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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98 조회 : 1,589




가을은 풍요로움 속에 알찬 결실을 거둬들이는 뿌듯한 계절이라고 흔히들 말한다. 아랫마을 초가집들 마당엔 추수를 하여 걷어드린 벼 더미가 높다랗게 쌓아올려져 있었다.
그런 모습들이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여도 그저 남 일인 것처럼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랬기에 마음은 예전처럼 그 풍요로움에 쉽게 동요되질 못했다.

아니! 그보다는 가난으로 얻어진 소외감에 점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남들처럼 잘살지 못하는 서러움에 오히려 마음이 울컥 치밀어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려 했다.

타작이 끝난 집에는 사는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고 나락 가마니가 마루 위에 쌓여졌다. 동네 고샅길을 걷다보면 그런 넉넉한 모습들이 반쯤 열려진 대문 틈사이로 보였다.
허나 가난한 나는 이제 그런 흉내도 낼 수조차도 없었다. 방안 윗목에 쌀 한 가마니 쌓아놓기는커녕 내 땅이라고 흙 한 줌이라도 만질 수가 없었다.

들녘 논 서마지기를 남에게 그리 허망하게 내어주게 만든 종구 아버지가 다시금 야속하다 못해 한없이 미워졌다. 남의로부터 얻어 쓴 빚에 찌들려 금쪽같은 땅을 어쩔 수 없이 남의 손에 넘겨주고 말았다. 땅을 잃어버린 허탈감과 아쉬움이 뒤엉켜 온몸에 아리도록 스며들었다.
그런 아린 속마음 아랑곳하질 않고 방앗간 발동기는 제 철을 만난 듯 연일 ‘쿵쿵 쿵쿵’ 요란스럽게 소릴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냉엄한 현실 속에 땅 한 평 없이 사는 가난한 나에게는 풍요란 말 자체가 그리 쉽게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그와 함께 처해진 내가 겪어야하는 현실이 냉혹함을 다시금 깨닫고 마음에 의지를 더욱 굳게 하려고 나름대로 각오를 굳게 했다.
현실의 벽이 높고 두터울지라도 숱한 담금질 속에 무딘 망치로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강해지는 무쇠처럼 나 또한 더욱 강인해지고만 싶었다.

동네 고샅길을 걸어가는데 뉘 집에서 겨울 이부자리 호청을 준비하는가? ‘똑딱 똑딱 똑딱 똑딱’ 다듬잇돌 두드리는 방망이 소리가 동네 고샅길로 들려왔다.

이장님 댁 대문 앞에는 밤색 코르덴 멜빵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고 누룽지를 한 움큼 손에 쥔 막내둥이가 껑충거리며 문밖을 나서고 있었다. 울타리 모퉁이 돼지우리에는 새끼를 배었는지 검은 암퇘지가 불룩한 배를 쑥 내밀고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고샅길에는 몇 발짝 앞에 선 종금이 누나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렇듯 평온한 가운데 저마다 가을의 결실이 가져다주는 풍만함에 잔뜩 젖어 있건만 나 혼자만은 그런 느낌으로 부터 철저히 소외된 듯싶었다.

방앗간 뒤편의 높다란 가죽나무 위에는 가을 해가 느긋하게 내려 쪼이고 있었다. 예년 같았으면 벌써 벼 타작을 마쳤을 종구네 집엔 정희누나와 기성이 형 사이에서 일어난 일 때문인지 널따란 함석 대문 두 짝이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그리고 무심한 구름만 기와지붕 위를 여유롭게 지나고 있었다.

불그레하게 익어가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토담 밖으로 가지가 휘어진 경수 아저씨네 집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두 내외분이 나락 방아를 찌러 방앗간에 가셨는지 마당에 누렁이가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고샅길 중간쯤에 있는 석주네 집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지은 고택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다른 집들에 비해 지붕 높이가 유난스레 낮았다.
석주네 집은 석주 할머니께서 몸이 불편하셔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계셨다. 약탕기에 약을 달이는지 지긋한 한약 냄새가 담 밖으로 흘러나왔다.

우물가 종기형네 집 흙 담장 울타리엔 잘 익은 누런 호박 한 덩이가 힘에 겨운 듯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뒤뜰에 대나무 숲이 무성한 주현네 집에는 종구 따라 화산리 교회에 갔는가? 주현이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앞마당엔 주현이 동생 수영이가 헌 이불호청을 잘라 만든 헝겊보자기를 두른 채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주현이 어머니께서는 서툰 가위질로 상고머리(일명 바가지머리)를 자르고 계셨다.

우물터에 닿아 물을 뜨려 머리를 숙이니 유리처럼 맑은 물 위에 얼굴이 일렁였다. 우물가 한쪽에는 손맛 좋기로 소문난 삼식이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널따랗게 생겨 불알이 축 늘어진 홍어 한 마리를 바닥에 내려놓고 칼로 익숙하게 손질을 하시며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상민이 물 길러 왔구나, 어린 것이 욕 많이 본다. 요기서 그기까지가 어디라구. 저 무건 걸 메고 나르니, 암튼 니 엄니한티 잘혀야 된다.”

삼식이 엄니의 그 말에 잠시 잊은 듯싶었던 엄마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우울해졌다. ‘젓갈 사유, 젓갈!’ 하시며 이 동네 저 동네를 헤매고 다니실 어머니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런 생각에 젖어 물을 길고 있는데 고샅길에서 옥순이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우물로 걸어오며 말을 건넸다.

“상민아, 물 길러 왔냐? 오늘 우리 집 타작하거든. 그렁께 쪼매 있다가 즘심밥 먹구 가!”
“니 말은 고마운디 그냥 집에 가서 먹을래.”
“뭐, 아무데서나 먹으면 으떠냐? 맨날 혼자 먹는 밥 질리지두 않냐? 그리구 우리 집 첨 오는 것두 아닌데, 뭘 그리 빼냐 빼긴. 암튼 그리 알구 나랑 같이 가. 물일랑은 이따가 길어 가구.”

고마울 정도로 말을 하는 옥순이의 뜻을 거절하기 어려워 가지가 휘어지도록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반가운 듯 눈짓하는 옥순이네 대문 앞에 닿았다.
대문을 들어서니 마당 안에서는 ‘우릉우릉’ 호롱기를 발로 밟아 돌리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그리고 마당에는 동네 아저씨들 몇 분이 일을 하고 계셨다.
일을 하시는 동네 어른들과 옥순이 어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모든 분들이 너무도 일을 열심히 하시고 계셔 편하게 밥 얻어먹으러 온 것 같아 조금 멋쩍었다.

그런 부자연스런 내 모습을 옥순이가 눈치 챘는지 뒤뜰로 같이 가자고 하여 뒤뜰 장독대로 갔다. 무화과열매가 쩍하고 입을 벌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그중에서 잘 익은 것으로 골라 옥순이가 몇 개를 따 주었다.

“야, 상민아! 아까 어른들이 새참 드시면서 하시는 얘기를 들었는디, 기성이 오빠가 삼식이네 집 품앗이 일 끝내고 종구네 집으로 찾어 가서 종구 아버지에게 정희누나랑 결혼을 시켜 달라고 한다는디 어찌 될란가 모르긋다.”
“뭐 어찌되기는 어찌되겄냐? 그렇다구 죽일 꺼냐 살릴 꺼냐? 안 그러면 자기네 딸 물어 내라구 허긋냐 안 그래? 사실 따지구 보면 이 번 일만 없었으면 기성이 형이 머리 숙이구 빌 일두 없지 뭐. 너 같으면 ‘애비 없는 후레자식’ 이란 말 듣구 가만히 있긋냐?”

지난봄에 비석골에서 종구와 싸운 일로 종구 아버지에게 들었던 그 말이 다시 떠올라 힘을 주어 큰소리로 말을 했다. 그러자 옥순이가 조금은 당황스러운 듯 작은 얼굴에 두 눈이 동그라져 나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했다.

“허긴 니 말두 맞는 말이지 뭐, 허구 많은 말 중에 왜 그런 말을 해서 넘 염장을 지르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빰을 한 차례 치구 말지 에이구. 야, 밥상 차릴 모양이니께 이제 그런 말 그만두구 밥이나 먹으러 가자.”

언제나 큰일을 치루는 집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마당 한 가운데 밥상을 널찍하게 펼쳐놓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푸짐한 반찬에 막걸리 잔이 오가며 서로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동네 분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마치고 옥순이네 집을 나서 고샅길로 들어섰다. 앞에서 옥순네 타작마당 일이 궁금해서 둘러보러 오시는지 팔순을 넘기신 옥순이네 친할머니가 허리 굽으신 몸으로 지팡이를 짚고 걸어오셨다.
얼른 걸어가 허리를 납작 구부리고 절을 올리며 인사드리니 귀가 어둡고 눈이 침울해서 그런지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만보셨다. 그래서 앞으로 바짝 다가서 큰소리로 다시 인사를 올렸다.

“할머니, 지가유 등뫼골 사는 상민이에유. 아버지 함자가 기자 태자고요.”

그제서야 할머니께서는 겨우 알아들으신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는 불편하신 몸을 약간 흔드시며 걸어가셨다.
물을 길어 지게에 지고 종구네 집 앞에 이르렀다. 동네 꼬마 녀석들이 방앗간에서 훔쳤는지 저마다 손에 하얀 쌀을 한 움큼씩 움켜쥐고 재빨리 고샅길로 도망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경수 아저씨가 뒤를 따라 나오시며 아이들을 향해 큰소리를 치셨다. 그런 모습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마냥 귀여웠던지 그저 ‘허허’ 하고 웃으시며 방앗간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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