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뭉게구름이 눈부시게 피어오른 내 고향 들메마을의 하늘은 온통 선명한 옥빛으로 욕심껏 채워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뉘라도 내 고향 땅 어느 한곳인들 그리 쉽게 탓할 수 없었다. 아니! 시샘이 날 정도로 곱게 물든 하늘이 손끝에 닿기만 하면 이내 듬뿍 묻어날 것만 같아, 그저 고웁다는 표현만으론 턱없이 부족할 것 같았다.
황토내음 물씬 나는 비알진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니, 크고 작은 모습으로 다닥다닥 들붙어 널따랗게 펼쳐진 보리밭들이 마음속에 숱한 정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아지랑이 아른거리는 보리밭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서둘러 청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늘 그랫듯이 중천에 떠오른 둥그런 해는 온유로운 눈빛을 가득 모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방만한 들녘을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자릴 잡고 있었다.
그럴 즈음 늦은 봄 산들바람에 보리들의 연초록 푸름이 물결을 이뤄 계절을 양껏 찬미하는 듯했다. 그리고 보리밭 사이로 보이는 구불구불한 길이 농익어 가는 햇살에 아른거려 눈이 잔뜩 시렸다.
바람에 일렁이는 보리의 초록빛 물결 속에 홀연히 떠올랐다. 속된 세상 바람 따라 그 먼 길을, 서글프게 너무도 일찍 떠나신 내 어머니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회오인양 자책하는 마음에 쌓였던 그리움을 한데 모아 폐 속 깊이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이내 한스러움이 응어리졌던 만큼이나 하늘 향해 힘껏 내쉬었다.
그런 서러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훈훈한 바람 속에 살랑이는 보리 이삭들이 무언의 군무를 이뤄 촌락의 정취를 가득 자아내고 있었다. 아마도 엄동 속 인고(忍苦)의 나날을 모질게 견뎌낸 값진 보상(補償)인 듯싶었다.
아침 이슬에 보리 이삭들의 반짝이는 모습이 자못 청초하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더러는 높새바람이 간간히 불어도 봄은 완연한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겨우내 땅에 찰싹 들붙었던 보리들이 어느새 듬직하게 자라 무릎 밑까지 닿으려 했다. 머지않아 보리 이삭들은 탱글탱글한 모습으로 풍성하게 끝맺음할 것 같이 보였다. 그리고 지난날의 온갖 풍상 저만은 알고 있는 것처럼 하늘 향해 목을 곧게 세우고 있었다.
그 무렵 마을 어른들은 보리 한 포기가 밥 서너 숟갈이 된다고 하시며 그리도 애지중지하셨다. 물론 그 이면에는 대다수의 마을 사람들이 소작농의 틀을 벗어나질 못해 지주에게 막중한 소작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그런 연유로 감당해야만 되는 소작료에 대한 강박감이 다분히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민담처럼 전설이 되어 버린 ‘보릿고개’이지만, 내 어렸을 적 춘궁기(春窮期)에는 먹을 것이 그리도 없어 더없이 긍휼하기만 했다. 다 자라지도 못한 풋보리 어린 싹을 베어다 된장을 풀어 나물죽을 쑤어 끼니를 때웠다. 그마저 여의치 못하면 마을 아낙네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들에 나가 쪼그리고 앉아 자운영과 나물들을 캤다. 더러는 남정네들이 밤에 금강 둑으로 나가 석유로 횃불을 밝혀 갈잎에 기어오르는 갈게도 수월찮게 잡았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 모두는 먹어서 죽지만 않는다면, 허기진 배를 채우려 그 무엇이라도 먹고 살았던 몹시도 어렵고 암울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동네 어른들 틈에 끼어 밤늦도록 갈게를 잡고 있노라면 멀리 남녘으로부터 달려온 기관차가 어김없이 호남선 선로 위로 세차게 달려왔다. 그리고 기관차의 앞머리에 달린 커다란 전등에 대낮보다 더 밝은 불빛을 도도하게 밝히며, 마을 앞을 지나 이내 산모롱이를 휘돌아 기적 소리를 밤하늘에 드높이 내질렸다.
그 당시 손목시계는 커녕 벽시계도 아주 귀했던 어둡기 짝이 없던 그런 시절이었다. 마을 사람들 모두는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위치와 기관차의 기적소리에 어렴풋이 하루의 시간을 가늠하며 살았다.
먹을 것이 그리 귀했던 탓에 대다수 동네사람들은 점심 끼니를 걸러, 허기진 배를 달래며 애꿎게 하늘만 탓하며 살았던 지난날들이었다. 지겨웠던 그 모두를 애를 써 지워보려 해도 옹이처럼 박힌 또렷한 아픔들이 어김없이 반추를 한다.
학교 운동장 측백나무 울타리가 그리도 높고 길게만 보였던 내 어렸을 적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보리 이삭들이 누렇게 익어 갈 무렵이면, 행여라도 누가 볼까 두려워 신경을 써 한두번쯤 주위를 짯짯이 살펴보았다. 그리고 얼른 보릿목을 툭 따서 손바닥으로 비벼 후후 불어 껍질을 벗겼다.
덜 여물어 푸릇푸릇한 알맹이를 한 움큼씩 입 안에 털어 넣고 자금자금 씹어 삼켰다. 그러면 입안에 가득 비릿한 풋내음이 퍼지고 입 언저리엔 푸릇푸릇한 흔적이 잔뜩 묻어났다. 그래도 우리들 모두는 그도 좋다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키득거려 웃는 티 없는 동심에 젖어 살았다.
그리고 보리보다 목이 더 긴 밀 이삭은 마치 껌을 씹는 것같이 쫀득거렸다. 그런 이유로 저마다 깜냥엔 껌을 만들어 본다고, 턱뼈가 뻐근하도록 더욱 오래도록 씹었다. 그래서 학교로 가는 길가에 밀밭들은 짓궂은 우리들 손에 이삭들이 잘려나가 흉한 모습들이 볼성사납게 듬성듬성 보였다.
때로는 서투른 보리 서리에 불을 붙이려다 눈썹까지 그을리고 입가에는 시커멓게 검정이 잔뜩 묻었다. 더러는 가재를 잡아 구워 먹으려 돌덩이를 그리 수없이 들춰도 가재는 좀처럼 밖으로 나올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동네 사람 모두는 부족한 식량을 아끼려고 보리알에 감자를 섞어 넣었다. 그런 보리밥 한 사발을 그리도 빨리 비웠다. 그래도 마치 뱃속에 걸신(乞神)이 들어앉아 있는 것처럼 돌아서면 늘 배가 고팠다.
동구 밖 냇둑에 소풀을 뜯기려고 송아지를 몰고 걸어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헤진 반바지를 뚫고 새어나오는 방귀소리가, 내 귓가에 예법 크게 들려와 부끄러움에 혹여 누가 들었는가? 싶어 고개를 좌우로 돌려 얼른 주변을 살펴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더러는 씹으면 달작지근한 물이 나오는 삘기도 뽑아 먹었다.
또 한편으로는, 손가락이 가시에 찔리면서도 고집스레 찔레 순을 따서 조막만한 손안에 가득 움켜쥐고 배가 고팠던만큼 야물게 씹어 삼켰다. 어떤 날에는 내친구 코흘리개 옥순이가,내손안에 하얀 아카시아 꽃을 한 움큼씩이나 꼭 쥐어주고 그도 부끄러운지 방긋 웃으며 마을을 향해 혼자서 되돌아 갔다.
보리바심을 할 때는, 어린 우리들 모두 다 작은 고사리 손이라도 도움이 되려고, 보릿단을 한아름 껴안고 힘이 들어 뒤뚱거리며 집안 마당으로 들어 날랐다. 그럴라치면 보리 이삭 까끄라기가 가슴팍에 찰싹 들붙어 근질거렸고 귓불을 성가시게 찔러댔다.
그렇게 보리타작이 끝나 한숨을 돌려 하지 감자를 캐고 나면 어김없이 지루한 여름 장마가 요란스럽게 시작되었다. 눅눅해진 습기에 타작이 끝나 마당 한쪽에 쌓아 놓았던 보릿단에서 드문드문 싹이 돋아나기도 했다. 그래서 잠깐이라도 햇볕이 들면 온 식구들이 서둘러 마당에 보릿단을 헤쳐 널기 바빳었다. 그렇게 우리들 모두는 한 알의 보리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타다닥타다닥’ 보릿짚 태우는 연기의 매캐한 냄새는 내 삶 속에 지울 수 없는 가난의 징표였다.
마을 사람들은 여린 마음에 살기 어려워 끼니를 거르는 이웃 사람들의 딱한 사정을 그냥 넘기질 못했다. 보리밥 한 사발을 뉘 볼까 싶어 삼베 치마로 가려 끼니를 굶는 옆집 담 너머로 슬그머니 넘겨주었다.
그래도 그즈음엔 그런 풋풋한 정을 나누며 살았었다.
날마다 어머니는 옹기동이를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 읍내로 젓갈 장사를 하러 나가셨다. 늘 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빈 집에 놀 것 또한 그리 없었다. 너무도 심심해 이리저리 궁리타 못해 뒷뜨락 참나무에 붙어 있는 풍뎅이를 잡았다. 도망치지 못하게 네 발가락을 떼어 마룻바닥 위에 배가 보이게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손바닥으로 바닥을 세게 치면서 외로움을 달랬다. 깜짝 놀란 풍뎅이가 날개를 쫙 펴고 빙글빙글 도는 모습에 혼자서라도 그렇게 웃으며 놀 수밖에 더는 없었다.
배가 고플라치면 그을음으로 온통 시커먼 시렁 위에 올려놓은 삼베 보에 덮인 보리밥을 성큼 꺼냈다. 그런 후 강된장에 열무김치를 넣어 석석 비벼 배를 채우고, 입 언저리를 소매 끝으로 쓱쓱 문댔다. 배가 부르면 햇볕에 서서히 달아오르는 마당으로 나와 사립짝 그늘 밑에 주저앉았다.
언제나 긴 목을 빼어 내민 해바라기와 함께 내 어머니 돌아오시는 논배미 둑길을 눈이 빠져라 바라보았다. 그맘때쯤이면 아랫집 득수네 울타리 탱자나무의 하얀 꽃들이 기다림에 지친 내 눈망울에 아물아물하게 보였다.
해질녁 내 어머니가 돌아오시면 빈 젓갈 동이 속에 담겨있는 포대 자루 속에는 젓갈과 맞바꾼 몽글몽글한 보리쌀이 부듯하게 담겨 있었다. 그렇게 보리쌀이 가득하게 담긴 만큼 내 어머니는 종일토록 고개가 무거워 지칠 정도로 숱한 고생을 하셨다.
그런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아파오면 얼른 작은 두 주먹으로 어머니 등이라도 두드리면, 어느새 어머니는 내 손을 꼭 붙들고 말 없이 흐느끼셨다. 그래도 아픔이 힘에 겨우신 듯 온몸을 바르르 떨며 억지로 참으셔도 눈언저리에는 물기가 촉촉하게 서려 있었다.
무더운 여름날엔 덥지 말라 힘들여 부채질을 해주시던 자상하신 내 어머니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런 생각에 가칠해진 아픔들이 고뇌하는 내 몸을 다시금 엄습하여 억척스레 들붙으려 한다.
그래서 검정 줄무늬가 가운데 선명하게 그어진 보리알은,우리들 모두가 여름을 버텨내는데 필연적으로 필요한 삶의 근간이었다.
내 나이 겨우 다섯 살 되던 해 초여름 그 어느 날 새벽,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아낸 한국전쟁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는 천인공노할 놈들의 만행을 피하려 고향을 버리고 산세가 험한 곳을 찾아 피난길에 나섰다. 그때 대다수 피난민들은 보리 주먹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었다.
찌는 삼복더위에 내 어머니는 칭얼거리는 어린 자식이 그리 안쓰로워 달래려는 마음에 맷돌에 보리쌀을 넣고 곱게 빻았다. 그리고 보릿가루에 완두콩을 넣어 보리 개떡도 쪄 주셨다.
우물가 향나무 위에 저녁 노을빛이 어둠살을 몰고 살포시 찾아들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저마다 차례를 기다려 둥그런 돌확 안에 보리쌀을 넣었다. 그리고 반질반질하게 질이 잘 난 둥근 돌로 부연 뜨물이 나오도록 곱게 갈아 저녁밥을 지으려 했다.
어느덧 세월이 몇해 흘러 이성에 눈이 겨우 뜰락 말락 할 무렵에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아주 서툴게 흉내를 냈었다. 뜻도 모르고 가슴 설레었던 그 시절 보리밭 둔덕은 우리가 남모르게 만나는 비밀 장소였다. 그토록 좋아하는 옥순이가 혹시나 집안 어른들이나 식구들에게 들켜 나오지 못하나 하고 가슴을 잔뜩 졸여가며 두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얼마 후 그윽한 아카시아 향에 흠씬 젖은 어둠을 헤치며 단발머리 소녀 옥순이가 조심스럽게 내 앞으로 다가섰다.
그 순간 온 혈관이 굳어 다 막히고, 내 왼쪽 가슴에 자리한 심장이 곧 터질 듯했다. 그리고 두볼과 귓불이 온통 뜨끈뜨끈하게 달아올라 두 귀가 멍멍해져 마치 귀머거리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딴에는 옥순이를 만나면 나름 열심히 멋진 말만 한다고 굳게 마음먹었는데, 미묘한 감정에 숨이 거칠어져 아무 말도 나눌 수 없었다. 그저 몽롱한 정신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 반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그날 밤은 은빛 보름달이 대낮보다 더 환하게 밝았었다. 그랬기에 마냥 탐스럽게 보이는 옥순이의 고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기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하고 싶었던 말들을 못내 하지도 못한채 서운한 마음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오는데,논배미에서 요란스레 들려오는 개구리들 울음소리가 마치 그런 바보스러운 나를 조롱이나 하는 듯했다.
이제 오월이 되면 스스럼없이 내 고향으로 달려가,그때 그 언덕에 다시금 서 보고 싶어진다. 그토록 푸르던 보리밭과 그 아름다운 전경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 기억하고 싶다.
그러나 가슴 설레게 했던 눈망울이 큰 단발머리 옥순이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 허나! 내 고향의 훈훈한 바람은,세월따라 주름진 얼굴로 변했지만 애써 되뇌이려 하는 내 마음을 헤아려 변함없이 불어줄 것만 같다.
조급함이 앞서는 마음은 온통 설레임으로 가득가득 차올라 다시금 눈에 떠오른다. 내 고향 언덕아래 푸르디푸르게 넘실대던 보리이삭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