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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紫雲英) 조회 : 1,071




신(神)이 이미 예시해 놓은 삶의 긴 여정에서,수십 해를 넘겨 살아 오는 동안 이미 무딜 대로 무디어진 감성의 깊은 내면 속에,잊혀진 줄만 알았던 아픔들이 하나둘씩 눈을 떠 지겹도록 스멀댄다.

그럴라치면 마음이 처연해져 이내 울먹이는 심사에 지난 날에 수 놓아졌던 그 아픈 기억들 모두를 깡그리 지워 떨쳐내고 싶은데,마음 한편은 이미 암울했던 그때의 그시절로 여지없이 되돌아가고 마니.어찌보면 이 모두가 이율배반적인 심성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줄기차게 해보며 살아왔다.

이제 물에 흐름 따라 정처없이 떠내려가는 부엽(浮葉)처럼,흐미해져가는 기억 속에 지난날들에 있었던 내 발자취를 다시 한번 들척이듯,그때 그 시절로 나 혼자만의 시간 여행을 떠나려 한다.

처헤진 시대적 상황이 극도로 열약하고 불우했던지라 그 시대를 살았던 우리들 모두는 가난이란 통한의 부표(附票)를 하늘이 내려준 형벌처럼 몸둥아리에 달고,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먹을 것을 찾아 들녘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 보이는 푸른 것들 중에 뜯어 먹어서 죽지만 않는다면,서로 앞을 다퉈 뜯어먹고 살았던 처절했던 기억들이 하나 둘씩 다시금 모질게 떠오른다.

농촌 들녁에서 태어나 줄곳 머물러 살아 온 터라,익숙해진 발걸음에 삽짝을 벗어나 어슷하게 굽어진 들녘 길 논배미에 들어서기만 하면,두눈에 그리도 흔하게 자운영 꽃이 보였다.

그런 자운영 꽃을 눈에 박히도록 보았지만 화사함을 느껴기보다는 때없이 찾아드는 배고픔이 늘 앞섰다.
그래서 저녁 한 끼 나물죽이라도 쑤어 허기를 달래려 논빼미에 들붙어 나물을 뜯었고,다보록하게 자라 푹신한 솜이불처럼 포근하게만 느껴지는 독사풀 위에 야윈 두 무릎팍에 푸릇푸릇 풀물이 잔뜩 묻어나게 나뒹굴며 놀았다.

어린 유년 시절의 가슴 아린 추억이 송두리째 남아 있기에, 그리 쉽사리 지워버릴 수도 없어 심속 깊이 옹골지게 아픔으로만 각인된 꽃이 바로 자운영(紫雲英)이다.

허기져 까칠해진 몸뚱아리에 찰싹 들붙었던 모진 가난 속에 한 서린 그 시절을 살아온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모두는,마디마디 뼛속을 뚫고 때도 없이 돋아나는 아픔에 고통을 운명이 아닌 숙명처럼 탐탁치도 않게 야금야금 베어 먹고 살았었나 보다.

봄 햇살에 화사한 척 불그레 피어나는 분홍빛 자운영 꽃이 때론 탐스럽게도 보였지만,지지리도 억척스럽게 번져났던 괴질로 나보다 두 살 터울인 단 하나 뿐인 누이가,그리 허무하게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헤진 이불 호청에 둘둘 말려 한 서린 삼도천을 건너,마을 앞 산자락 그 어느메쯤에 뉘도 모르게 묻히고 말았다.
살아 온 나날 속에 때대로 비좁은 가슴 속에 치밀어 오르는 혈육의 정에,마냥 슬퍼지는 마음이 그침새 없어 그 자리를 수십 번 아니 그 보다 더 애절하게 물어 보아도,꾹 다무신 내 어머니의 입은 단 한차례도 열린 적이 없었다.

아니! 마지막 숨을 걷우실 때 까지도 끝내 알려주질 않으셨던 내 어머니,한이 가득 서린 척박한 삶의 여로 속에 눈언저리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은, 찢어지는 가슴에 힘겹게 흘러 내리는 혈루였다.

그랬었기에 이따금씩 내 누이 생각이 날 적마다 마음 속 깊이 늘상 이렇게 되뇌였다.
" 비록 내 생명이 끝나 잊혀지고 사라질지라도 누이야! 넌 다시 한번 꼭 살아나라 "

그닥 달갑지 않은 여름을 조급하게 부르는 강렬한 햇살에,모질게 그을려 시푸르뎅뎅하게 변해가는 자운영 꽃은,풍진(風塵) 세파(世波)가 그토록 잔인하게 할퀴어 온통 멍들게 해 놓은,우리들 저마다의 섧디 설은 자화상이었다.

그리 시원치도 못해 어정쩡한 바람이 후덥지근하게 불어와 둔덕마루에 느슨한 척 능청을 떨면,저 또한 덩다라 너울너울 유회(遊回)하는 흰 구름 속에,절규하듯 내뱉는 우리들의 짙은 한숨 소리가 한데 응어리져 들붙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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