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연기군의 동부에 위치한 조치원을 출발한 기차는 동부 산악 지역 제천에 닿으려고 충북선 선로 위를 힘차게 달려갈 것 입니다.
옅은 구름과 조금 짙은 구름이 서로 겹쳐 적절한 조화를 이룬 겨울 하늘이 탐스러우면서도 못내 공허하게만 보입니다. 이는 아마도 내가 당신과 함께 하지 못하는 상실감이 주는 커다란 아쉬움에서 발로된 지극히 자연적인 현상이란 생각이 수없이 듭니다.
바지런한 아침 해가 늘 그랬듯이 구름과 구름 틈사이를 헤집고 얼굴을 또렷하게내밀어 숨을 몰아 내쉬려나 봅니다 계절이 한파가 몰아치는 동한기에 시각이 이른 아침이고 주말을 피한 평일인지라 역 광장은 여늬 역들과 별반 다를바 없이 한산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런 탓인지 오가는 여행객들의 발길이 눈에띄게 적습니다. 역사를 에워싸고 있는 건물들의 높낮이가 비교적 낮아 말이 경부선과 충북선이 교차되는 순환역이지 소도시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곳인가 봅니다. 그라도 생김새가 각기 다른 크고 작은 건물들이 가지런히 내려쬐는 햇빛의 도움으로 각기 다른 형태로 길고 짧은 그림자를 남겨 겨울이 주는 고적(孤寂)함을 그라도 조금은 메워주는 것같습니다.
온통 당신 생각에 몰두하여 마냥 들뜬 마음에 아침을 거른 탓인가 봅니다. 그래도 끼니를 채워야할 때가 됐고 또한 시장기가 들기도 하여 어느 정도는 먹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그저 겨우 몇 숟갈 뜨는 둥 마는 둥 하게 흡족하지 못한 기분으로 엉거주춤 식당을 빠져나오고 말았답니다. 그건 비단 까칠해진 입맛 때문 만은 아닌 듯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나를 향해 가볍게라도 핀잔을 주며 마음 언짢아 할까 싶어 더는 말하지 않으렵니다. 밤사이 내린 무서리의 축축한 습기가 채 마르지 않은 광장 가장자리 벤취에 잠시나마 호젓이 앉아 가죽자켓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한 개피를 피워 물고 생각을 모아 봅니다.
전남 광주광역시 계림동에 있는 계림장 여관 103호 달셋방에서 우리 세식구가 처음으로 둥지 않인 둥지를 틀고 함께 살았던 기억이 또렷하게 떠오릅니다.
뭇사람들의 시야에 여관이란 장소가 그다지 좋은 느낌을 주는 곳이 아니라서,자라나는 어린 아기에게 상처를 주어서는 안된다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주위 사람들의 따가운 눈길을 피하려 무척이나 애를 썼지요? 그에 못지 않게 우리 두 사람 사이엔 서로가 말 못할 가슴 아린 사연이 또 하나 있었지요.
우리가 기거했던 장소가 여관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터라 더욱 그랬으리라 믿습니다. 그저 오가다 하루 이를 잠시 머물러 가는 것도 아니였고 달세로 몇달을 장기투숙하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이 우리들에 관한 일들에 크던지 또는 작던지간에 필요 외의 관심을 갖을 수밖에 없었지요,
남들이 보기에 남편이라는 사람은 삼십대 후반의 나이에 무슨 사연인지는 몰라도 전신에 심한 화상을 입고 그마져 왼쪽 다리를 목발에 의지하는 불구자로 보이니 더욱 관심이 갔고 여보라고 불리는 여자는 아내인지 애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진종일 여덟 살난 여자 아이와 진종일 함께 놀다가 저녁 해질 무렵이면 동네 미장원에 들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를 곱게 매만져 치렁치렁거리고 화장을 짙게한 얼굴에 립스틱 짙게 바르고 나름 화려한 의상에 꽤나 굽이 높은 힐을 신고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날마다 마을 슈퍼 앞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데 아직은 철부지인 듯한 어린여자 아이가 고사리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하니 그모두가 그 사람들 눈에는 의아스럽다 못해 자연스레 거십거리가 되고 말았지요.
그런 열약하고 지극히 자유롭지 못한 환경의 여건 속에서도 정신적인 압박을 전혀 받지 않고 불구인 나에게 당근과 채찍을 써가며 재기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고 하늘을 저주할 정도로 억울하게 잃어버린 모정에 서러워하는 어린 것에게 가슴으로 낳은 정을 아낌없이 주었던 당신이였답니다.
당신을 그리 어처구니 없이 그 먼 곳으로 먼저 보내고 지금 이렇게 홀로 남아 있지만 단 한가지 그 숱한 멸시와 조롱 속에서도 나와 어린 자식을 끝까지 지켜주었던 고운 마음씨에 늘상 고마움을 느끼며 살고 있답니다. 이는 내가 이승에서 신이 나에게 부여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라도 변함이 없으리라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다짐을 합니다.
막말로 세상 모든 사람들로 부터 술집여자라는 낙인 찍힌소리를 들으면서도 어미를 잃어버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을 하면 빼앗겼다는 말이 타당할 정도로 아픔으로 가슴에 안고 사는 어린 딸 자식을 위해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으면서도 억지로 뭇남정네들에게 웃음을 팔아 모은 꼬깃꼬깃한 돈으로 하늘 아래 땅 위에 오갈데 없는 우리 두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였습니다.
그런 당신은 시쳇말로 " 개가 같이 벌어서 정승 같아 쓰라" 말을 누누히 강조하면서 수없이 미안스러워 하는 나에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이해 시키려 무단한 노력을 하였답니다. 그런 욕된 환경적 여건 속에서 몇달을 뼈가 시리도록 고생을 하여 모은 돈으로 반나절을 헤메인 끝에 얻은 방이 무등산 아래 두 칸 짜리 허름한 옥탑방이 우리들 만의 보금자리였지요. 햣볕이 따스했던 어느 해 봄날 유난스레 몸집이 작은 아기 머리를 곱게 빗겨 예쁘게 따아 주던 그 다정했던 모습이 문득 떠올라 그저 눈시울이 젖어듭니다.
아참! 혼자만의 생각에 열중하다보니 또 하나 깜빡 잊어버린 것이 있네요. 당신에게 꼭 다시금 보여주고 싶어 어깨에 둘러메고 온 가죽배낭 이랍니다.
당신과 우리 두 생명이 처음 만났던 곳이 울산 태화강변에 있던 포장마차였지요? 그 해 여름은 유난스레 더웠지요. 그러나 아픈 상처가 채 아물지도 못한체 밀린 치료비를 감당치 못해 말이 좋아 병원측의 배려로 "권고퇴원"을 했지 거의 끌려나오다 싶히 강제퇴원을 하여,제대로 치료 받지 못한 상처 부위에 종양이 생겨 제 손으로 응급처치를 해야만 하는 절박한 현실이였답니다. 그러다 보니 약품을 사야할 돈과 끼니가 되면 내 눈치를 살피며 배고파하는 어린 것을 보다 못해 인간의로써 눈꼽만큼이나 남은 마지막 자존심을 버리고 차마 해서는 않되는 줄 알면서 어린 것을 앞세워 앵벌이를 시켰으니 바로 내가 하나 뿐이 내 분신인 내 자식을"껌팔이 소녀"로 만들고 말았답니다'
그것이 바로 지금껏 지울 수도 없기에 영원한 형벌로 남아 내 왼쪽 가슴에 자리잡아 요동치는 심장에 죄인으로써 낙인을 찍고 말았답니다.
그러니까 바로 처음 껌장사를 시작한 그날 새벽녁에 태화 강변 그 포장마차에서 업소 일을 마치고 동료 종업원들과 회식을 하는 자리에 어린 내 여식인 소영이가 당신한테 껌을 들고 팔아달라고 사정을 하였고 그일을 계기로 나와 당신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워진 것 입니다.
그때 포장마차 밖에서 목발에 몸을 기대여 염치없이 기다리는 나에게 당신이 분에 가득 찬 성난 얼굴로 다가와서 이렇게 말을 하였지요? " 당신이 이 아이에 아버지 입니까? 참 어처구니가 없어 할 말이 없네요. 그래 세상에 자식 앞세워 껌팔이를 시키는 부모도 있나요?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아이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고 자유로운 환경에서 교육을 받아야할 권리가 있습니다,,,,,,,,"
약간은 취기가 섞인 어눌한 발음이였지만 마치 예리한 칼날로 제 생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과 잊을 뻔 했던 자각을 다시금 뼈저리게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에게는 이렇게 말을 하였지요?
"너를 보니 참 할말이 없다. 다 어른들 잘못이지 어린 네가 무슨죄가 있겠니.그래 네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둘러 메고 온 사방을 이렇게 돌아다녔니?,,,,,,"
바로 그날 새벽 소영이가 속옷 가지와 세면도구 그리고 치료 약품이 들어 있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었고, 지금은 당신을 만나려 그 가반늘 다시금 둘러메고 있습니다. 이 가방이 비록 세월 속에 닳고 닳아 어깨에 둘러메는 멜방고리가 낡아 느슨해졌어도 나에게는 이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줄은 당신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가방에는 내 눈물과 피와 깜 그리고 애증과 번민, 회한이 가방의 가죽 표피에 세월의 때와 더불어 고루 묻어 있답니다.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낯선 길에 마음만 바빠져 대합실(待合室)로 들어섭니다,
출구쪽 전광판(電光板)에 좌우로 율동(律動)하는 빨간색 글씨의 흐름이 다음 열차 08:00 제천행 무궁화호라고 눈에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어서 빨리 오라고 손짓하여 부르는 당신 모습도 함께 떠오릅니다.
매표구(賣票口)로 다가서 역무원(驛務員)에게 장애인 증명서{복지카드}를 보여주고 창측 자리를 부탁하여 승차권을 구입하고 열차가 미리 기다리고 있는 홈으로 걸어갑니다.
이곳도 겨울철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계룡역 보다는 몇 사람 정도 더 많게 보입니다.
제천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 3호차 11호석에 자리를 잡고 커튼 옆의 옷걸이 고리에 배낭을 벗어 겁니다
이제 한 시간 사십 분 여를 더 달려가야 제천역에 닿을 것 같고 조치원역을 정시인 08시 00분에 출발한 열차가 홈을 빠져나갈 무렵 차내의 안내 방송이 들려옵니다.
한동안 장황스럽게 들리는 방송소리가 멈추고 도심 외곽을 벗어나 얼마를 달린 열차가 이윽고 충청북도의 도청소쟈지로써 행정도시이자 교육 도시의 면모(面貌)를 갖춘 깔끔한 건물들이 무심천 샛강 모습과 함께 밀려오는 청주역으로 들어섭니다. .
그리고 얼마 후 청주역을 출발한 열차가 도심을 홀가분하게 빠져나와 오근장역에서 잠시 멈추는 듯하더니,이내 청주공항역을 향해 내달립니다.
가볍게 흔들리는 차창 밖으로 겨울 햇살이 따사하게 내리쬐입니다. 차창 밖으로 청주공항 관제탑(管制塔)이 다소는 한가롭게 보이는데, 요란한 소음을 내며 하늘 위로 여객기 한 대가 이륙을 하고 있습니다. 청주공항은 원래 공군 비행장이였는데 지금은 국제공항이 되었답니다.
규모가 간이역 수준에 멈추는 공항역은 상하행선의 홈이 단 하나뿐인 단촐한 역으로 열차에서 내리는 손님이 겨우 세명뿐이고 열차에 오르는 손님 또한 두어 명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도 역세권 탓인지 마을이 그럴싸 하게 형성되어 있습니다.
도심을 빠져나온 열차는 조금은 한적하게 보이는 시골 마을 모습들이 눈에 띄이는 증평역을 통과하여 십여 분 후 그리 크지도 않아 어느 역과 다름없는 음성역에 가쁜 숨을 내몰아 쉬며 멈춰 섰습니다.
물론 전국을 일일생활권으로 묶으려고 전 국토를 거미줄 같이 도로망으로 개설한 정부의 탓도 있겠지만 이곳 역시 승객이 이리 적으니 경부선과 호남선을 제외한 모든 노선에 열차 운행이 적자를 면치 못한다는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듯합니다
한 시간 반 이상을 더 달려야 하는 거리이기에 잠을 청해 보려 눈을 감았으나 잠은 통 오질 않고 눈알만 눈 안에서 제멋대로 굴러 통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다시 되돌아오는 귀갓길에는 잠이 더 잘 올련지 아님 더 안 올련지 가늠키 어려우니 그에 대한 답을 당신에게 묻고만 싶어집니다
디젤엔진의 진동음을 요란스레 선로 위에 남기며 충주댐 상류 지역을 거슬러 달리는 열차가 충주역에 점차 가까이 다가서 절반은 넘게 온 듯하니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제천역에 곧 닿을 것 같습니다.
차창에 스쳐 지나는 겨울 산의 능선과 능선이 잘 그려 놓은 한 폭의 수묵화(水墨?)를 연상케 합니다. 계곡의 아담스레 파인 골들이 사뭇 고웁게만 펼쳐집니다.
마음 가벼운 사람들은 바람이 스치듯 쉽게 만나 헤어짐 또한 자유롭게도 하더군요., 우리 두 사람 그러지도 못함에 짙은 눈물처럼 젖어드는 연민의 정 속에, 이런 아픔 모두 내가 걸머지고 가야 할 숙명(宿命)이기에 이 또한 거부치 않으렵니다.
당신을 그곳 희방계곡에 홀로 남겨두고 되돌아오는 헤어짐이 두려워도 서둘러 가니 당신은 하나 밖에 없는 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과의 주산지 그리고 약초와 산나물, 버섯이 생산되는 곳으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충청북도 내륙 산악 지역 충주역에 닿았습니다.
그곳 역에 3분간 짧게 정차를 한 열차는 마지막 종착역인 제천역에 잠시 후 오전 09시 45분에 도착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