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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松花) 조회 : 973





요즈음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그럴진데, 나 또한 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삶에 대한 모든 여건들이 극도로 어려운 상태이다.
어찌보면 가장 보편적인 말이 되겠지만 그로 인해 파생된 후유증을 수습하느라 뒤돌아볼 겨를이 없었다.그리인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대하는 감성조차, 다소 무디어진 것 같다는 생각을 조심스레해보는 요즈음이다.

이렇듯 처해진 제반의 여건들이 마냥 열약하다 보니, 솔직히 내 몸과 마음으로 받아드리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느낌 또한, 앞서 말한 그런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도 못하는 것만 같다.

허나 피페해져 가는 인성일지언정, 그래도 마음 한켠은 저마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꽃들의 생동감에 잔뜩 젖어 들떠 있었던 봄의 그 어디쯤에, 아직도 머물러 있는 것만 같은데, 그리 성급하게 여름을 재촉하려는가? 후덥지근한 열기로 가득찬 바람이 썩 달갑지 않게 이따금씩 불어와, 조석으로 기온의 차가 심해 고르지 못한 날씨와 끝을 가늠키 어려운 불경기로, 가뜩이나 짜증스런 일상에 초조한 우울감만 더하는 듯 싶다.

그나마 크던 작던간에 다소나마 위안이 될려고 그러는지(?)
그런 바람결에 생스러운 내음을 미세하게나마 풍기는 송화가루가, 세월이 흐른만큼이나 거무퇘퇘하게 색이 바래 모양새라고는 하나도 없는 내 작은 집 쪽마루 위에, 금빛 가루를 잔조롬하게 흩뿌려 놓는다.

변화무상한 삶 속에 허우적거릴지라도, 또 하나의 계절이 주는 색다른 느낌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허이 받아드리며, 샛노란 솜병아리의 여린 솜털처럼 가볍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초여름의 뜨락에 나섰다.

영겁(永劫)에 늘상 제자리를 지켜 우뚝 서 있는 앞산 소나무들의 가지 끄트머리마다, 오글오글하게 달려 있는 누런 송화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는 바로 자연의 섭리에 의한 오묘한 솜씨로 황금빛을 적절하게 물들여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들을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보노라니, 나름나름 사노라 잠시인들 잊은 듯 했던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 다시금 되살아나, 참기 힘든 그리움들이 떠올라 가슴을 잔뜩 메이게 한다.

세월따라 색 바랜 아픔의 분말(粉末)처럼 송화가루가, 버름한 흙벽 흙먼지가 가득 쌓인 창문 턱에도, 눈에 띄일만큼 자연스럽게 흩뿌려져 있었다.

세월따라 청청거목(靑靑巨木)으로 자라난 너처럼 나 또한 고향에 대한 그 모두를 세세히 기억할 수 있으련만, 이젠 손바닥만한 시골 마을을 모지락스럽게 뚝 짤라 둘로 갈라 놓은 호남고속도로가 마냥 매정스럽게 느껴진다.

그와 더불어 날로 발전을 거듭하는 물질문명의 덕(?)으로 하나 둘씩 옛 모습을 잃고 안타깝게 쇠잔해져 가는 고향 마을의 그 모든 것들이 안타깝다 못해 끝내는 처연키만 하다.

고향 땅이라고 어쩌다 짬을 내어 발걸음을 해봐도 그토록 그리워했던 옛모습 한구석마져도 깡그리 뭉개버려 종적이 묘연하니, 마음 아려도 이 또한 되돌려 찾을 수 없음에 그저 애탄할 뿐이다.

같은 하늘 아래 머리를 두고 함께 웃고 울어 때묻은 정이 들었던 마을 사람들이였건만,이젠 사면팔방(四面八方)으로 뿔뿔이 흩어져 더러는 그 행적조차 찾을 수 없는 서글픈 실정이다.

아쉬움 가득찬 눈빛으로 언제나 과묵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노송만을 바라보다, 이윽고 또 바라보며 한참동안을 그저 아둔하게 서 있기만할 뿐이였다.

기억을 거슬러 아주 오래 전 내 어렸을 적, 송화 가루 향기가 허기진 배를 더욱 고프게 했던 그 때가, 아리게 떠올라 다시금 가슴이 뭉클해진다.

뒷산 온갖 산새들의 울음소리 따라 송화가루가 온 동네 집집마다 바람결에 묻어오면, 그맘때쯤이면 뒷말 큰동네로 시집가는 동네 언년이 누나의 잔칫날이 다가왔다.

철없는 우리 또래 코흘리개들은 언년이 누나의 결혼식에 대한 깊은 의미도 모른채 어쩌다 운 좋게 떡 한조각이라도 얻어 먹을까 하는 기대감에 그저 덩다라 신바람이 났었다.

잔치를 한참 앞두고 마을에서 손맛이 꽤나 뛰어나 엄청나게 우쭐대는 우식이네 엄니가, 마치 조상님 신줏단지 모시듯이 온갖 정성을 드려 시루 속에 잘 다려 내린 귀하디 귀한 송화주를 만들어 잔칫상에 내놓았다.

그렇게 만든 술의 도수가 너무 높아 술을 마시고 일어설 수가 없어 그만 땅바닥에 주져앉고 만다고 하여 옛부터 사람들이 앉은뱅이 술이라고도 불렀다.
그런 귀한(?) 술은 면내에 있는 각 마을에서 하객으로 오신 지체가 꽤나 높으신 어르신네들이나 드셨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취기가 몸에 가득차게 올라 불그죽죽한 얼굴에 숨이 넘어갈 정도로 소리를 길게 질질 끄시는 기현이 할아버지의, '청산리 벽계수야'가 잔칫집 안마당에 가득 넘쳐나면, 바야흐로 언년이 누나네 잔치는 무루 익어만 갔다.

아직은 덜 자랐다는 이유만으로 코흘리개 우리들은, 동네 어른들이 앉으신 멍석을 넓다랗게 펼쳐놓은 자리 근처에도 감히 낄 수 조차 없었다.

그래서 어린 우리들은 조금 멀찍이 떨어진 곳 마당가에 얼씬거리며, 그리도 먹고 싶은 마음에 때묻은 손가락만 입에 물고 얼쩡거렸을 뿐, 어찌할 도리가 전혀 없었다.
그저 조금 전에 보았던 어린 눈들에 다소 생소하게만 보였던,결혼식 장면들을 눈여겨 본 것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래도 어쩌어찌하다 잔칫국수라도 나올라치면 그 놈에 어른들 먼저라는 말에, 주인댁 아주머니와 그집 식구들의 눈치만 살피며 처분만 바라고 무한정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쯤이면 점심 끼니를 때울 시간이라 배가 수월찮게 고팠다.
그런 탓인지 식탐이 날 정도로 음식들을 푸짐하게 가득차려 놓은 잔칫상을, 허기진 두눈을 끔뻑거려 애꿎게 바라만 보며, 그저 저도 모르게 입안에 가득 고여오는 생침을 맹칼없이 그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런데 그 숱한 음식들을 밖으로 들고 나오는 부엌을 한동안 바라보니 그도 안쓰럽게 보였는지? 부엌에서 일손을 거드시던 동네 아주머니들이,주인집 아주머니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시며 제가끔 자기 자식들 손 안에 한 움큼 재빨리 쥐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뉘라도 보면 흉이 될까 싶었나(?) 얼른 자기네 자식들의 등을 가볍게 떠밀어 마당 밖 멀리 사라지라고 서둘러 내쫒으셨다.

그런 모습들을 바라보고나서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잽싸게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번잡스런 그런 틈사이에, 아주 커다란 상 위에 놓여진 잔치 음식들 중에, 그토록 먹고 싶었던 송화다식이 눈에 띄어 얼른 두 손을 모아 한움큼 잔뜩 움켜쥐었다.

그리고 마치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같이 쿵쿵거리는 가슴에, 고샅길 흙담장을 향해 있는 힘대로 뛰어가,길모퉁이 방앗간 공터 앞에 덥쩍 주저앉아 가뿐 숨을 힘겹게 고르고 있었다.

떡살로 곱살한 무늬가 나오게 눌러 찍은 송화다식 한 움큼을,그라도 놓칠새라 손에 꽉 움켜쥐고 짙은 솔향기를 맡고 또 맡으며, 어린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마냥 설레이기만 했다.

덥석 한입에 넣어도 양에 차지 않을 것을, 그토록 오랜만에 맛보는 귀한 음식이라 아껴 먹으려 나름 애를 썼다.

손톱 밑에 검은 때가 잔뜩 낀 손으로 다식 한쪽 끝머리부터 조금씩 떼어 먹다보면, 손때가 잔뜩 묻어 조금은 짭짤한 맛이나도 더러운줄 모르고 그저 소중하게만 느껴져 아끼고 아껴 아주 조금씩 떼어먹었다.

우선 식탐을 충족시키는 하였으나, 차분해진 마음에 되돌려 생각해보니 첫번째 걱정은, 아무리 잔치집 음식이라고 하지만 내 욕심이 앞서 주인 아주머니의 승락도 없이 그만 훔쳐오고 말았으니, 온종일 젓갈장사를 하고 지치신 몸으로 집에 돌아오실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드릴 일을 저지른 잘못으로 무척이나 마음이 편하질 못했다.

어머니께서 늘상 하시던 말씀들 중에, 동네 이웃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두팔을 걷어부치고 일손을 도웁고 아주 작은 성의라도 전하는 것이 사람된 도리라고 하셨는데,나는 아무리 배가 고푸고 먹고 싶어도 참질 못하고 남에 것을 훔쳤다는 죄책감과, 그런 이야기를 들으신 내 어머니께서 얼마나 실망을 하실까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였다.

그렇게 송화떡에 정신이 팔려 훔치고 말았으니, 이런저런 걱정을 하느라 시간을 놓쳐버려 언년이 누나의 결혼식 잔치가 끝난 줄도 몰랐다.
가뜩이나 거무잡잡한 얼굴에 여드름이 더럭더럭 나 있어, 엄청 우락부락하게 생겼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한 새신랑 얼굴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하룻밤을 자고 날이 새면 신랑을 따라,이제 동구 밖을 벗어나 소릿재를 너머 뒷말 신랑네 집으로 가면, 출가외인이라고 한동안은 언년이 누나 얼굴을 보기 힘든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송화떡 몇개를 훔친 죄가 마음에 걸려 언년이 누나네 집 가까히 갈 수가 없었다.

뒤늦게서야 동네 사람들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언년이 누나가 눈물을 질금질금 짜며 꽃가마에 오르는 것도 못 볼수 밖에 없어, 그저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노루목을 넘어가는, 새신랑이 타고 가는 조랑말과 언년이 누나가 타고 넘는 가마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없이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되돌려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그리 대수럽지 않은 일이였지만, 되돌려 생각해보니 동네 또래들 중에서도 조금은 별난 짓을 하였던 것 같았다. 그때엔 그리도 순진했던 어린 마음이 온통 양심에 걸려 두근거렸으니, 바로 그날 부엌 안에서 주인 아주머니 몰래 훔쳐 손에 움켜쥐고 나오다 재수가 없었던지 그만 들키고 말았다.
"저 못된 놈 좀 봐" 하시며 소릴 지르시는 주인 아주머니를 아랑곳 하지 않고 죽어라 도망쳐서 겨우 얻은 떡 몇조각에 불과한 송화다식 때문이였다,

그날 오후 그리도 아까워 베어 먹다 남은 작은 떡 조각을 꼭 움켜쥔 여리디 여린 내 작은 손등 위로, 한낮 햇살이 그도 안쓰러웠던지(?) 오붓하게 내려앉고 있었다.

해마다 그맘때쯤이면,
자그마한 초가집 마당 가장자리에, 엇비스듬히 기운 흙담장 울타리 등을 헤집고 붉은 찔레꽃들이 앞을 다퉈 후드러지게 피어나려 꽃망울들을 애지중지 보듬었다.

후한 마을 인심만큼이나 개울물이 넉넉하게 흐르는 마을 앞 냇가엔, 훤칠한 키에 더부룩하게 자라난 돌미나리가 다소곳이 숨 고르고, 흐르는 물결사이로 성급한 송사리떼가 물살을 가르려 안간힘을 쓰니, 그와 더불어 얼굴 예쁘고 맘씨 고운 동네 누나들, 칠흑 같은 긴 머리 칠렁이어 남색 댕기를 곱게 매단 것처럼, 목이 긴 붓꽃이 쭈삣쭈삣 자라고 있었다.

그럴라치면, 냇뚝엔 마치 저도 시새움하는 양 새하얀 그리움을 뿌듯이 감싸 안고 피어나는 개망초가, 여름 나들이를 그리도 급히 서두르나 조막만한 얼굴에 하얀 분칠을 곱살하게 하려 알게 모르게 온갖 애를 쓰고, 햇살 고운 방죽가 둑에는, 하얀 오리 두서너 마리가 엉덩짝을 물 위로 잔뜩 처들고 자발맞게 들썩이며 날개를 푸덕여 자맥질를 하고, 더할나위 없이 온유롭게 품어내는 향이 지긋한 창포도, 이제나저제나 동네 아낙네들 고운 손에 닿을 날만 마음 조리며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쯤 바로 그날엔
나 또한 어김없이 발걸음 서둘러 찾아가리라. 내 어머니 외롭게 홀로 잠들어 계신 곳 양지바른 으름골 영면의 터에, 그리고 이제는 꼭 여쭈워보고 싶다.
( 엄마! 그 옛날 나 어렸을 적 언년이 누나 시집 가던 날, 내가 그집 부엌에서 훔쳐먹은 송화다식에 대한 일을 뻔히 알면서도 어린 제 마음이 아파할까봐 단 한마디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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