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때 늦은 후회인지? 아주 작은 일들 하나까지 떠올라 기억의 범주 안에서 맴돌지라도 늘 함께 하지도 못하는 냉담한 현실에 그저 숙연해질 따름입니다. 다소 어설프게 찌푸렸던 겨울 하늘이, 오늘 우리 둘에 만남을 축복해 주려는 듯, 뒤 늦게 점점 선명한 청자 빛을 띄운 모습으로 눈앞에 살갑게 다가섭니다. 아마! 저 하늘도 그토록 염원했던 우리 두 사람의 해후(邂逅)임을 알고 있기에 나름 축복해 주려는 가 봅니다.
개울 건너 양지 바른 곳 나지막한 언덕 위에 가는 조릿대가 빼곡하게 들어차 자연스레 트여진 좁은 만큼이나 호젓한 오솔길도 그런 내 마음을 익히 알고 있는 듯이 자연스러움의 운치를 가득 자아냅니다. 더불어 인색하게 햇살이 함초롬하게 비춰 비록 좁은 길일지라도 나름 부지런히 드러내려 합니다. 그에 부응하듯 가는 싸리나무 가지 사이로 들려오는 작은 산 새들의 가녀린 울음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무릇 거친 세상사에 시달렸던 내 육신에 또 다른 생기를 부여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바깥 세상과 아주 오래 전부터 등 돌린 산길의 참한 속내의 진솔함이 가득 묻어 나는 것 같아 실로 뜻 깊은 고적(孤寂)함을 더하는 듯합니다.
아주 오래 전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로 기억 되네요. 그 해 어느 가을 날 이곳에 왔을 때, 도토리를 주워 모으려 부지런히 꼬리를 들던 다람쥐의 앙증맞은 모습을 당신이 그도 좋아했었는데 이젠 보이지 않아 조금은 서운함이 드는군요. 그라도 숱한 세월 속 묵직하게 쌓인 우리들의 한처럼 소나무 가지 위에 무겁게 얹혀 있던 눈덩이가 부는 바람에 부스스 흩어져 힘을 잃어 땅 위에 뿌려지는 모습을 그저 나 혼자서 바라봅니다. 이리도 어처구니 없이 끝나버리고 만 가슴 시린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는 듯하여 가슴 가득 시려와 깊은 숨을 내쉬니, 입김이 안개 마냥 하얗게 흩어집니다. 참으로 천체의 별들 만큼이나 많았던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사연 들을 어찌? 다 말로써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애탄 할 따름 입니다.
길 건너편 산 중턱에 자리한 기상 관측소 건물의 돔이 예법 높게 올려 보입니다. 예전엔 그토록 친숙한 모습으로 보였던 둥근 돔 형식의 지붕이 왠지? 모르게 낯설기만 합니다. 그 산기슭 아래 개울가엔 머리에 흰 눈을 가득 가득 이고 있는 바윗돌이 묵묵히 눈을 들어 물끄러미 나를 바라봅니다. 마치 우리들의 해후를 인색하게 반겨주려는 듯하게 보여도 왠지 조금은 낯설어지기만 합니다 마음은 늘 함께 머물길 원하지만 그리 못하는 냉혹한 현실 앞에 애를 때울 뿐입니다. 이제 저 돌들 위에 삶의 무거운 짐을 잠시인들 벗어 놓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다가서고 싶어지는 마음에 시린 마음 한 자락을 풀어 헤쳐 놓으려 합니다. 이리 궁색하게 마음 억누르는 제 자신이 그저 초라할 뿐입니다.
사찰로 오르려는 엔진의 소음이 정적을 늦은 아침 햇살의 풍요가 차 한쪽 앞면 모서리에 부딪칩니다. 유리창에 부딪친 햇살이 당신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처럼 빛을 발합니다.
두고 온 아래 세상 밖은 아직도 멈추지 않는 혼돈과 탐욕으로 이글거리는 광분(狂奔)의 소용돌이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이리라도 이 길 위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은 오로지 내 가슴 깊이 큼직하게 자리한 당신의 마음에 덕(心德)이라 생각합니다
지난 몇 해 전 여름 등산 길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소나기 비를 흠씬 맞아 비를 피하려 뛰어들었던 저 소나무는 지금도 그대로 우뚝 버텨 서 있는데, 그곳에 꼭 있어 보여야만 할 당신이 없어 빈자리가 더욱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흠씬 비를 맞아 이마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무딘 내 손으로 훔쳐 내려 주었고, 당신의 입술에 내 입술을 포개려 하자 부끄러운 듯이 몸을 가볍게 돌리던 그 귀엽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그리 적지 않은 숱한 세월이 흘렀건만,아직도 내 뇌리 속 깊이 각인된 기억들이 이리 생생하게 떠오르는데, 정녕! 내 간절한 내 바램은 늘 마음 속 깊이 남겨지길 요원할 따름입니다. 그날 우리가 저 나무 밑에서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말들을 그리 수도 없이 주고받았었나요?
이제 그런 기억들이 때때로 떠 올라 아픔이 되풀이되더라도 결코 당신을 탓하지 않겠습니다. 더불어 삶에 허덕이느라 다 기억하지 못하여도 조금도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 내가 잊었다 하여도 그 이야기 하나도 놓치지 않고 가득 담아 간직하고 있는 당신이, 한 치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