셨다. 그 옆에 뻘쭘하게 서 있던 기성이형이 나를 보고 슬며시 눈웃음을 지었다.
어머니께서는 밥상을 챙겨 부엌에 내다놓으시고 마루 한쪽에 자릴 잡아 앉으시며 말씀을 하셨다.

“아직까정 그 집에서 아무런 말이 없던가유? 지금쯤이면 뭔 말이 나와두 나올 건디.”
“말은 뭔 말이 있어. 그러니 속이 터져 이러구 댕기는 거지, 저놈은 죽어라구 동섭이한티는 못 빌러 가긋다구 저러니 으짜면 좋을랑가 모르것네 그려. 꼭 죽은 지 에비를 닮아서 그런가 저 지랄로 황소고집을 부리니 내 원 참.”
“기성이 총각 내가 이런 말할 자린지 아닌지는 모르긋지만, 엄니 속 그만 썩이구 종구 아버지한티 무조건 잘못했다구 빌지 그려, 그 방법이 지금은 제일루 좋은디 기성이 총각 생각은 어뗘?”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자 한동안 두 분의 말을 듣고 있던 기성이 형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지두 엄청나게 답답하구만유, 이미 동네방네 소문이란 소문은 다 나버렸는데, 엄니 말대루 빌어 볼려구 생각두 했는디. 지난봄에 그 일두 있구 해서 좀 그렇구먼유.”
“음, 그려. 주제에 부끄런 줄은 아는게벼, 소문이 두려우면 어여 가서 죽이든 살리든 맘대루 하라구 빌어 봐. 나는 뭐 속 배알머리두 없는 줄 아냐, 내 애비 그렇게 죽은 거 생각만 하면 시방도 치가 떨린다. 알기나 알어 이놈아.”
“아줌니 좀 감정을 낮추구 말씀하세유, 지는 안 당했남유? 저 상민이란 놈때문에 지 애비 묘등 파 가라구 그 모진 소리 다 듣구, 결국은 그 놈에 빗 갚느라구 목숨같은 앞들 논 서마지기 화산리 강씨네 한테 안 팔았남유. 그래두 한 동네 살어 정들었다구 자기 마누라 죽었을 때 슬프게 울어 줬네유.”
“허긴 그려 집이두 할말은 많을 꺼여, 에이구. 그나저나 상민에미 어떻게 허면 좋겠어 그렇다구 내가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구.”
“그러게유 내생각으로는 기성이 총각 어찌됐든 지간에 그저 머릴 숙이구 빌었으면 좋것는디, 참 그리구 정희는 뭐라구 하던감.”
“뭐 별다른 말은 없었어유, 그저 처분만 바라구 있는 거지유. 그리구 엇그제부터는 정희가 문밖에두 못 나와서 얼굴 한번두 못 보았네유.”
“아이구 저 미친놈 말하는 것 좀 봐. 그래 니 에미 속 타는건 모르구 기집 얼굴 못 보닌게 그리 답답허냐? 속 창새기 없는 놈 같으니라구.”
“이제 그만하세유, 아줌니 속 답답한 줄 알지만서두, 기성이 총각두 생각이 있겠지유, 어디 기성이 총각이 말 좀 혀봐!”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을 하시자 기성이 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유 괜히 지 일루다가 신경 쓰시게 해서 미안허구만유, 지가 함 찾어 가불래유. 뭐, 죽기 아니면 까물치기 겠지유, 안되더라두 끝까장 혀 볼께유.”
“그려 이놈아! 진작에 그렇게 나올 것이지 에휴. 그러니께 상민 엄니가 한번 더 욕 좀 봐야 되것구먼 그려, 동근이 아버지 헌티 말해서 동근이 아버지랑 우리 기성이가 같이 좀 갔으면 좋것구먼 그려, 아무래두 지 놈 혼자 가는거 보다야 몇곱빼기 낫지.”
“그래유, 아무래두 혼자 가서 말하는 것보다야 그 어른하구 같이 가는 게 훨씬 낫지유. 암튼 지가 내일 아침 나절 읍내 가기 전에 잠깐 동근이 아버지 만나서 부탁 드릴 테니 기성이 총각이 그 집으로 같이 가보도록 혀.”
“암튼 고맙네 그려, 자꾸 찾어와서 폐만 끼치구 미안혀, 어쩌것는가 이웃간이니까 이 꼴 저 꼴 다 보구 사는 거지, 그럼 밤두 이슥해졌구 이만 가볼라네.”
“폐는요. 다 서로 돕구 살아야지유,암튼 잘 살펴서 내려 가세유.”

기성이 형 어머니와 기성이 형이 마루에서 함께 일어나 싸리문 밖으로 나서 좁다란 밭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돌 틈새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더없이 처량하게 들려왔다. 더할 나위 없이 밝기만한 보름달은 방죽가 미루나무 우듬지에 둥그렇게 걸려 마을을 찬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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