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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메로 가는 길 - 124 조회 : 2,301




짙은 군청색 하늘이 더할 나위 없이 푸르러 드높기만 했다. 불그레 녹이 슨 동네 방앗간 지붕 너머로 가죽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다. 그 가죽나무 가지 사이에 걸쳐 있는 까치둥지가 너무도 외롭게 보였다. 둥지에서 조금 떨어진 나뭇가지에 까치 한 마리가 야멸차게 떠나간 어린새끼들이 그도 그리운지 애를 태워 우짖고 있었다.
비록 미물인 날짐승일지라도 새끼들을 그리는 모성애만큼은 우리 인간과 크게 바 없는 것같았다. 그리 얼마 동안을 세차게 울어대던 까치가 이젠 제 풀에 지쳤는지 어디론가 훌쩍 날아갔다.

마을 한가운데 연자방앗간 공터에서 동네 아이들의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와 바라보았다. 마당 한구석 양지바른 곳에 등마루에 사시는 노인 한 분이 땜질 일을 하고 있었다. 키가 작달막하고 이마가 조금 벗겨진 그 노인을 동네 사람들은 땜쟁이라고 불렀다.
노인은 동그란 화덕에 숯불을 시뻘겋게 피워 놓고 땜질 인두로 밑바닥에 구멍이 난 양은 솥단지와 깨어진 세숫대야를 때우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땜질하시는 모습이 신기한 듯 불이 벌겋게 달아오른 화덕 앞에 쪼그려 앉아 두 손으로 턱을 고여 짯짯이 바라보고 있었다.

길 건너편 종구네 집에서는 정희 누나가 안 방에서 재봉질을 하는지 ‘툴툴툴툴’ 재봉틀 돌리는 소리가 담 너머까지 들려왔다.
이장님댁 마루에서는 겨울 이불을 손질하시는지 할머니와 아주머니 두 분이서 다듬돌 위에 하얀 광목 이불호청을 올려놓고 호흡을 맞춰 ‘뚝딱뚝딱’ 다듬이질을 하고 있었다.

향나무 두 그루가 소담스레 자리한 동네 우물가에는 동네 아주머니들 몇 분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마도 조금 전에 우물 앞으로 지나간 영택이 아버지와 그 아주머니에 대한 말을 주고받는 듯했다.

어릴 적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많이 얽으신 주현이 어머니께서 말을 꺼내셨다.

“아, 근디 말여 다들 눈으로 보았으닌께 알긋지만, 중택이 아버지허구 새각시 나이 차이가 설찬허게 나는 거 같던구먼 그려, 기나저나 참 재주두 좋지, 으디서 그런 젊디젊은 각시를 데려왔을까나? 보통 재주는 아니여.”

그러자 함지박 속에 고구마를 수세미 속껍질로 문대고 계시던 인식이 어머니가 앞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시며 말을 거드셨다.

“아 그 양반이사 원래 속심이 깊어서 복 받느라구 그런 인물 좋은 시악시를 구한 모양이구먼 그려, 죽은 자기 여편네가 도와줬는가, 어찌됐든 간에 그 어린것들 남겨 놓고 그 여편네 세상 그렇게 무심허게 떠나 버리구, 영택이 애비 혼자서 어린 두 남매 그만치 키우느라 남모를 고생두 많이 했지 뭐, 하여튼 앞으로 잘 살아야 헐틴디.”

인식이 어머니의 말씀이 끝나려 하자 우물가 턱 위에 물동이를 들어 올려놓고 똬리를 머리 위에 얹으려 하시던 종금이 누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그러게나 말일세 기왕지사 그리 된 것 그저 아무 탈없이 오손도손 잘 살아야 헐긴데 그게 걱정이구먼 그려, 중택이야 나이가 어려서 별 문제 읍지만 중례는 나이가 찰만큼 차서 이 것 저 것 다 눈치 챌 나이라 새로 들어 온 그 여자랑 서로 맘 맞추고 살기가 어려울건데 그게 걱정이네, 그리고 들리는 말로는 아까참에 본 그 여자가 논산 읍내 시장터에서 포목점을 헌다구 허든디, 그렇게 젊은 여자가 혼자서 어떻게 포목점을 하는가? 난 쪼매 이상한 생각이 드네 그려. 내가 직접 내 눈으로 본게 아니라서 뭐라 딱 꼬집어서 말하기가 그렀구먼, 나름대루무슨 깊은 속사정이 있는지 없는지 잘은 모르것지만서루 ”

그러자 곁에서 김칫거리를 물에 씻고 계시던 경수 아저씨 부인이 말을 했다.

“아이구 아줌니 그런 말 함부루 허지 마세유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구 오다가다 누구라두 듣구 그 집 식구들 헌티 말이라두 전하면 어쩔라구 그런디유.”

그러자 종금이 누나 어머니가 물동이를 머리 위에 올리고 발길을 옮기려 하시며 말을 서둘러 하셨다.

“아니 병수네 에미는 내가 뭔 말을 했다구 그려, 그냥 나 혼자 생각이 그렇다는 거지 뭐 그리구 이 자리에 우리끼리 있었는디 뭔 말이사 나긋는가 안 그려?”

종금이 누나 어머니가 말을 마치고 우물터를 벗어나자 그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으신 인수 어머니께서 고샅길로 걸어가시는 종금이 누나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시며 말을 하셨다.

“하여지간에 저 여편네두 오지랖이 넓은만큼이나 입바른 소리를 잘혀서 탈이지 그래두 경우에 안 빠지게 행실 바르게 허구 사닌께 별 탈이야 없지만서루.”

그러자 속내복을 물에 빨고 계시던 주현이 어머니가 인식이 어머니를 바라보시며 말씀을 이으셨다.

“ 그나저나 내일이 기수 총각 큰일 치르는 날이라 그런지 삼식이네 집으로 남정네들 우르르 몰려가는 거 보닌께 낼 잔치에 쓸려구 돼지라두 잡으려는가 보네유.”

그러자 흙을 다 씻어 낸 고구마를 맑은 물에 헹구시던 인식이 어머니가 주현이 어머니 말끝에 말을 이으셨다.

“응, 그런거 같대. 아까참에 우리집 앞으로 삼식이 아버지가 암돼지 한 마리 회초리로 몰면서 지나가던디 시방 생각혀 보닌께 낼 잔치에 쓸라구 그랬구먼.”

삼식이네 집에서 돼지를 잡는다는 말을 듣고 호기심에 구경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때 미나리 밭 좁다란 샛길로 병수 아버지가 콧노래를 부르며 삼식이네 집을 향해 걸어가셨다.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는 삼식이네 집 마당에는 동네 아저씨들 몇 분이 양지바른 쪽에 앉아 있었다.

삼식이가 돼지를 잡는다고 소문을 냈는지 같은 또래인 동네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마당가에 넓다랗게 놓인 바윗돌 위에 네 쪽 다리가 새끼줄로 꽁꽁 묶인 채 바동대며 ‘꿰에엑. 꿰에엑, 꿰에엑’ 소리를 지르는 돼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삼식이 아버지가 부엌에서 삭정이에 불을 붙이느라 그랬는지 눈 가장자리에 묻어난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시며 밖으로 나오셨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씀하셨다.

“아니, 오늘 신부집에 함지고 갈 함진애비는 정했는가 몰르것네 그려.”

마당가에 서 계시던 키가 유난스레 크신 병수 아버지가 방금 말을 끝마치신 삼식이 아버지를 거드는 척 말씀을 하셨다.

“그 뭐시냐, 어쩌구저쩌구해두 신부 집에서 신랑 다음으로 허리 구부려 큰손님 대접 받는게 함진애비인디 그래두 마을에서 말께나 하는 양반이 갔으면 쓰것구먼 기수 엄니 생각이 어쩔란가 모르것네.”

말을 마친 병수 아버지가 볏짚 둥우리에서 볏짚 끝을 잘라 입에 물으시고 술 생각이 나는지 부엌 앞에 내려 쳐진 거적때기를 제치고 들어가셨다.
얼마 후 삼식이 아버지가 부엌을 나서며 손에 함지박과 날이 시퍼렇게 선 예리한 칼 한 자루를 들고 돼지가 누워 있는 쪽으로 다가셨다. 그리고 마당가에 몰려 있던 우리들을 향해 멀리 다른 곳에 가서 놀으라고 냅다 큰소리를 치셨다.

“어이 경수동상하구 기성이 자네들랑은 쟈들 절대루 요기 못보게 멀리 내쫓으라구 애들이 봐서 좋을 꺼 한 개두 없으닌께 얼른.”

그러자 경수 아저씨와 기성이 형이 어린 우리들이 못 보게 하려고 마당 밖으로 내쫓으셨다. 앞 텃밭 쪽으로 밀려 도망을 치던 우리들은 그래도 보고 싶어 경수 아저씨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한발 한발 다가섰다.
그리고 어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노려 조금 거리를 두고 바라보았다.

얼마 후 어른들이 돼지가 움직이지 못하게 무릎에 힘을 줘 누르고 삼식이 아버지가 예리한 칼로 돼지의 생목을 찌르셨다. 그러자 돼지가 죽는다고 소리를 한번 크게 내지른 후 몇 번쯤 ‘쿨럭쿨럭’ 가쁜 숨을 힘없이 내쉬다 이내 조용해졌다.
칼에 찔린 돼지의 목에서는 시뻘건 피가 쿨럭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병수 아버지는 함지박을 목에 대고 선지를 받고 있었다.

기성이 형이 부엌에서 물동이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물을 가져와 돼지 몸뚱이에 몇 차례 고루 쏟아 부었다. 그러자 동네 어른들이 잘 드는 칼로 돼지의 검은 털을 벗기셨다.
그랗게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온통 검게만 보였던 돼지가 뽀얀 살을 드러내여 조금은 우습게 보였다.

경수 아저씨와 기성이 형이 작대기를 들고 너무 세게 몰아붙여 아이들은 동네로 도망을 쳤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은 보질 못하고 그만 우물가로 돌아오고 말았다.
기수형네 집에서는 잔치 음식을 장만하는지 동네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구수한 기름 냄새와 함께 고샅길 담 너머로 들려왔다.

영택이네 집에서는 영택이 아버지가 새 장가를 들어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다른 날보다 축음기를 크게 틀어 놓은 것 같았다.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 동동주 술타령이 오동동이냐, 아니요 아니요 궂은 비 오는 밤 낙숫물 소리, 오동동 오동동 그침이 없어 독수공방 타는 간장 오동동이요.’

좁다란 고샅길에 여자 가수의 밝고 명랑한 듯하면서도 간드러진 노랫소리가 울려 펴졌다.

그때 마을 앞을 지나는 뚜껑 없는 곳간 화물 열차의 기적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기차가 남긴 요란한 진동에 오동동 타령의 노랫가락이 묻혀 잠시인들 들리는 듯 마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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