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우리가 흔히 쓰는 단어인데,그속에는 필연적으로 기쁨과 슬픔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이 그럴진데 어이타 우리 두 사람에게는 이토록 진한 아픔만을 부여했는지 매정스레 보이는 저 하늘을 향해 무모한 짓인줄 잘 알면서도 우매한 질문을 거듭해봅니다.
이제 열차는 산세가 가파러 구비구비 굽은 육십령(六十嶺) 죽령재를 어렵게 넘으려나 봅니다.
열차가 가뿐 숨을 세차게 몰아쉬니 힘겹게만 보입니다. 그래도 열차는 힘이 드는만큼 있는 기력을 다해 어렵사리 고갯마루를 넘어 섭니다.
이윽고 그런 활기찬 제 모습을 뉘라도 한번쯤은 보아달라는 의미가 가득 담겨진 소리를 높고 넓게 욕심껏 퍼트립니다.
"빠아앙, 빠아앙"
머지않아 숱한 나날을 두고 그리 보고 싶어 했던 당신이 머물고 있는 계곡으로 가는 초입(初入), 바로 희방사역에 닿으리라 믿습니다.
아참! 열차가 충주를 통과할 무렵부터 문득 한 노인 분에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을 하자면 내가 당신을 만나기 바로 두해 전쯤에 있었던 일이였답니다. 화마로 집과 재산을 송두리체 잃고 그마져도 모자라 화재로 인한 법리 다툼에서도 패소를 하여 나름 지루한 세월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더 이상의 지불할 능력이 없어 "권고퇴원'을 당해 어쩔 수없이 치료를 중단하고 말았답니다. 그라도 선심을 쓰는 양 내주는 목발에 의지해 지루한 장맛비가 극성을 부리던 여름날 병원 문 밖을 나섰답니다.어미를 잃어버린 어린 것을 데리고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니 동,서,남,북, 중 어데로 가야할지 참으로 막막 했습니다. 그렇다고 지지리도 복 없는 집안에 태어 난 죄라 어느 곳 하나 의지할 데가 없었답니다. 그래도 아기가 겨우 여덟 살의 어린 나이라 서툴긴 했었지만 혈육에 정으로 자잘한 병 수발을 그럭저럭해서 알게모르게 제에게는 큰 힘이 되었답니다. 그것도 일 년 팔 개월 씩이나 내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정은 산산조각이나 아이가 먹고 자는 것은 물론 그때 말로 의무교육인 국민학교 (초등학교)를 일학년에서 학교 공부마져도 멈출 수밖에 없어 병원이 어아의 놀이 터였고 병실이 아기에게는 유일한 잠자리였답니다. 기구한 운명에 처하고 말았답니다. 이것이 제에게는 두번째의 형벌이였습니다. 그렇게 장기적으로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아침 회진 때에는 과장님과 눈도장을 찍게 되었고, 수간호사님은 물론이려니와 일반 병실 간호사들 까지 자연스럽게 얼굴을 익혀 저와 아이의 절박한 처지를 알게 되었답니다. 그런 연유로 병원내 규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는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일년에 두번 명절 날에는 간호사님들이 차럐를 지내고 남은 음식들을 서로 가져다 주었으며 아이의 생일 날과 성탄절에는 비록 작은 선물이나마 따뜻한 온정이 깃든 세상에서 무엇보다 더 값진 은혜를 입었습니다.
더구나 퇴원 소식이 병원 내에 알려지자 모두들 우리 둘에 생계를 걱정 하면서 간호사님들이 서로 뜻을 모아 아기의 여름 겉옷가지와 반바지 그리고 속옷, 세면도구까지 새것으로 챙겨 주었답니다. 그런 탓에 병원을 나설 때에도 몇몇 간호사님들이 현관 입구까지 따라 나와 아이의 머리를 수없이 쓰담아 주면서 눈물을 흘렸고 아이는 한참을 엉엉 소리내어 울었답니다. 아마도 아이는 또 한번의 이별을 해야만 되는 슬픔이였으리라 믿어 집니다. 병원을 나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남산이였고, 의족에 의지해야만 했기에 거우거우 계단을 올라, "어린이회관"이 있는 곳 까지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날밤 벤취에 앉아 내려다 본 서울에 야경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느낌보다는 두렵기만 하여 저 살벌한 인간들의 틈바구니에서,하늘이 버린 우리 두 목숨이 앞으로 어찌 살아가야 하는 절박함과 어린 자식에 대한 진로 문제 그리고 아이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였답니다. 그날 밤 이런저런 걱정을 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철없는 아기는 버타는 듯하다가 결국엔 밤 늦게 내 무릎에 얼굴을 뮫고 잠에 들고 말았답니다. 이른 새벽녁이 되자 새벽 운동을 하러 나온 사람들의 인기척에 깨어 난 아기가, 병원에서 늘상 하던 것처럼 분수대에 가서 거즈에 물을 묻혀 제 두눈과 얼굴을 닦아 주었답니다. 얼마 후 남대문 시장에 들려 김밥으로 끼니를 떼우고 청량리 역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몸을 실었습니다.
찾아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였고 그렇다고 궁색하게나마 어떠한 계획이 있어서도 아니였으니, 그저 아무런 뜻 없이 더위에 시달려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하는 아이가 너무 가엽서 차라리 냉방이라도 되는 버스를 타려는 아주 단순한 생각 뿐이였답니다.
그렇게 이런 시름저런 시름을 하면서 가다 보니 청량이역 광장에 도착을 하였는데 그 때 아이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냈습니다.
" 아빠 잘 사는 부자들은 모두 저렇게 해수욕장에 가는데 우리는 못 가네" 하면서 이내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문득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잘 곳과 먹을 곳도 없어 당장 저녁부터 걸식을 해야만 하고 공원 벤취나 역전 대합실에서 노숙을 해야만 하니 차라리 그럴바엔 지긋지긋한 서울을 벗어나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만 싶었답니다. 감작스런 내 제안에 당황스런 아이는 엉거주춤하는데 아이의 손목을 꽉 붙들고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함께 열차에 올랐는데 그 열차가 양평과 원주를 거치고 충북 제천을 지나 영주 안동을 경유하여 종착지 경주로 가는 중앙선 열차였습니다. 열차가 원주를 지날 무렵 부터 아이가 배가 아프다고 하였으나, 별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 했습니다. 퇴원을 앞두고 같은 병실에 있던 동료 환자들이 우리와 헤여짐이 섭섭한 마음에 아이에게 줄려고, 가족들에게 부탁해서 이것저것 먹거리를 사왔는데, 갑자기 과하게 기름진 음식물을 과다하게 섭취해, 위장은 물론 장에 까지 부담을 줘 설사를 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그저 어느 정도는 참을 것 같았고,그렇다고 달리는 열차에서 내려 병원에 갈 여유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애를 태우고 있는 데, 차내에 있던 어느 아주머니께서 자기네 집이 제천이라서 제천역에서 내리는데,어디까지 가는지는 모르갰으나 아이가 저리 아프니 재천역에서 같이 내려 얼른 병원에 가보라고 하시며 그리 걱정스럽게 제촉을 해서 그만 경주까지 가려했던 마음을 버리고 하는 수없이 그만 제천역에서 내리고 말았답니다. 사실은 좀더 솔직히 말을 하자면 그 아주머니가 마음씨가 너무 고와 우리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병원에 갈 수있는 돈을 얼마라도 보태줄까 하는 기대심리도 있었답니다. 그러니 제마음은 이미 그때 부터 걸인의 초입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답니다. 아니 당신이 듣기에 몰염치하게 들릴련지는 모르겠으나, 아이를 위해서라면 그보다 더한 굴욕도 참아낼 각오가 어느 정도는 굳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천역을 빠져나오니 그 아주머니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병원 있는 위치만 대충 알려주고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고 말았습니다. 목에 두른 묵직한 금목거리와 손가락에 낀 보석반지가 꽤나 값이 나가는 물건인데, 그 정도의 생활 수준이면 우리 같이 불쌍한사람을 조금이라도 도와 줄 형편이 되어 보이는데, 저리 매몰차게 떠나나 싶어 다소는 서운키도 했답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이 어찌! 정상적인 사람이 갖을 수 있는 옳바른 사고력이겠습니까? 지금까지도 누가 그런 말을 남겼는지 잘은 모르겠으나, "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랄 자격이 없다"라는 말을, 설핏 듣기엔 그럴싸한 이야기 같지만 저는 생각을 달리 하려 했습니다. 그런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은, 삶에 정도야 여하튼 간에 최소한의 노력을 했을 건 뻔한 일인데, 나 처럼 노력도 하지 않고 그저 남이 않 도와주나 하면서 요행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부적합한 일이며, 그런 말을 논 할 자격조차 없는 몰지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 서서히 더렵혀지는 내 육신과 정신에 그나마 끝머리 양심이 그래도 그때까지는 남아 있었나 봅니다.
당황스런 마음에 제 호주머니를 살펴보니 전날 오후부터 그다음 날인 하루 동안, 이리저리 쓰고 남은 돈이 겨우 사천원이였고 심지어 아이 주머니까지 털어 겨우 이천칠백원이나와 모두 다 합쳐 겨우 육천찰백원이 전부였습니다. 어찌보면 그것이 우리 두 목숨이 지니고 있는 전 재산의 전부였나 봅니다. 그 돈을 가지고 병원에 가게되면 우선 병원비가 될련지 아니면 모자라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앞서 주춤거리는데 속 모르는 택시기사는 갈 곳도 돈도 없는 나를 향해 어서오라고 손짓을 하니 참 기가 찰 노릇이였답니다. 당장 날은 저물어 가는데 잠자리야 역전 대합실 의자에서 아이를 꼭 부등켜 안고 날을 새면 되지만 내일 아침 밥값은 어쩌나 싶은 걱정이 앞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애를 태우다 눈에 띄는 약국이 있어 병원 보다는 돈이 덜 나간다는 짧은 생각에 우선 약국으로 절룩거리며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약국에서 아이의 병 증세와 원인을 이아기 하던 중 자연스레(?) 화사을 입게 된 경위와 낯선 타향 땅에 발을 딛게 된 절박한 사연이 나오자,그 약국에 주인인 약사님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자기 부인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약 값을 받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모님이 천원짜리 지페로 다섯장 오천원을 주시면서 (참 이를 어쩌면 좋다냐? 세상에 저 어린 것이 지 부모 잘못 만난 거 밖에 무슨 죄가 있어,그러니 널 보니 내가 다 미치것다, 이거 장 넣고 다니다가 아주 배 고풀 때 굶자 멀고 하다 못해 빵쪼가리라도 사 먹어라.) 그때 솔직히 내 마음은 그랬습니다. 제일 내 귀에 거슬린 말이 부모 잘못 만났다 라는 말인데 그말에 대한 불쾌함은 온데 간데 없고 우선 약값이 공짜에거기다 부수적으로 생각치도 못한 돈 오천원을 얻었으니 이런 횡재가 어디 있냐고 내심 반겼답니다. 물론 약국을 나 설때 불편한 몸에 힘도 들었지만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지만 그 두 내외 분들에게 고마움 보다는 아이의 손에 쥐어진 천원권 지페 다섯장에 더 관심이 갖으니 정말 인두겁늘 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갖어서는 않 되는 아주 추하고 몰염치한 행위였지요. 약국을 나와 잠자리가 걱정이 되어서대합실을 슬쩍 들어다 보니 규모도 작을 뿐더러 아무래도 역무원들이 그냥 잘 수 있게 방치할 것 같지도 않은 생각이 앞서 광장으로 나와 벤취에 앉아 담배 두개피를 거푸 태울 동안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았답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간신히 얻어 낸 결론이 차라리 거지 동냥을 하더라도 도시보다는 시골 인심이 그래도 더 좋을 것 같아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해진 바는 없으나 어느 곳이라도 좋으니 시골로 갈 결심(?)을 하였답니다. 해가 아직은 중천에 있어 날이 저물기 전에 밥 한끼라도 얻어야 어린 것 굶기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아니 그보다는 오랜시간 동안 나를 옥죄여 왔던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것 같아 어린 아기 손을 붙들고 시외버스 정류장 까지 절룩거리며 다리에 무리가 갈까 싶어 아주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걸어 정루장에 도착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잠시 고심을 하다 "단양"으로 가는 버스에 우리 두 사람이 찾아 가는 아주 낯설고 물설은 곳으로 가려고 모든 운명을 맡기고 말았습니다. 단양에 도착하여 시내권을 벗어나려고 외곽지역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걷다 쉬다를 수없이 반복 하면서 한참을 걸으니 논에 물을 대고 있던 노인 한분이 계셔,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내 모습이 여뉘 사람과는 달리 다리를 절어 목발을 짚었고 옆에는 어린 계집애까지 딸럈으니 이상한 느낌이 들었는지 한참을 망서리다 나를 향해 "가곡"이라고 대답을 해주시면서 잘은 모르겠으나 저 어린 걸 데리고 집을 나선 걸로 봐서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누구네 집을 찾아 가냐고 묻기에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논에서 일을 하시던 노인 분께서 밖으로 나오면서 나를 향해 조금 전처럼 또 다시 질문을 하였습니다. "아 글쎄 누구네 집을 찾냐고요" 그래도 답이 없자 하던 논일이나 그냥 할려고 그러는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 길 아래 논으로 내려 갈려 하는 바로 그때였습니다. "우리 아빠랑 나랑 배가 고푼대 돈이 없어서 밥 얻어 먹을라고 그래요" 전혀 애기치 못했는데 아이가 나를 대신해서 우리가 처해진 절박한 입장을 제 수준에 딱맞게 표현을 하고 말았답니다.그러자 그제서야 모든 것을 알겠다는 표정을 지으시며 다시금 발길을 돌려 길 위로 올라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한 아이가 왠지? 측은해 보였는지, 다소 여유를 갖고 아이 앞으로 다가서며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그래 배고파서 아빠랑 넘네 집에 받얻으러 가는 길이냐?' "예' 참으로 아이에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말 한마디 속에 모든 것 함축되어 상대인 노인 분을 이해시키기에 충분했었습니다.더불어 노인 분과 나 사이에 짧게나마 흐르고 있던 서먹함을 걷어 주는 계기를 부여해 주었답니다.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기에 그 분에 얼굴이 잘 떠오르질 않아 조금은 안쓰러울 따름이 이었습니다. 당신이 더 잘 알고 있듯이 커피를 지나칠 정도로 즐겨 마시는지라,보온병에 담긴 커피에 몇 차례 손이 갔었습니다. 그러나 나 혼자서 먼저 마시고 나면, 당신을 만났을 때 혼자 마셔야 하는 당신이 그도 외로울까 싶어, 그저 꾹 참고 조금만 더 달려가 당신과 함께 마시려고 합니다.
시간 상으로는 약 세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온 듯한데 아직도 조금은 더 달려가야만 하니,오늘따라 더더욱 거리가 멀게만 느껴집니다.
"보고 싶어 그립다"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도 이렇듯 마음은 가없이 초조해질 뿐입니다. 어서 빨리 달려가 우리 스스럼없이 다시 만납시다. 그와 더불어 오래도록 못 다한 말들 나누어 이루지 못한 사랑의 나래를, 애를 태웠던 만큼은 끝 없이 펼쳐보고 싶습니다.
수를 헤아리기 어렵도록 숱한 밤을 홀로 지새워 그리 하고 싶은 말들이 천체(天體])의 별보다 더는 많았답니다. 허나 홀로 남겨졌기에 가슴 저려오는 의미조차 있을리 없어 토막 난 말들이,텅 빈 시간의 공백을 어설피 채웠나 봅니다.
이토록 아쉬울거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의식적으로는 그리 쉬운 듯 하면서도, 끝내 지키지도 못한 과실을 그저 애를 쓰는 척하면서 변명 아닌 변명으로 회석시키려 하니, 참으로 인간답지 못함에 부끄러움을 느껴 오늘도 당신 곁에 겸연쩍게 머무를 뿐이랍니다.
추운 겨울 날씨 탓도 있겠지만 오늘 따라 유난스레 내 감성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당신을 만난다는 긴장감과 기대 속의 설레임이 더없이 크기 때문인가 봅니다.
비탈진 산자락을 따라 내려서는 차창 밖으로 투시되는 방만한 크고 작은 산들이 저마다 방만한 위용을 과시하니 소백산 또한 영산으로써 손색없이 없는 듯 합니다.
그런 멧기슭 어디쯤에서 작은 집 하나쯤 꼭 짓고 싶은 욕심이 움틀 합니다.
언제나 앞을 내다보면 시야가 시원스레 탁 트여 저멀리 아득하게라도 산능선 너머 또 하나의 산능선이 겹쳐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 해맑은 날엔 햇살 곱게 내려 쬐여 온 만물들이 빛의 은혜를 듬뿍 받아 자라나는 오붓한 곳, 그리고 또 하나 온 산을 헤집어 돌고돌아 예쁜 조약돌을 살뜰하게 어루만져 주는 투명하게 맑고 깨끗한 물이 사시사철 적절하게 흐르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적합한 개울 물이 흐르는 곳에, 작아 더욱 아담스레 보이는 예쁜 집 하나 지어 놓고, 뜨락엔 작달막한 채소밭도 만들어 가꾸며 욕심 없이 살고만 싶어집니다.
그러다 선홍빛 노을 자락 짙게 물들어 오면 뜨락 한모퉁이에 놓여진 그루터기에 덥석 앉아 따뜻한 차 한잔을 함께 나누고 그도 싫증이 나면 아무런 말 없이 서로 몸을 기대고 싶습니다.
비록 서로 주고 받은 말들이 다른 남들에 비해 그리 적었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눈만 바라보아도 우린 그 다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 나 혼자만이 아니였으니, 당신과 함께 떠났던 산행 속에서 당신이 나에게 한번쯤 이런 말을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살면서 가끔 아옹다옹 다투다 서운해지면 언제 그랫냐는 듯 서로 등 두드려 달래주고, 마른 장작 타는 소리 정겹게 들리는 우리 두사람이 팔소매 걷어 부치고 흙을 이겨 만든 벽난로 앞에 다정스레 앉아 마른 장작 타는 정겨운 소리에 머릴 모아 귀를 기우리고,부질 없는 욕심없이 오손도손 살고 싶다던 당신의 말이, 메마른 가슴 속을 후벼 진한 아픔 한자락을 소리없이 남깁니다.
육십령 높기만한 재를 몇 차례쯤은 돌고 돌기를 반복한 열차가 숨 가쁘게 내리막 길을 내려섭니다. 산밑 아래 작은 역사 하나가 또렷하게 보입니다. 그러더니 열차가 달려 갈 수록 가슴 설레임으로 눈앞에 점점 커다랗게 다가섭니다.
열차 승무원이 차내 방송으로 다음 정차역은 희방사역이라고 알려줍니다.
이제 이른 아침부터 나선 원행을 이곳에서 멈추고, 올 때마다 늘 그렇듯이 구름이 손짓으로 가리켜 주는 곳, 길 폭이 좁아 앙징스런 산길을 따라 당신 앞에 마냥 설레여 부풀어 오는 마음으로 다가서렵니다. 다시금 말하지만, 그날 밤 당신이 그리 고통스러워 하며 눈을 채 감지도 못하고 마지막 숨을 내쉬지도 못한 체 살을 찟는 듯한 이별을 하였던 것은 분명 하늘의 저주였기에 내 모든 것을 그리 무참하게 송두리째 앗아갔고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악몽이였답니다.
이제 뒤늦게서라도 이렇듯 건강을 되찾았기에 의젖해진 모습으로 마냥 설레이는 마음을 가듬고 당신 앞에 떳떳히 다가 서렵니다. 조금 멀리 인삼의 고장으로 외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풍기 읍내가 가뭇가뭇한 모습으로 아스라이 내다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