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에 빡빡 깎은 머리가 싫지 않을 만큼 따끔거리는 여름날 오후였다. 물론 가난의 탓도 있었지만 마땅한 놀잇감과 주전부리가 별로 없던 그 시절이었다. 나뭇가지마다 다닥다닥 달려 알맞게 익어 있는 달콤새콤 떨뜨름한 포리똥이 생각났다. 그래서 앞산자락 밑에 있는 우묵골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우묵골로 가는 산자락 밑 후미진 곳에는, 지난 일제강점기 때 전염병 환자들을 강제로 수용했다는 허물어져 가는 병막 터가 있었다. 숱한 해를 거듭하며 비바람에 붉게 녹슨 함석지붕과 다 기울어져 가는 건물 모습이 퍽도 초라하다 못해 음산하게 보였다.
더불어 마을로부터 외따로 떨어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 더더욱 음침하게 보이는 상엿집을 거쳐야 했다. 상엿집 옆에는 엄청나리만큼 무성하게 자란 호밀밭도 있어, 그곳 또한 어김없이 지나야만 했다.
동네 어른들이 그곳 호밀밭엔 용천배기가 살아 어린애들을 잡아간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무던히도 겁을 주었다. 그때는 어른들께서 하는 그런 말이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무척이나 무섭고 두렵게만 느껴지는 순수함이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평소에는 동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 그런지, 별건 대낮인데도 무섭고 꺼림칙해 혼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가려고 마음먹었다. 마을 앞 둥구나무에 닿으니 고샅길 첫들머리 집에 사는 우리들보다 두 살 어린 우현이가, 함께 산에 따라가고 싶어 했다.
그래서인지 강낭콩을 두루 섞어 사카린을 넣고 찐 널쩍한 보리개떡을, 선심이나 쓰는 듯이 한 조각씩 고루 떼어 주며 우리들 틈새에 끼어들려 했다.
검은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냇둑엔 하얀 개망초 꽃들이 다복다복 피어 있었다. 동구 밖 개울에 듬성듬성 놓여 있는 돌다리를 성큼 건너, 산자락을 거슬러 올랐다.
마냥 푸르기만 한 동쪽 하늘 끄트머리에 하늘이 찢어질 듯 날카로운 굉음이 들려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얼른 눈길을 모아 보았다.
산등성이 소리재를 재빠르게 넘어서는 은빛 전투기 두 대가 하늘가에 희뿌옇게 줄을 그으며 짝을 이뤄 날아왔다. 전투기 한 대는 하늘 높이 치솟으며 등짝을 보였다 배를 보였다 하면서 묘기를 부렸다.
그런 모습 놓치고 싶지 않아 가던 길 멈춰서 하늘을 올려보면 뜨거운 한낮 햇살에 눈이 가득 시려 오고 코끝이 몹시 간질거렸다. 그래서 참다못해 재채기를 냅다 하면 한쪽 콧구멍에서 희멀건 콧물이 들락거려, 가뜩이나 반질거리는 소매 끝에 쓱 문질렀다.
서편 하늘을 향해 세차게 날아가는 전투기의 모습이 그리도 신기해서, 저 멀리 자취를 감춰 사라질 때까지 눈이 빠지게 바라보았다.
산길로 이어져 조금 가파른 좁은 길을 따라 걷노라면, 길 양옆으로 밭에 콩잎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서둘러 걸어가는 발걸음에 놀란 듯 개구리 한 마리가, 오줌을 찍하고 깔리면서 얼른 밭으로 숨어들었다. 그러자 메뚜기들도 덩달아 놀란 듯 이저리 흩어져 나르고, 이따금씩 배부른 방아깨비도 눈에 띄었다.
우묵 골에 닿으니 포리똥 나무의 길쯤길쯤한 회색빛 잎사귀가 바람에 번득번득하게 팔랑거렸다. 그리고 가지마다 붉고 푸르르한 포리똥 열매가 풍성하게 매달려 퍽이나 탐스러웠다.
한 줌씩 훑어 입 안에 가득 넣어 깨물어 먹으면, 달고 시고 떨떠름한 맛이 제가끔 났다. 어쩌다 덜 익은 열매를 따먹으면 입안이 떨뜨름했다.
자발맞게 울어대는 산까치 소리를 들으며, 우리들 모두는 서로 뒤질 새라 가지마다 들붙어 정신없이 포리똥을 따먹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려 얼른 산 밑을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참나무 잎 사이로 풋나무를 하러 올라오는, 내 친구 곰보딱지 수연이의 얼굴이 보였다.
곧 녹아내릴 것 같은 파란 하늘 아래 작달막한 몸에 등지게를 걸머지고, 가파른 오솔길로 올라서는 모습이 야무지게 보였다.
우리보다 훨씬 먼저 산에 올라온 동네 형들은 포리똥을 진저리가 나도록 실컷 따 먹어 이젠 슬슬 싫증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개구리 뒷다리로 가재를 잡는다고 낭창낭창 가느스름한 조릿대를 꺾어 들고, 엇비스듬히 기운 벼랑 골 산 계곡 아래로 뒤늦게 온 우리들보다 먼저 내려갔다.
또 다른 짓궂은 동네 형들이 남의 집 감자밭에서 땅을 후벼 파고, 감자서리를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 멀지 않게 보였다.
이제 겨우 알이 굵어지려는 하지감자를 한 움큼 훔쳐와, 누런 보리 이삭과 함께 모닥불을 피워 놓고 구워 먹으려 했다. 매캐한 냄새 속에 희뿌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앞 들녘 논배미에서 애벌 김매기를 하시던 감자밭 주인아저씨가 진흙 묻은 맨발로 논둑길을 뛰어오시며 소리를 냅다 지르셨다.
“야, 이 썩을 놈들아. 어디로 도망가! 거기 서있지 못해! 내손에 잡히기만 혀 봐라. 내가 사금파리로 불알을 싹 발라 버릴랑께.”
마을에서 단 한 채뿐인 기와집에 사는 종구는 빡빡 깎은 머리에 동글하게 번져난 기계충 자리에 붉은 도장 인주를 잔뜩 바르고 있었다.
그런데 온 동네 아이들이 그렇게 거짓말이라고 지청구를 하는데도 유난스레 고집을 부렸다. 포리똥은 단내를 맡고 날아온 파리가 똥을 누워서 자잘한 검은 점들이 생겨 포리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막 우겨댔다.
고약한 심성에 쇠심줄같이 질기고 질긴 고집불통인 자기 아버지를 그대로 빼닮은 것 같았다.
닳고 닳아 해어져 헝겊으로 덧대어 꿰매 무릎이 툭 튀어나온 아랫바지 양쪽 주머니에 포리똥 물이 잔뜩 묻어나도록 욕심껏 한가득 땄다.
한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은 저녁 해질녘에 조개젓 장사 끝내고 돌아오시는 내 어머니에게 드리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다른 한쪽 주머니에 들어 있는 포리똥은 참나리 꽃이 마당가에 곱게 핀 작은 초가집에 사는 내 짝꿍 옥순이에게 주고 싶었다.
너무 어렸던 탓에 그런 감정들이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작은 것 하나라도 생기면 내 어머니 다음으로 꼭 챙겨주고 싶었다. 그럴 때는 늘 조막만한 얼굴에 배시시 웃음 지으며 스스럼없이 받아주었다.
마을로 돌아와 옥순이에게 힘들게 따온 포리똥을 건네주었다. 그러자 옥순이가 며칠 동안 보릿짚으로 공을 들여 엮어 만든 여치집을 슬그머니 내 손에 건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