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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喜方)계곡에 너를 두고 5 조회 : 1,329




함께한 나날 동안 틈이 날때마다 당신과 나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말을 숱하게 하였었지요?

"당신과 나 바로 우리 두 사람은 전생에 무슨 인연이 있어나 보라"고

생각이 이쯤에 머물게 되면 슬퍼지려는 마음을 애써 가누려 가물가물해지는 지난 기억들 중에서 어느 하나를 악착스레 떠올려 놓고 다소는 억지스럽더라도 그것에 몰두를 하려고 나름 안간힘을 써 보는 요즘이랍니다.

그리라도 해야만 헝클러진 마음을 가눌 수 있을 것 같은 나만의 착각 아닌 착각을 곧 잘 해본답니다.

참 요즘 당신이 모르는 버릇이 하나 생겼답니다.

내 나이 칠십을 넘겼으니 걸맞지 않을 듯 하면서도 나름 그럴싸하게 보이는 영문 이니셜이 아담스레 프린링 된 티셔츠를 입고, 왁싱이 심플하게 된 부르진계열의 물이 잘 빠진 청바지를 편하게 걸쳐,허리엔 통으로 된 소가죽 벨트를 두룬 후, 바닥 창이 얄포롬한 스니커즈를 신고 정처없이 집을 나선답니다.

가고자 하는 곳이 멀고 가깝고를 굳이 따지지 않고 바람이 불어 등을 살포시 떠밀면 그땐 더디 가는 열차에 그저 홀가분하게 몸을 싣고 어디론가 지향 없이 떠난답니다.

그리 가고 또 가다보면 내 한몸 잠시인들 마음 편히 쉬어 갈 곳은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랍니다.
쇳가루가 자석에 재빨리 들러붙듯 발걸음을 서둘러 완행열차에 오른답니다.

처음인지라 역명조차 낯설은 어느 간이역 안모퉁이에 미아처럼 홀로 남아 자릴 지키는 의자에 몸을 기대 잠시인들 쉬어 갑니다.

뉘 하나 만날 사람 없어 마음 허전할 때엔 작은 소나무의 앙증스런 손이라도 잡아 허한 마음 그리라도 달래 본 답니다.
그리라도 해야만 터질 듯한 가슴이 조금이나마 차분하게 누그러질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히 묻어 난 검푸름한 이끼 속에 몸을 숨겨 슬픈 속내를 감추고 사는 조약돌 처럼, 당신을 이톡록 그리워하는 내 속마음을, 나만이 갖을 수 있는 독아적인 사색의 공간에 오랫토록 박제하고 싶답니다.

허나 현실은 냉엄하기에 이제는 금생에 이렇게 나 홀로 남고 말았으니, 전생에 참으로 그런 인연이 있었는지 그 진위 여부 조차도 논할 수 없게 되었나 봅니다.

당신에게는 지난 날들에 있었던 숱한 일들이 내세에서 다시금 이루워질 수 있을련지는 모르겠으나, 모름지기 홀로 남은 나에게는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결코 피할 수 없는 현생 또는 금생인 듯 합니다.

어느 누가 이리 쉽게 말을 하더군요,
"아픔은 홀로남는 자가 언제나 감당해야 될 몫이라"고
그러니 우리 두 사람, 참으로 질기고 질긴 인연인가 봅니다.

『모진인연

덧없는 세월이 우직하게 삼켜버렸나
애절하기 그지 없는 우리들 사연
빛바랜 기억의 편린을 주우려는 심사에
트여진 창가에 버릇처럼 기대니

흐린 창문 밖으로 어렵사리 내보이는
검추레한 겨울 하늘 한 조각이
그지없이 처연케 보인다.

마음 가득 시린 나를 쏙 빼닮아
가냘프게 등 굽은 초승달이
구름 틈사이를 어렵게 헤집고
창백하게 떠 오르니

늦가을 냉기 가득 서려
더더욱 어스름한 달빛 아래
찬 서리 머리에 인 산국이
새하얗게 뒤틀린 아픔을 토한다.

엉겁에 누질린 마음 한 켠
불치의 병처럼 스멸대는 그리움이
다시금 시름처럼 서려 오니
허한 마음 황량함만 더하고

나목의 앙상한 가지 위
한파에 지쳐 웅그린 새 한 마리
나처럼 따스한 한 줌 빛이
애절토록 그리웠나 보다

머뭇거려 애태우는 맘 애써 가누려
허탈하게 뜨락에 나서니
발섶에 눌린 뾰족한 서릿발이
아픔이 역겨운 듯 소릴 낸다

마디 시린 애절한 기억들인데
때론 양심을 짓밟고 쉽게 버려
또 다른 정을 꿈꾸려는
속물의 근성이 자꾸만 꿈틀대니

지치도록 질긴 인연일랑
너른 들녘 새벽 찬바람 가르며
질주하는 열차의 굉음 따라
광기를 부리듯 애써 지우려 해도

심장의 박동이 멈추지 않았기에
마음은 늘 그 자리에 머물고
그럴수록 더해 가는 허한 심성은
애꿎은 반복만 거듭하니

세월에 따라 혼미해지는 뇌리 속에
정녕코 쉽사리 지울 수 없는
차돌맹이 보다 더 옹골진 너
참으로 모진 인연인가 보다.』

가을걷이가 끝난지도 꽤나된 듯싶네요.
텅 비워 놓은 잿빛의 작달막한 들녘은 허전하다 못해 더없이 황량(荒凉)하게만 보입니다.
경사가 다소는 가파름한 산밑에 야물딱지게 들러붙은 다랭이 논이 너무도 앙증맞게 보여 모처럼만에 싱긋이 웃어 본답니다.

열차는 그런 골짜기 중심부를 좌와 우 양쪽으로 가르며 스치듯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까칠하다 못해 쓸쓸한 논과 밭들이 뿌연 잿빛의 푸석한 모습으로 두 눈 안에 확 들어와 마음 더욱 쓸쓸해집니다.

적요하게 바라보이는 산기스락 끝머리쯤에 띄엄띄엄 빛바랜 나지막한 지붕들이 낯선 곳에 대한 서먹함을 덜어주어더없이 애착이 갑니다.

지난해 겨울 어느 날이였지요.
그곳에 계신 큰스님께서 이런 제 모습이 바라보기에 그리 측은(惻隱)해 보였는지 '이젠 온몸으로 바둥대며 줄기차게 휘어잡은 연(緣)의 끈을 놓아 주라' 하셨습니다.

그날 밤 노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느라 늦은 시간에 새하얗게 쌓인 눈을 밟으며 희방계곡을 내려섰습니다.
바람 찬 영주역에서 열차를 타고 늦도록 집으로 돌아오는 긴 시간 동안 수십 번을 되풀이 하여 생각을 해보았습니다.그날따라 눈섶이 유난스레 짙은 노스님이 그토록 야속하다 못해 얄밉기도 하였답니다.
그런 탓으로 노스님께서 내 손에 쥐어 준 두 뿌리 난(蘭)을 차창 밖으로 휙 내던져 버리고 싶었답니다.

그런 저런 생각에 마음 끝 모르게 서글퍼지기만 하였던 그날의 그 지점을, 오늘 이 시간에 다시금 지나고 있다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깊은 생각에 젖어듭니다.
허나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도 내 마음에 흡족할 답이 있을리 없으니,오선지 악보 선상에 되돌이표처럼 애꿋은 반복만 거듭하고 맙니다.

정말 될 수만 있고 그리 할 수만 있어 당신이 지금 내 곁에 다시 돌아 온다면 힘이 있는대로 와락 끌어안고 애를 태워 보고 싶었던만큼 마냥 울부짖고 싶습니다.

이런 심란스런 내 속내를 애써 외면하려는 듯이 열차는 단말(斷末)의 비명을 하늘 위에 내지르며 어둡기 그지없는 검은 터널 안으로 잽싸게 몸을 숨깁니다.

허나! 열차가 터널 안으로 진입을 해도 어찌 이 짧은 시간의 공백 속에 인위적으로 얻어지는 어둠이 찰나인들 어찌! 내 생각을 뒤바꿔 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차라리 "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였다,밤의 밑바닥이 하애졌다.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라고 시작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소설 "설국"의 첫 장면처럼,
오늘 하루 동안 뒤늦게라도 무릅까지 차오르도록 하얀 눈이옴팡지게 내렸으면 하는 나만의 욕심을 양껏 부려 본답니다.
그또한 이루워질 수 없다면 당신을 만나고 다시금 헤여져
억지스레 발길을 돌리려할 때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이 무거워 버거우면 그 골짜기 어디쯤 후박나무 숲에서 밤부엉이라도 함께 울어주었으면 하는 가슴 아린 생각도 해본답니다.

그 곳 산사를 떠날 때 노스님이 모다 잊으라시며 써 주신 글귀가 가슴가슴 이토록 저려오르게 하니 그 마저도 되뇌이기 싫어집니다

이저런 생각에 몰두하는 동안 열차는 텅 비어 있는 작은 간이역 동량역을 지나고 번대편 선로에서 달려오는 우직스럽게 생긴 화물열차가 '쌩"하고 외마디 소리를 남기며 재빨리 스치듯 지나갑니다.

이제 충북선의 끝머리 제천역에 열차의 머리가 맞닿으려나 봅니다.
차내에 울려퍼지는 안내 방송에 따라 사람들 저마다 앉았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워 주섬주섬 옷가지와 짐 보따리들을 챙겨 들기 시작합니다.
두 시간 가까이의 짧지 않은 여정(旅程)을 무사히 마친 열차가 제천역에 안착(安着)을 하려나 봅니다.

마디 긴 소리를 우렁차게 내어 지르며 역사 입구에 뻘쭘 서 있는 시그널을 통과하였습니다.
이내 제천역 플랫폼(platform)에 닿아 싸늘키만한 겨울 하늘 위로 참았던 긴 숨을 몰아 내쉽니다.

마치 그토록 목이 메이도록 그립기만한 당신을 간절하게 부르는 내 목소리처럼 저도 섭디섭디 서러운 마음 가누워주려고 울었노라고,,,,,,,

지금 이 소리가 당신께도 들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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